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 정사박해(丁巳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라우렌시오. 충청도 홍주의 면천(沔川, 지금의 당진군 지역)에서 태어나 그곳에 전파되었던 복음의 진리에 대해 듣고, 서울로 올라와 지황(池璜,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 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천주교 교리를 이웃에 전하는 데 힘쓰던 중,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홍주의 신자들이 체포되자 옥으로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되느냐" 고 하면서 관장에게 당당히 호교론을 펴다가 면천 관아에 투옥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형벌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다시 해미와 홍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은 뒤 조정의 조치로 석방되었다.
이후 박취득은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797년 충청도 관찰사가 도내에 명령한 박해로 인해 각처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을 때, 체포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포졸들이 그 대신 아들을 체포해 가자 곧 은둔처에서 나와 자진하여 관장에게 나아갔다. 그리고는 관장의 문초에 답하면서 십계명의 가르침을 자세히 설명한 뒤, 천주교 신자들은 그 계명에 따라 "먼저 천주를 공경하고, 다음에는 임금님과 관장과 부모와 어른들을 모두 공경하며, 친구와 은인과 형제들과 다른 사람들을 다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당시 그가 믿음으로 설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공로, 부활과 재림, 그리고 천주교의 온갖 교리 내용들은 이후 신자들의 입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박취득은 그 해 8월 이래 7개월 간 면천 관아에 갇혀 있으면서 네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았는데, 뇌물을 요구하는 옥졸들의 유혹을 뿌리침으로써 더 많은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1798년 초에 해미 진영으로 이송되어 계속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약 1년 동안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마침내 영장은 관찰사로부터 매질을 해서 죽여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낸 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하거나 옷을 벗긴 다음 상처 입은 몸을 진흙 속에 내버려두어 고통을 겪도록 하였다. 이 무렵 그의 모친에게 보낸 옥중 서한에서 그는 십자가의 발현에 관해 언급하였으며, 다음날부터는 순교의 시각만을 헤아리면서 계속하여 매를 맞았지만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박취득은 목을 졸라 죽이면 될 것이라고 옥졸들에게 말하였고, 옥졸들이 이를 따라 순교의 길로 이끌었으니, 그때가 1799년 2월 29일이었다. (→ 정사박해 ; 지황)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上/ 《日省錄》. 〔車基眞〕
박취득 朴取得(?~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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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