강주희 (1908~1974)

姜周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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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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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희 신부.

수원교구 신부. 세례명은 방그라시오. 황해도 벽성군 나덕면(黃海道 碧城郡 羅德面)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부친 강재규(姜在奎, 베네딕도)가 24세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信川郡 斗羅面 清溪洞)에서 안중근(安重根, 토마)의 부친인 안태훈(安泰勳) 진사의 권유로 빌렘(Wihelm, 洪錫九) 신부에게서 영세하면서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강주희 신부는 6세 때 안중근을 대부로 빌렘 신부에게서 영세하였다.
황해도 감목 대리구의 예비 신학교 구실을 하던 장연(長淵) 천주교회의 경애(敬愛)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황해도 감목 대리였던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의 권유로 18세에 용산(龍山)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36년 3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어서울 약현(藥峴, 현 중림동) 본당의 보좌 신부 겸 가명(加明)학교 교장으로 4년 동안 활동하였고, 황해도 곡산(谷山) 본당을 거쳐 1942년 장연 본당으로 전임되어 1950년 6 · 25 동란으로 남하할 때까지 8년 동안 일제 치하와 해방 후 공산 치하의 어려움 속에서 사목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약 40년 동안 장연 지방의 명문 사학으로 많은 인재를 양성한 경애학교가 인민(人民) 학교로 국유화되고 과수원 등 수만 평의 교회 토지가 무상 몰수되는 등 피해를 입기 시작하자, 교육 사업뿐만 아니라 전교 사업도 위축되리라 예상한 강주희 신부는 먼저 본당 수녀들을 평복(한복)으로 갈아 입게 한 후 해주를 경유하여 월남시켰다. 6 · 25 동란이 발발하자 황해도 내 각 본당의 성직자들 대부분이 체포 구금되었으나 강주희 신부는 김충연(金忠淵, 고스마) · 최정애(崔貞愛, 루치아) 부부 등 교우들의 노력으로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9월 북한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0월 백령도에 주둔하였다가 후퇴하던 북한 공산군 잔류 부대에 의해 장연 본당의 성당 · 학교· 사제관 · 수녀원이 전소(全燒)되었다. 방공호에 숨어 있다가 밖으로 나왔던 강주희 신부의 부모와 여동생 주인(周仁, 마르티나), 경애학교 여선생은 강주희 신부의 행방을 함구(緘口)하다가 성당 과수원으로 끌려가 모두 사살당하였다.
교우들의 보호로 화를 면한 강주희 신부는 매제인 김원식(金元植, 마티아)의 안내로 교우들과 함께 해주(海州)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12월 20일 자신의 구출 사명을 띠고 온 3명의 연평도 대한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공산군의 포위망을 뚫고 해주항 용당포(龍塘浦)에 도착, 국군 해군 함정에 승선하여 이튿날 연평도에 도착하였다. 12월 28일 인천에 도착하였으나 1 · 4 후퇴로 강주희 신부는 부산으로, 같이 온 교우들은 목포로 남하하였다. 환도 후 서울교구 당가(경리)로 임명되어 한영방적 건, 경향신문 건, 가톨릭의대 창립, 성모병원 운영, 소신 학교 건립 등 당시 서울교구 유지 재단에서 벌인 어려운 교구 사업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1958년 10월 신설 연평도 본당으로 전임되어 성당을 신축하고 300명이던 교우수를 1,200명으로 증가시키는 등 2년 동안 교세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어 동성(東星)중고등학교와 경기도 안성(安城) 본당, 안법(安法)고등학교를 거쳐 1964년 경기도 왕림 본당(旺林本堂, 갓등이) 주임 겸 광성(光星)국민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노후한 기와집 성당을 80평 규모의 새 성당으로 신축하였다. 1972년 경기도 서정리(西井里) 본당에서 사목하던 중 위암이 재발되어 입원 치료를 받다가 1974년 4월 29일 선종, 미리내 수원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 가명학교 ; 곡산 본당 ; 서정리 본당 ; 연평도 본당 ; 왕림 본당 ; 장연 본당 ; 중림동 본당)
※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教會史》. 〔尹善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