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송 본당

盤松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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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부산교구 소속 본당.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2동 290-1 소재. 1972년 12월 24일 동래(東萊)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성가정. 관할 구역은 반송1~3동, 석대동, 양산군 철마면 일대. 〔교세〕 1973년 566명, 1980년 1,322명, 1986년 1,966명, 1990년 2,340명, 1995년 2,943명. 〔역대 신부〕 초대 베니나티(F. Beninati, 林德) 프란치스코(1972. 12~1977. 7), 2대 준노(O. Zunno, 주은노) 미카엘(1977. 7~1983. 10) , 3대 에간(T. Egan, 도명헌) 토마스(1983. 10~1986. 9), 4대 베니나티(1986. 9~1988. 2) 5대 이재만(李在滿) 마르코(1988. 2~1990. 2), 6대 김성남(金成男) 야고보(1990. 2~1991. 2), 7대 임석수(林碩洙) 바오로(1991. 2~1992. 2), 8대 김현철(金賢徵) 그레고리오(1992. 2~1996. 2), 9대 이성균(李成均) 예로니모(1996. 2~현재).
1960년대 초까지도 전통적인 농촌 지역이었던 반송동 일대는, 1968~1970년에 걸쳐 시행된 도시 계획에 따라 범일동과 그 주변 지역의 철거민들이 이주해 오면서 집단 거주 지역이 형성된 이후 이 지역 주민 가운데 20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 1969년에 공소 설립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같은 해 12월 10일 반송 공소가 설립됨과 동시에 관할 동래 본당의 유창호(劉昌鎬, 토마스) 신부가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초기에는 공소 강당을 마련하지 못하여 인근 경로당과 가축 병원, 성심유아원 등을 빌려 이용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으나, 레지오 마리애 '상아 보탑' 쁘레시디움을 결성하는 등 자체적으로 전교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편 1971년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베니나티 신부는 철거민들의 입주가 계속되고 있는 이 지역에 본당을 설립한다면 교세가 크게 확장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교구에 본당 설립을 건의하였다. 그 결과 신자 실태와 현황을 면밀히 검토한 교구의 결정에 따라 1972년 12월 24일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니나티 신부는 10여 평의 주택을 임차하여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사용하고 주일 미사는 성심유아원 강당에서 봉헌하다가, 이듬해 5월 현 본당 소재의 부지 704평을 매입하고 6월에 기공식을 거행하여 10월 7일에 성당을 완공하였다. 당시 주민 대다수는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기 힘든 형편이었으므로, 이 지역 청소년들의 중학교 진학률은 매우 낮았다. 이에 본당에서는 1974년 6월 18일에 대건학교를 개교하여 미진학 청소년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지도하였다. 2대 주임 준노 신부 때인 1979년 2월에는 성당 증축 공사가 이루어졌고, 성가정회와 신우회가 조직되었으며, 레지오 마리애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 후 1983년에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에간 신부는 청소년과 노동 사목에 관심을 기울여 산간 학교를 개설하고 본당 내에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를 창립하였으나, 이후 본당 신부의 잦은 이동으로 인하여 한동안 침체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8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현철 신부는 본당 공동체간의 친목 도모가 가장 시급함을 깨닫고, 1993년 7월 11일에 '사랑의 우편함' 을 설치하여 서신을 통한 사랑 나누기를 전개하였다. 또 최근에 와서는 외교인들이 스스로 성당을 찾아와 주기만을 바라던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 부산교구 ; 동래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부산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教區三十年史》, 천주교 부산교구, 1990. 〔편찬실〕
② 마산교구 소속 본당. 경남 창원시 반림동 10-6 소재. 1981년 1월 26일 용지동(현 가음동)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순교자의 모후. 관할 구역은 반지동, 반림동, 반송동 전역 및 용호동, 사림동 일부 지역. 〔교세〕 1981년 566명, 1986년 3,200명, 1991년 3,424명, 1995년 4,295명. 〔역대 신부〕 김용호(金容鎬) 안셀모(1981. 1~1984. 1), 2대 이은진(李恩鎭) 도미니코(1984. 1~1987.2) 3대 배진구(裴鎭九) 베드로(1987. 2~1989. 9), 4대 강영구(姜榮求) 루치오(1989. 9~1992. 8), 5대 박두환(朴斗煥) 베네딕도(1992. 8~1995. 2), 6대 김용백(金容白) 요한(1995. 2~6), 7대 이한기(李漢琦) 요셉(1995. 6~현재).
〔본당 설립〕 1979년 대도시 인구 분산 정책에 따라 이주민들이 집단 정착함으로써 형성된 반송동 일대는 교통 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상업 지구와도 인접해 있어서 1980년대 초에는 인구가 급증하였다. 이에 용지동 본당의 신은근(申銀根, 바오로) 신부는 1980년 8월 27일 임시 기성회를 결성하였으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부지 매입 과정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이때 마산교구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하이센베르크(M.Heisenberg, 마리아) 자매가 이 소식을 접하고 본국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 교구와 오스트리아 부인회, 그리고 어린이 자선 단체에서 후원금을 보내 왔고, 아울러 용지동 본당에서도 기금 마련에 최선을 다하여 현 성당 부지(230평) 매입은 물론 신축비까지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2월 10일에 성당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고, 이듬해 1월 26일부로 용지동 본당에서 양곡(梁谷) 본당과 함께 반송 본당이 분리 · 설립되었다.
〔성장과 변모〕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김용호 신부는 반송 아파트 한 채를 전세내어 사제관으로 사용하는 한편, 반송 시장 입구에 있는 태권도장을 임시 성당으로 삼아 미사를 봉헌하다가 1981년 9월 26일 연건평 295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여 이곳으로 입주하였으며, 이듬해 3월 10일에는 성모유치원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기계 공업 단지라는 지역적 특성을 살려 노동 사목에 중점을 둔 결과 본당 설립 3년여 만에 신자수는 1,800명에 달하였다. 2대 이은진 신부 재임때인 1984년에는 기존의 바오로회와 성심회를 통합하여 '연령회' 를 새로 조직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하상회, 승훈회, 청년회 등이 발족되었으며, 1985년 8월에는 성당 터 확장과 회의실 증축 등 보수 공사를 단행하였다. 3대 배진구 신부 재임시였던 1989년 6월 23일에 사파동(沙巴洞) 본당을 분리시켜 374세대 913명의 교적을 이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수의 계속적인 증가로 성당이 협소해지자, 4대 주임 강영구 신부는 1990년 2월 성모유치원을 폐원한 후 그 건물을 보좌 신부 사제관과 회합실로 개조하였으며, 1991년 6월 28일에는 명서동(明西洞) 본당을 또다시 분할하였다.
한편 1992년 8월에 5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성령 묵상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지도하였던 박두환 신부가 1995 년 2월 6일 실족사로 사망함에 따라 2월 11일 교구 사무처장인 김용백 신부가 6대 주임을 겸하여 잠시 본당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같은 해 6월 7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한기 신부는 군종 후원회와 에콰도르 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에콰도르 후원회에 본당 신자 300명 이상이 후원할 만큼 많은 관심을 끌었다. 1996년 10월 27일에는 창원 중앙중학교 실내 체육관에서 본당 설립 15주년 기념 행사를 성대히 거행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일치의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마산교구 ; 가음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반송동 교회 편, 《盤松本堂十五年史》, 천주교 마산교구 반송동 교회, 1996. 〔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