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교적 단체의 구성이나 활동, 그리고 이와 관련 된 말과 표현들을 금지하고 탄압하는 것.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로마 박해 이후에도 페르시아 · 터키 · 중 국 · 일본 등지에서처럼 여러 나라에서 계속되었으나, 특 수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처음 3세기 동안의 로마 박해를 가리킨다.
I . 로마 시대의 박해
그리스도교는 복음 전파 초기부터 로마 제국 내의 여 러 요소와 긍정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아주 빠
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즉 국경을 없애고 대제국을 형성 하여 행정 질서나 언어 · 문화가 통일되어 있었던 점, 상 업 교통 수단이 잘 발달되어 있었던 점, 그리고 제국 어 디에나 퍼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 등과 예수 탄생 당시에 로마 제국은 이미 평화 시대로 접어들어 있었던 점 등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 스도교가 빠르게 확산되자 결국 로마 제국과 마찰을 일 으켰고 이것이 박해로 이어졌다.
〔원 인〕 로마 제국은 62년 네로(Nero, 37~68) 황제의 태도 변화가 있기 전까지는 대체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게 호의적이었다. 로마의 행정 관리들이 그리스도인들에 게 관대한 입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팔레스티나 지방 에서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즉 과격한 일부 유대 인들은 유대 해방을 부르짖으며 유대 독립 전쟁을 일으 키는 등 계속해서 소요를 유발시킨 것에 비해, 그리스도 인들은 로마 제국에 대해 아무런 적의를 보이지 않아서, 그리스도인들을 단순히 영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이라 고 여겼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가지 역사적 정황으로 미 루어 생각할 수 있는데, 사도 행전 13장 7절에서 로마 총독 세르기오 바울로(Sergius Paulus)가 보인 관심이나, 18장 12절 이하에서 총독 갈리오(Gallius)가 참견하지 않 은 태도, 19장 35-40절의 에페소에서 발생한 소동에서 행정 관리가 바오로를 보호한 것, 21장 32절 이하에서 바오로 사도를 체포할 때 그를 보호하는 모습 등에서 엿 보인다. 그러나 62년경부터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관심 이나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면서 호의적이던 관계가 무너 지고 박해가 발생하였다.
그리스도교와 로마 제국은 부딪힐 수밖에 없는 요인들 을 이미 갖고 있었다. 우선, 로마 제국은 국가를 절대시 하는 다신교(多神敎)적인 경향을 지녔으며, 현실의 생활 속에서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국가의 전쟁에 열 성을 가지고 참여하는 국가 종교의 제국이었다. 로마인 에게 있어서 국가는 삶의 목적이며, 개인도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의 것만 추구하지 않고, 유일신(唯一神)인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구원이 인간의 삶의 원인이며 목적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지 향점보다 더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목적이 있는 그리 스도인은, 충실한 시민이라 할지라도 정신적으로는 국가 안의 이방인, 즉 국가의 절대성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사 람들이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신앙 생활에 대한 무지 역시 충돌 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은둔, 특히 광 야에서의 수도 생활은 중상의 요인이 되었다. 신자들의 모임 때 나누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인육(人肉)의 제 사라 생각하였고, 신자들의 '형제 자매' 로서의 일상 생 활은 근친 상간(近親相姦)이란 소문을 만들어 냈다. 이 러한 오해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불 협화음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로마주의와의 대립이라 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본 요소가 충돌하는 박해의 직 접적인 계기는 64년 7월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였다.
〔법적 근거〕 로마 제국은 법을 중요시하는 국가였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려면 법적인 근거가 필요하였 다. 첫 번째 박해인 네로의 박해는 황제 자신이 일으킨 대화재의 범인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지목함으로써 발생 하였다. 그러나 그 후부터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 내에 서 불법 종교가 되었다. 그 뒤 줄곧 박해로 이어졌는데, 학자들은 박해의 법적인 근거를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지적하였다. 우선, 신성 모독이나 국가의 제신(諸神)에 게 제사를 거부한 경우에 대한 일반법을 적용하였다는 것과, 둘째로 공공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통치 자의 재량권에 의해서 단죄받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셋째로 황제의 칙령이나 원로원의 결의에 의하여 특별법 이 제정되어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외적인 법규가 적 용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주장 중 어느 것 하나로 박해의
법적인 근거를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이에 대한 새로 운 가설들이 등장하였다. 로마 제국에 박해에 대한 법적 인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대중의 편견이나 극단론자들 이 그리스도교인들을 증오하여 박해하도록 종용하였다 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 옛 법에 새로운 종교를 인정하는 데에는 원로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법규가 있 었다는데, 티베리우스(Tiberius, 14~37) 황제가 그리스도 교를 인정하려 했지만 원로원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동의를 거부함으로써 불법 종교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하나는, 로마 제국은 종교 정책상 일반적으로 새 로운 종교는 우선 금지시키고 후에 관용을 베풀어 왔는 데, 이 관습법이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었다는 주장이 다.
〔과 정〕 네로 황제로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 tianus, 284~305) 황제까지 이어진 박해의 횟수를 역사가
들은 대체로 열 번 정도라고 한다. 그 러나 박해의 숫자나 박해의 이름은 다 분히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박해는 시간적으로 또 지역적으 로 계속 이어진 사건이지 매듭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10번 의 박해가 있었다는 것은 출애굽기의 10가지 재앙이란 숫자와 비교해서 만 들어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49년경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 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직접적 인 박해라고 볼 수는 없으나 그리스도 교인들과 유대인들과의 사이에서 생 긴 소요로 인한 것이었다고 로마의 전 기 작가이며 전통 문화 연구가인 수에 토니우스(Suetomius, 69~122)가 그의 저 서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 에서 밝혔다.
본격적인 첫 번째 박해는 64년 7월 18~19일 밤 사이에 일어난 대화재 로 로마시의 반 이상을 불태운 사건에 기인한다. 네로 황제가 로마를 새로 짓기 위해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돌자 이 소문을 막으려고 그리스도인 들을 화재의 책임자로 지목하여 처형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타치투스
(Tacitus, 55~120?)는 '인류에 대한 증오' (Odium humani generis)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기술하였다. 로마사가들 대부분이 그리스도교가 위험하고 유해하며 사악한 종교 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중의 편 견은 아주 심했다고 여겨진다.
그 다음의 박해는 도미티아누스(Domitans, 81~96) 황 제의 재임 기간 중 발생하였다. 황제는 제국을 재정비하 기 위해 국가 종교를 재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숭배를 하게 된 다는 이유로 따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일어난 박해에서, 신성 모독죄와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황제의 사촌인 집 정관 플라비우스 글레멘스(Flavius Clemens)가 처형되었 고, 그의 아내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a)와 자녀 들도 화형을 당하였다. 이 박해는 몇몇 지방으로까지 확 산되었으며, 오랜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도 이때 파트 모스(Patmos)로 유형(流刑)되었고, 그곳에서 《요한의 묵 시록》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트라야누스(Trajaus, 98~117) 황제 박해시에는 안티오 키아의 이냐시오(ignaius Antiochiae, 35~107)가 로마의 원 형 극장에서 맹수형(猛獸刑)으로 순교하였다. 그렇지만 이후 많은 황제들이 행하였던 박해에 대한 지침은 이 트 라야누스 황제 때 내려졌다. 이 지침은 비티니아(Biby- nia)의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Pinius)가 황제에게 112 년경 사적으로 질문서를 보낸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후 에 관습법이 되었다. 그는 황제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많
아져서 신전 예식이 등한시되고 있고, 제물에 쓰이는 고 기도 적게 팔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재판해 보니, 그리스도인임을 부정하고 신전에 분향하는 이들이 있고, 과거에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라면서 분향하 는 이들, 그리스도인으로 신전에 분향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시민으로서는 잘못한 것이 없는 사 람이다. 그러므로 나이를 고려해야 할 것인지 배교자를 용서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잘못이 없어도 단지 그리 스도인이란 이유만으로 처형해야 하는지"를 질의하였다. 이에 트라야누스 황제는 "전반적인 규범은 정할 수 없지 만, 그리스도인들을 수색하지는 말며 고발된 자 중에서 배교자는 용서할 것이며 고집하는 자는 처형하되 익명의 고발은 받지 말라"는 답서를 보냈다. 이로 인해 그리스 도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황제의 결정은 이후 대부분의 황제들이 따랐던 규범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Hadhamus, 117~138) 황제는 그리스도인 으로 고발된 자를 정상적인 법정에서 심의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스토아 철학자이기도 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161~180)는 당시의 기근과 질병과 전쟁의 원인이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라고 간주하고 많은 사람들을 원형 극장에서 공개 처형하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93~211) 황제는 처음에는 그 리스도교인에게 호의를 가졌으나, 202년 그리스도인으 로 개종하는 행위를 형벌로 규정하고 격렬한 박해를 일
으켰다. 그의 박해는 예비 신자나 새 영세자들에게 특히 집중되었기 때문에 '예비자 박해'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예비자가 많았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자가 많았으며, 이집트와 동방에서 박해가 심하였다. 이후 한 동안 잠정적인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 교가 널리 확산되었다. 잠정적인 평화는 시간적 · 지역적 으로 잠깐씩 이루어졌는데, 대체로 새로운 황제의 즉위 초기에는 박해가 중단되었고 지방에서는 지역마다 박해 의 강도가 달랐다.
그러나 막시미누스 트락스(Maximinus Thrax, 235~238) 황제는 전임자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ns Alexander, 222~235) 황제와 그 전임 황제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용 정책을 펼친 것과 또 그 황제 집안에 복수를 하겠다 는 정치적인 동기로 교회 지도자들을 처형하라는 반그리 스도교적인 칙령을 반포하였다.
데치우스 황제(Decius, 249~251)는 로마 제국의 일치를 위해서 모든 제국 국민은 로마의 국가 종교로 복귀시킨 다는 목적으로 제국 내에 전체적인 박해를 명령하였으 며, 249년 12월부터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하 였다. 250년 중엽에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제국의 전 주 민은 제신(諸神)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포고가 내려졌고, 제헌 의무를 다한 자에게는 제헌 증명서가 발급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교인들을 가려내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많은 배교자가 발생하였다. 실제로 제물을 바친 사 람들(sacrificai)이 있었고, 분향은 하지 않았으나 뇌물 등 의 방법으로 증명서를 소지한 자들(ibellatici이 나타났으 며,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이름을 제헌자 명부에 오르 게 한 사람(acta facientes)도 있었다. 이 박해로 인해 교회 내에서는 배교자(laps)를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 (reconciliatio)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다.
발레리아누스(Vaiaiamus, 253~260) 황제는 재무관인 마 조리티아누스(Macominian)의 조언으로 칙령을 반포하였 다. 257년에 내려진 제1 칙령은 교회 조직을 무너뜨리 기 위해 주교 · 사제 · 부제들에게 제신에게 제물을 바치
고 분향을 지시하는 내용으로, 묘지나 카타콤바에서 미 사를 봉헌하거나 비밀 집회를 가지는 자는 사형에 처해 졌다. 258년에 내려진 제2 칙령은 제헌을 거부한 모든 성직자를 즉시 처형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 인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은 면직되었으며, 평신도 지 도자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결국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약 40년 간의 평화는 신자수를 급증시켰다. 성당이 지어졌고 공공연하게 전례가 거행되기도 하였으 며 그리스도인들이 관직에도 많이 진출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timus, 284~305) 황제는 제국을 재정비하고 다시 강력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는 데, 제국을 부활하기 위해 종교를 통일시키겠다는 의도 로 303년에 박해를 일으켰다. 그 첫 단계는 군대와 궁정 에서 신자들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군인들과 궁정 관리 들에게 신전 분향을 명하고 거절하면 추방하거나 사형시 켰다. 또 모든 성당의 파괴를 명하였고, 그리스도교 서적 의 인도와 소각, 종교 집회를 금지시켰다. 이 박해를 보 다 확실히 하기 위해 그는 4회의 칙령을 반포하였는데, 304년 봄에 내려진 네 번째 칙령은 전 제국에 걸쳐 엄격 한 제헌을 강요했고,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요구하 였다. 이 박해는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us I , 306~337) 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 가 통치하던 갈리아와 영국 지방을 제외한 모든 제국에 서 가장 철저하고 잔인하게 진행되었다. 이 박해는 305 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퇴임 뒤에도 계속 이어졌 다.
콘스탄틴 대제가 312년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 하고, 다음해 2월에 동로마 제국 황제인 리치니우스 (Licinius, 311~324)와 밀라노에서 만나, 그리스도교에 제 국의 다른 종교와 같이 전반적인 관용을 부여한다는 칙
령을 제정 · 반포함으로써 교회의 자유가 시작되었다. 그 러나 321년경부터 리치니우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 해를 시작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 거나 처형함으로써 박해가 재현되었다. 그러던 중 324 년 콘스탄틴 대제가 리치니우스 황제에게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교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었다.
〔박해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숫자〕 로마 시대의 박해에 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아직도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 다. 그 하나는 박해의 법적 근거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박해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 문제이다. 얼마나 희생 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숫자를 언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문서도 남아 있고 비교적 가까운 시 대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에서 희생된 숫자를 가려낼 수 없는 것처럼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엄청난 숫자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고 아주 적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박해 당시의 사람들인 타치투스나 치프리아노 (Cyprianus)나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 등은 박해당한 사람의 수가 아주 많다고 표현하였다. 또 교회사가인 에 우세비오(Eusebius, +339)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박해 를 서술하면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참수형이나 화형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사형 집행인이 힘이 빠져 교대하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또 판결이 내려지는 동안에 다른 사 람들이 법정에 끌려 오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런 사실들 로 볼 때 그 숫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많다는 의미도 당시 인구에 대한 상대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숫 자를 가능하기는 어렵다.
17세기까지는 '수백만'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1684년경 영국 성공회의 도웰은 처음으로 희생자수가 적다고 언급하였고, 그 뒤에 이 적은 숫자로 말하는 사람 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가장 적게 말하는 숫자는 1 만 명 미만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숫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칼을 언제 내 려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았던 그 당시 사람들 모두가 다 순교자의 숫 자에 들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교회사 ; 로마 제국 ; 밀라노 관 용령)
※ 참고문헌 V. Monachino, Le persecuziomi nell'Impero Romano e la Polemica Pagano- cristiana, Roma, 1980/ J. Daniélou · H. Marrou, Nuova storia della Chiesa I , Torino, 1980/ A. Erba . P. Guiducci, Storia della Chiesa, Torino, 1989. 〔具本植〕
II . 한국에서의 박해
한국 천주교회가 받은 박해는 크 게 둘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조선 후기의 박해 이고, 다른 하나는 제2기의 박해라고 할 수 있는 공산 치하에서의 박해이 다. 이 두 박해는 모두 순교자를 탄
생시켰고, 그들의 순교 신심이 신앙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영향 정도가 다를 뿐만 아 니라 박해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교회사에서 지니는 의 미 또한 큰 차이가 있다.
〔조선 후기의 박해〕 원인과 배경 : 조선 후기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의 원인과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 재(混在)되어 있으므로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우선 사상적 배경으로는 벽이단(闢異端)의 전통을 들 수 있 다. 공맹 유학의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있는 이 사상은 유교(儒敎) 이외의 종교와 사상을 모두 이단으로 간주하 였고, 따라서 천주교 교리 또한 서양의 사학(邪學)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정학(正學)인 유학을 지 키기 위해서는 사학을 물리쳐야 한다는 반서학(反西學) 이론인 척사론(斥邪論)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척사론 은 천주교가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한 17세기부터 제기 되기 시작하였으며, 1784년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안정복(安鼎福)에 의해 체계화되었고, 그 후 정치 적인 문제와 어우러지면서 척사 운동(斥邪運動)으로 발 전하였다.
실제로 천주교 교리는 조선의 이데올로기인 유교 윤리 와 상충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사회에서는 정교 일치 (政教一致) 사상 아래 국교와 같은 유교조차 국사(國事) 에 종속되어 있었으므로 천주를 만유(萬有) 위에 있는 절대자로 받드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 다. 게다가 예수회 선교사들이 보유론(補儒論)에 입각하 여 설명하는 천주 또한 유교의 상제(上帝)와는 다른 것 으로 비판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천당 지옥설은 불교의 윤회설을 모방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천주 교 교리 중에서도 만민 평등의 이론은 주자학의 분(分) 사상에 입각한 계급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사회 질서의 근본이 되는 사민(四民)의 구분이나 가부장
(家父長)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두 번째로 사회 · 윤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천주교는 조선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었다. 지식인들이나 위정자 들은 우선 천주교의 신앙 공동체를 통화(通貨) · 통색(通 色)의 무리가 우매한 백성들을 유혹하여 만든 것으로 간 주하였으며,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유민(流民) 집단으 로 이해하였다. 특히 1790년 이래 조선 교회가 조상 제 사 금지령을 받아들이게 되면서는 천주교 자체가 충효 (忠孝)의 근본 윤리를 비롯하여 기존의 윤리 질서를 파 괴하는 것으로 널리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천주교 세력은 황건(黃巾) · 백련(白蓮)의 무리와 같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로 배척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로 정치적인 박해의 배경은 붕당(朋黨)과 관련 이 있었다. 특히 초기에는 기호 남인(畿湖南人)의 일부 소장 학자들과 천주교와의 관계가 큰 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남인 안에서도 공서계(攻西系)와 친서계(親西系) 가 구분되었고, 공서계 인물들은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 (僻派)의 인물들과 함께 친서계 인물들이나 이에 동조하 는 시파(時派) 세력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러한 정치적 성향은 1799년에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蔡 濟恭)이 사망하고, 다음해 정조(正祖)가 사망한 뒤에도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후에는 척사 의식이나 자 존 의식과 어우러지면서 박해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네 번째로 외교적 측면에서는 조선 신자들의 활동이 박해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중에서도 먼저 1784 년 이후 교회 밀사들이 북경을 오가면서 서양 선교사들 을 만나거나 천주교 서적을 들여온 사실이 위정자들을 자극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국초 이래로 조선에서는 쇄 국(鎖國)과 사대 교린(事大交隣)을 유일한 외교 정책으 로 삼았고, 따라서 천주교 신자들의 행위는 월경죄(越境 罪)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1789년 이래 북경 선교사들에게 서한을 보내 성직자 파견을 요 청하고, 아울러 이들을 태우고 올 서양 선박을 요청한 사 실이 밝혀지면서 천주교 신자들은 반역자요 서양 오랑캐 의 앞잡이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1801년에 일어난 황사 영(黃嗣永, 알렉산델)의 <백서>(帛書) 사건이 이를 확인 시켜 주었다.
한편 교회 안에서 밀고자나 배교자가 탄생한 것도 박 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그 하나의 배경이 되었 다고 할 수 있다. 또 중국의 예수회와는 달리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선교 위주의 정책을 편 것이 조선의 사회 · 문화와 영합하지 못함으로써 박해의 원인으로 작용하였 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창 립 목적이나 조선의 사회 · 정치 · 문화적 특성을 감안한 다면, 오히려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 방침과 목적에 비 중을 두고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전개 과정 :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는 1791년부터 시 작되어 1879년 드게트(Deguette, 崔東鎮) 신부가 중국으 로 추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은 순교자 의 탄생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실제로는 교회 창설 이듬
해인 1785년에 박해가 시작되어 한불수호통상조약(韓 佛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는 1886년까지 약 1세기 간 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 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공적인 박 해는 물론 지방 관장이나 개인에 의해 야기된 사사로운 박해들을 수없이 겪어야만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1801 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 害),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1866년의 병인박 해(丙寅迫害)를 4대 박해라 부른다.
한국 천주교회가 겪은 최초의 박해는 1785년의 을사 추조 적발(乙巳秋曹摘發) 사건이었다. 일명 명례방(明禮 坊)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박해는 척사론이 비등해지는 가운데서 발생한 것으로, 천주교회의 초기 공동체를 와 해시켰다. 뿐만 아니라 중인 역관 출신인 김범우(金範 禹, 토마스)는 충북 단양(丹陽, 혹은 밀양 단장)으로 유배 되어 배소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만 이때 조정 에서 박해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으며, 김범우와 함께 체 포되었던 남인의 소장 학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 았다.
조정에서 천주교 박해를 지시한 것은 1791년의 신해 박해(辛亥迫害) 때였다. 이 박해의 발단은 1790년 북경 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의 밀사 윤 유일(尹有一, 바오로)을 통해 내린 조상 제사 금지령에 있었다. 이 금지령은 곧 유교의 상례(喪禮)나 주자 가례 (朱子家禮)를 배척한 것으로 충효에 바탕을 둔 유교 윤 리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로 인해 일부 지식인층 이 교회를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산(珍山) 땅에 살 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폐제 분주(廢祭焚主)를 실행하였 고, 이로 인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아울러 천주교 신자로 이름이 있던 몇몇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하였으며, 이것이 서양의 신문화(新文化) 수용 운동에 도 영향을 주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1795년에 중국인 주문모(周文 謨, 야고보)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 앞장섰던 윤유일, 지 황(池璜, 사바),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등이 체포되어 순교하는 을묘박해(乙卯迫害)를 겪게 되었다. 또 1797 년에는 충청도에서 정사박해(丁巳迫害)가 일어나 1799 년까지 여러 명의 순교자들을 탄생시켰고, 1800년에는 경기도 여주와 양근 지역에서도 박해가 일어났다. 그러 는 동안 반서학(反西學) 의식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고, 이것이 정치적인 측면과 어우러지면서 남인 친서계를 정 계에서 축출하려는 공서계와 노론 세력의 척사 운동으로 전개되다가 1800년 6월 정조의 죽음으로 인해 정세가 일변하였다.
정조의 뒤를 이어 나이 어린 순조가 등극하고, 대왕대 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수렴청정을 시작 하면서 노론 벽파의 천주교 박해는 곧 실행에 옮겨졌다. 대왕대비는 1801년 1월 10일(양 2월 22일) 박해령을 내 렸고, 오가 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여 천주교 신자 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체포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먼 저 기호 남인의 거두인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사학의 3흉(三兇)으로 지목되던 이가환(李家煥) , 이승훈 (李承薰, 베드로), 정약용(丁若鏞, 요한) 등을 비롯하여 많은 지도층 신자들이 체포된 후에 참수를 당하거나 유 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남인 세력은 정치적으로 몰 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지도자를 잃은 천주교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신유박해는 3월 12일에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 자수 하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변모하였다. 또 9월 29일에는 제천 땅 배론에 은거해 있던 황사영이 체포됨과 동시에 그가 지니고 있던 <백서>가 발각됨으로써 조정 안팎으로 큰 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주문모 신 부와 황사영을 정치적으로 단죄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백서>의 내용을 구실로 천주교 신자들에게 모반죄를 적 용하고자 하였다. 이후 박해는 1801년 12월 22일(양 1802년 1월 25일) 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지어 대왕대 비의 이름으로 반포한 <토역 반교문>(討逆頒敎文)이 나 오면서 공식적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박해의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약 200명의 순교자를 내게 되었으며, 지도층 신자들을 대부분 잃게 되었다. 이제 천주교 신앙은 주로 하층민들 을 통해 전파되어 갔으며, 신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 여 교우촌을 형성하거나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교우촌은 박해 시기 내 내 교회와 신앙을 지탱해 주는 바탕이 되었다. 또 이후에 는 서양의 신문화를 수용하려는 노력이 완전히 소멸되었 으며, 정치적으로는 노론에 의한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 다. 한편 박해를 끝내기 위해 반포된 <토역 반교문>은 척 사 윤음(斥邪綸音)의 역할을 하면서 박해의 법적인 근거 가 되었다. 그 결과 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박해가 계속되 었는데, 그중에서도 1815년에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된 을해박해(乙亥迫害) 1827년에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정해박해(丁亥迫害)를 손꼽을 수 있다.
물론 1802년부터 1830년대 초까지는 시파인 안동 김 씨(安東金氏)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을 베풀었으므로 큰 박해가 일어나지 않았
다. 그러다가 1836년 무렵부터 우의정 이지연(李止淵) 이 벽파인 풍양 조씨(豊壤趙氏) 세력과 손을 잡고 박해 를 계획하는 한편 안동 김씨 세력을 정치적으로 제거하 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1838년 말부터 박해가 시작되 어 1839년 초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1839년 3월 5일 (양 4월 18일)에는 이지연이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 后)의 재가를 얻어 '사학 토치령' (邪學討治令)을 반포함 으로써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기해박해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자에게 무부무 군(無父無君)의 죄목을 씌웠으며, 신유박해 때와 마찬가 지로 오가 작통의 법을 철저히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천주교회는 다시 한번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우선 그 해 초에 체포되었던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으 며,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 (Mau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체포되 었고, 이들을 영입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한 정하상(丁 夏祥, 바오로),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조신철 (趙信喆, 가롤로) 등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뿐만 아니 라 10월 18일(양 11월 23일) 척사 윤음이 반포될 때까지 박해가 계속되면서 서울은 물론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각 지방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하였 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 체포된 신자수는 적었지 만, 대상 지역은 훨씬 넓었다. 또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 기》에는 단지 78명의 순교 사기만이 수록되어 있으나, 본래 현석문(玄錫文, 가롤로)이 수집 정리한 순교자수는 참수된 신자가 54명, 옥사한 신자가 60명이었다고 한 다. 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신자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 았다. 이후 신자들의 신앙 생활은 현실이나 윤리적 측면 과 유리된 채 교리 실천에 치우치는 복음적인 성향을 띠 게 되었다. 아울러 이 박해로 인해 조선의 국경 감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선교사들의 입국로가 완전히 막히게 되 었다.
그 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입국하게 된 것 은 1845년 9월 12일(양 10월 12일)이었다. 이때 중국의
마카오와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신학 공부를 해오던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최초의 한국인 성직자 로서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Ferréol, 高) 주교, 다 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 등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하 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846년 5월 12일(양 6월 5일)에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면서 다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으 니, 이것이 곧 병오박해이다. 이 박해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현석문,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 등 9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1860년에는 천주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포도 대장 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도록 한 경신박해(庚申迫害) 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두 번째 한국인 성직자 최양업 (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경상남도 남부 지방을 순회하 다가 신자들과 함께 피신하여 박해를 모면하였다. 그러 나 이 박해는 도중에 천주교 신자들의 가산을 약탈하거 나 방화한 것이 문제가 됨으로써 조정의 명령으로 종결 되었고, 체포된 신자들도 석방될 수 있었다. 이처럼 철종 (哲宗) 재임기(1849~1863)와 고종(高宗) 즉위 초까지는 조 정에서 공식적으로 박해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 결과 제4 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 여 여러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게 되었고, 교회가 안정을 찾게 되면서 1850년에는 신자수 11,000 여 명에 공소수 약 185개, 그리고 1865년에는 신자수가 23,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처럼 성장해 가던 한국 교회가 다시 한번 시련을 겪게 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문이었다.
병인박해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우선 박해의 발생 원인이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라는 집권자와 밀접 한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그는 철저한 쇄국주의자였음 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프랑스 세력을 이용하여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격퇴하려는 생각까지 가졌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을 만나기 전에 러시아 함대가 물러가 고, 1866년 초에는 북경으로부터 서양인 학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천주교 박해의 여론이 일어나게 되자 탄압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으로 병인박해는 1866년 한 해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여파가 1870년대까지 계속되 었다는 특징도 지닌다. 왜냐하면 1866년의 병인양요(丙 寅洋擾), 1868년의 덕산(德山) 굴총 사건, 1871년의 신 미양요(辛未洋擾) 등 박해를 가열시키는 사건들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1868년의 사건 즉 독일 상인 옵페르트(Oppert)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흥선 대원 군의 부친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한 사건으로 인해 재연된 박해는 무진박해(戊辰迫害)라고도 불린다. 세 번 째로 병인박해는 어느 박해보다도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행해졌으며, 순교한 신자수만도 1만 명 내외에 이르는 대박해였다는 특징도 가진다.
박해의 시작은 2월 23일(음 1월 9일) 제4대 조선교구 장 베르뇌 주교의 체포로 시작되었다. 이어 대원군이 선 교사들을 만나도록 주선하였던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남종삼(南鍾三, 요한) 등이 체포되고, 3월 11일에는 충 청도에서 활동하던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비 롯하여 여러 선교사들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3월 7일 부터 3월 30일까지 새남터, 서소문, 충남 보령의 갈매못 등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이후 박해는 전국 으로 확산되다가 1869~1870년에 일시적으로 완화되 었으나, 1871년에 재연되었고, 1879년 8월에 드게트 신부 추방 사건으로 포도청에서 3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것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박해로 10여 년 동 안 전국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숫자는 앞에서 설명한 것 과 같이 1만 명 내외에 이르는데, 그중에서 《치명일기》 에 수록된 순교자수는 겨우 877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 로 무명 순교자들이 많다.
결과와 의미 : 이처럼 한국 천주교 회는 약 1세기 간에 걸친 박해로 부 침을 거듭하면서 12,000~13,000 명에 이르는 순교자를 탄생시키게 되 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가 병인박 해 이전의 교세를 회복하게 된 것은 한불조약의 체결로 어느 정도의 신앙 의 자유를 얻고서도 5년여가 지난 뒤 였다. 그렇지만 정부 당국자들과 일 반 민중들이 박해 시대 내내 천주교 회에 대해 가져왔던 반감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일어 난 교회와 일반 사회와의 갈등이 교 안(敎案)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박해는 그 과정 자체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시련이었 고, 그 시련은 교회 성장의 바탕이 되 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 교회 는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라났다' 고 할 정도로 박해를 받으면서 성장
해 왔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복음은 단절되지 않고 꾸준 히 이어져 왔으며, '박해는 복음의 씨앗을 더 널리 퍼뜨 리는 원동력' 이 되었다. 아울러 박해 초기부터 순교 장 면을 목격하면서, 그리고 순교자들의 행적을 마음에 간 직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신자들의 순교 신심은 박해로 인해 더욱 굳건해지게 되었고, 이후 많은 변화를 겪으면 서도 신자들의 신앙 속에 각인되어 오게 되었다. 다시 말 해 한국의 순교 전통과 신자들의 순교 신심은 박해의 결 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었다. 또 전국 각지에 흩어 져 있던 순교 사적지, 오랜 시복 시성 운동을 통해 1984 년에 이루어진 103위 성인 시성식도 박해의 결과로 얻 게 된 신앙의 유산이다.
〔공산 치하의 박해〕 배경과 초기 현황 : 북한의 모든 종교들에 대한 박해는 공산 정권이 그곳 사회를 지배하 면서 이미 예견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종교가 자 신들의 이론에 배치되는 것이고, 신앙 활동은 모두 공산 체제 확립에 해가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 탄압은 처음부터 공산주의를 정당화하거나 체제 유지를 돕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천 주교회는 소련의 반종교 투쟁 운동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공산 체제 형성의 가장 큰 적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북 한 천주교회에서는 공산당이 민족 통일 전선을 내세워 종교인들을 포섭하거나 1946년 11월 28일에 '북조선 기독교도 연맹' 이라는 어용 단체가 구성되었을 때, 아주 냉담한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분명히 거부하 였다. 그 결과 제한 · 탄압 · 말살이라는 3단계의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가 겪은 제2의 박해기였다.
소련군, 중국 공산당, 북한 공산 정권으로 이어지는 시 기에 가장 먼저 박해를 받은 곳은 연길(延吉)과 북한이 었다. 당시의 첫 희생자는 이유 없이 소련군에 의해 납치 되어 1945년 8월 23일에 총살당한 함흥교구 회령(會 寧) 본당의 파렌코프(W. Farrenkopf, 朴偉明) 신부였고, 다음으로는 같은 해 9월 2일 연길교구의 젤너(E. Zellner) 수사가 소련군에게 총살을 당하였다. 이어 연길교구는 1946년 5월부터 중국 공산당의 탄압으로 인해 세 차례 의 청산을 겪어야만 하였으며, 5월 26일에는 루드비히
(S. Ludwig, 柳) 신부가 다시 살해되었다. 그 후 남평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던 연길교구의 서양인 성직자와 수도자 들은 옥사한 4명의 희생자를 제외하고, 브레허(T. Breher, 白化東) 주교를 위시하여 52명 모두가 1949년 12월부 터 1952년 8월에 걸쳐 단계적으로 석방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1948년 9월에 정식으로 '조선 인민 공화국' 이 수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 게 되었는데,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 청산 내 지는 종교 말살에 궁극의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 대상 이 된 사람들은 모두 순교를 각오하거나 적어도 기한을 알 수 없는 고난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가장 먼저 탄압을 받게 된 덕원 면속구와 함흥교구의 경우는 1949년 5월 9일 사우어(B. Sauer, 辛) 주교와 3 명의 신부들이 체포된 이래 6 · 25 전쟁 직전까지 모두 73명이 체포되었다. 이 중에서 초기에 행방 불명된 사람 이 7명, 평양 교화소로 옮겨진 뒤 옥사하거나 피살된 사 람이 9명이었다. 이어 박해는 평양교구와 황해도 교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평양교구에서는 1949년 5월 14일 교구장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주교를 비롯 하여 6 · 25 한국 전쟁 직전까지 모두 14명이 구금되었 는데, 이들은 모두 행방 불명되었다. 또 가장 늦게까지 전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던 황해도 지역에서는 1949 년 5월 20일에 체포된 한윤승(韓允勝, 필립보) 신부를 비롯하여 모두 5명의 한국인 신부들이 행방 불명되었다.
6 · 25 전쟁 전후의 박해 : 북한 공산 정권은 6 · 25 전쟁을 도발하기 전날까지 북한에 남아 있던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색출하여 14명을 체포하였다. 그중에서 강 원도 이천 본당의 김봉식(金鳳植, 바오로) 신부, 겸이포 본당의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 양양 본당의 이광재(李光在, 디모테오) 신부 등은 1950년 10월에 피 살되었으며, 나머지는 행방 불명되었다.
천주교 박해는 공산군의 남침과 함께 남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가장 먼저 희생된 사람은 춘천교구 소 양리 본당 주임으로 있던 콜리어(A. Collier, 高) 신부였 다. 그는 6월 27일 현장에서 피살되었으며, 이어 7월 2 일에는 서울 영등포 본당의 보좌로 있던 이현종(李顯鍾, 야고보) 신부가 공산군에게 피살되었다. 춘천교구에서는
7월 2일부터 춘천 본당의 보좌 캐나반(F. Canavan, 孫) 신부를 비롯하여 퀸란(T. Quinlan, 具) 교구장 등이 체포 되었고, 묵호 본당의 라일러(P. Reiller, 羅) 신부와 삼척 본당의 마긴(Pt. Maginn, 陳) 신부가 7월에 피살되었다. 그리고 서울교구에서는 7월 11일을 전후하여 교황 사절 번(P. Byrne, 方) 주교, 서울 가르멜 수녀원과 인천 살트 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있던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신부와 그의 동생 공베르(J. Gombert, 孔安世) 신부, 서울 교구 당가인 유영근(俞榮根, 요한) 신부 등이 체포되거 나 피살되었다.
1950년 7월 말에서 8월부터는 충청도 서산 본당의 콜 랭(J. Colin, 高) 신부를 비롯하여 외국인 신부 9명과 한 국인 강만수(姜晩秀, 요셉) 신부가 체포된 뒤 대전으로 옮겨져 이 가운데 7명이 9월 23~26일 사이에 피살되었 다. 또 목포에서는 광주교구장 브렌난(P. Brennan, 安) 몬 시놀을 비롯하여 3명의 외국인 신부가 체포되어 훗날 대 전으로 이송되었고, 충청도 지역의 성직자들과 함께 9월 23일 이후에 피살되었다. 뿐만 아니라 9월 17일에는 서 울에서 성신중학교 교장인 이재현(李在現, 요셉) 신부와 백남창(白南昌, 아가비도) 신부, 동성중학교의 정진구 鄭鄭鎮求, 마티아) 신부 등이 체포된 뒤 행방 불명되었다.
이때까지 북한에 남아 비밀리에 전교 활동을 하던 몇 몇 한국인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도 7월 초부터 모두 체포 되거나 피살되었다. 즉 황해도 신계 본당의 이순성(李順 成, 안드레아) 신부가 7월 5일에, 매화동 본당의 이여구 (李汝球, 마티아) 신부가 7월 7일에 행방 불명되었고, 원산의 박(朴) 루시아 수녀는 9월 24일에 체포되어 10 월 8일경에 피살되었다. 그리고 함흥교구의 김상진(金相 振, 토마스) · 양기욱(梁基郁, 플라치도) 신학생도 7월과 8월에 행방 불명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희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공산군들은 전선이 밀리면서 투옥되어 있던 사람들을 살해하였고, 남은 사람들을 북송하기 시 작하였다.
이후 공산군에 의해 자행된 '죽음의 행진' 은 두 갈래 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남한에서 끌려간 성직자 · 수도자 들이 한 갈래였고, 1949년 8월 5일부터 옥사독 수용소 (자강도 別下面의 雙芳里)에서 고난의 생활을 해오던 덕
원 · 함흥교구의 성직자 · 수도자들이 다른 한 갈래였다. 우선 전자 중에서 옥사하거나 학살당한 성직자는 교황 사절 번 주교를 비롯하여 모두 7명이었고, 수도자는 살 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원장인 베아트릭스(M. Beatrix) 수녀를 비롯하여 모두 3명이었다. 다음으로 옥사독 수용 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 중에서는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이 11명, 죽음의 행진 가운데 만포 · 관문리 수용소 에서 죽은 사람이 4명이었다. 이로써 베네딕도 수도회 가족들 중에서는 초기의 희생자 16명을 합쳐 모두 31명 (외국인 25, 한국인 6)이 희생되었다.
죽음의 행진을 강요한 북한 공산군들은 1950년 10월 부터 각처에 수감되어 있던 한국인 성직자 · 수도자들도 살해하기 시작하였는데, 황해도의 서기창(徐起昌, 프란 치스코) 신부, 양덕환(梁德煥, 안드레아) 신부, 전덕표 (全德杓, 안드레아) 신부 등이 이때 피살되었다. 또 샬트 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김 마리안나 수녀와 김 안젤라 수 녀 등도 매화동에서 공산당에 학살되었으며, 영원한 도 움의 성모 수녀회 원장인 장정온(張貞溫, 앙네다) 수녀 와 서(徐) 요셉피나 수녀는 공산군에게 끌려간 뒤 행방 불명되었다.
결과와 의미 : 이처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제 2기의 박해로 희생된 사람들은 지금까지 밝혀진 성직 자 · 수도자만도 90여 명에 달한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희생되었으면서도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들 을 더한다면 순교자수는 훨씬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한편 이 박해 중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은 희생자 들 대부분이 박해의 위험을 알고 있었고, 전쟁으로 인해 공산군의 박해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끝까지 신앙과 교회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훗날 생환된 사람들의 증언에 따 르면, 그들은 죽음의 행진에서나 옥중에서 언제나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시간이 나는 대로 서로를 권 면하며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또 교회를 지키다 가 피살된 순교자들은 공산군의 위협 아래에서도 '내가 천주교 성직자요, 수도자' 라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이들 을 한국 순교자의 반열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바로 이 때 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2기의 순교자들은 조선 후기의 순 교자들처럼 그 신앙 생활이나 순교 행적이 자세히 알려 지고 있지 않다. 그 원인은 먼저 박해 이후 공산 정권에 의해 북한 교회가 말살되어 갔고, 점차 침묵의 교회로 변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음으로 교회 차원에서 전승되는 증언을 채록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겨 놓는 일이 어려웠고, 또 이러한 노력을 게을리 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박해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교회 전체의 차원에서 제2의 순교 사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 교난 ; 군난 ; 그리스도교 박해 ; → 기해박해 ; 병오박해 ; 병인 박해 ; 신유박해 ; 한국 전쟁 ; 침묵의 교회 ; 한국 천주 교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달레 교회사》/ 《기해일기》/ 《치명 일기》/ 《邪學懲義》/ 《捕盜廳謄錄》 《日省錄》 《朝鮮王朝實錄》/ 《承 政院日記》/ 金昌文 · 鄭宰善, 《韓國 가톨릭 어제와 오늘》, 가톨릭 코 리아사, 1963/ 平壤教區史編纂委員會 편, 《天主教平壤教區史》, 분도 출판사, 1981/ 崔奭祐, 《韓國天主教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黃海道天主教會史》, 黃海道天主教會 史刊行事業會 , 1984/ 이정순, 《원산 수녀원사》, 포교 성 베네딕도 수 녀회, 1988/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편, 《은혜의 60년》,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변진 흥, 〈北韓 沈默의 敎會와 共産主義〉, 《교회사 연구》 6집, 한국교회사 연구소, 1988/ 차기진, <6 · 25 사변과 천주교회의 순교자들>, 《사목》 189호(1994. 1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26~35. 〔車基眞〕
박해 〔라〕persecutio 〔영〕persecution
迫害
I . 로마 시대의 박해 · II . 한국에서의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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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처형지로 쓰였던 콜로세움(왼쪽)과 이 원형 극장에서 맹수형이나 화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