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홍 (1911~1989)

康賢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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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구 신우회 창립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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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구 신우회 창립 총회.

평양교구 신부. 세례명은 사도 요한. 평남 평원(平原)에서 태어났다.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를 거쳐 1933년 봄 서울 대신학교 신학 예과(라틴과)를 이수한 후 평양교구장 모리스(John Morris, 睦) 신부의 주선으로 9월에 동경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학교에 유학하였다. 당시는 한국에서 신학생을 외국에 유학 보내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모리스 교구장은 뜻한 바 있어 평양교구 신학생들을 외국으로 유학보냈었다.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학교에서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고 1936년 9월 귀국하여 함경남도 덕원(德源)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한 후 1939년 3월 28일 평양 관후리(館後里)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후 관후리 본당 보좌 신부에 이어 1940년 6월 평남 마산(馬山) 본당의 첫 한국인 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신부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 · 구금되고 서울교구에서 임시로 파견해 준 4명의 신부 등 12명의 한국인 성직자들(洪龍浩 · 洪健恒 · 金必現 · 梁基涉 · 林世彬 · 康賢洪 · 趙仁元 · 吳基先 · 沈載德 · 洪道根 · 康永杰 신부)로 평양교구가 재조직되자, 1942년 2월 평남 강서군 마산 영유 · 숙천까지 사목하게 되어 평원군과 강서군 북부 전역을 관할하였다. 이어 서울교구에서 파견되어 온 심재덕(沈載德) 신부가 영유 본당 신부로 부임하자1943년 3월 21일자로 착좌한 홍용호 주교에 의해 마산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44년 12월 서울교구에서 파견되어 왔던 신부들이 교구 귀속 문제로 복귀하게 되자 평양교구는 대폭적인 인사 이동을 단행하였고 강현홍 신부는 중화(中和)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초 평양시는 모든 생산업체를 지방으로 소개(疏開)하였다.
그때 소개지(疏開地)를 중화 본당으로 지정받은 한 공장의 경영주가 단독으로 강현홍 신부를 찾아와 성당을 비롯한 부
속 건물 일체의 양도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강현홍 신부는 모든 교회 재산이 교구 본부 관리 하에 있으므로 자신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경영주를 물리쳤다. 경영주가 다시 '국민총력연맹' 의 간부 및 고위층 인사, 그리고 일본 헌병까지 앞세우고 와서 중화 본당을 공장 기지화하려는 강권 행사를 감행하여 했으나 끝내 불응하여 화를 면했다.
해방 후 북한 지역이 공산화되고 교회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이 점점 노골화되어 가고 있을 때 중화읍 내 정치 보위부에서는 교회 신자들 중 본당 신부가 가장 신임하는 신자 몇 명을 골라 자기들의 앞잡이가 되어 줄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자 이들 중 몇 명은 본당 신부에게 그러한 사실을 말하고 중화를 떠나 월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중화 본당에는 지방 유지를 비롯한 새로운 입교자들이 해마다 수십 명씩 증가하였 다. 북한 정권의 노골적인 탄압이 막바지에 이른 1949년 8월 14일 교무위원회(敎務委員會, 현 사목위원회)를 소집하여 본당 운영에 관한 제반 문제를 협의하고 있던 강현홍 신부는 문의할 사항이 있다며 찾아온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되어 갔다. 그리고 평양에서 왔다는 보위부원에게 밤새 많은 심문을 받았다. 새벽이 되자 보위부원은 심문받은 내용을 종합해서 써 놓은 조서(調書)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는데 거기에는 강현홍 신부가 말하지 않은 내용도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강현홍 신부는 8 · 15 성모 승천 대축일 행사에 지장이 없도록 협조하여 준다는 조건 하에 조서에 서명한 후 본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더 이상 성무 집행이 계속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피신책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16일 아침 성당으로 찾아온 보위부원들을 피해 청년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사리원(沙里院) 본당에 머물렀다가 9월 5일 남하하였다.
월남 후 서울 중림동(中林洞) 본당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강창훈(康昌勳) · 김경하(金璟河) · 윤원희(尹元熙) 등 평양교구에서 월남한 신자 청년들과 월남 교우들 간의 상부 상조 친목 통일과 교구 복구에 따른 대비책 추진, 신학생 양성을 목적으로 11월 '천주교 평양교구 신우회' (天主敎 平壤教區信友會)를 발족시켰다.
1950년 10월 21일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자 평양교구 소속 장선흥(張善興) 신부와 국방부 정훈국(政訓局) 소속 종군 사제로 평양 입성 제1진에 끼어 평양에 들어갔다. 평양에 입성하자 곧 바로 평양시 인민교화소(人民敎(化所)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와 그밖의 성직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강현홍 신부는 수복 지구를 순회하며 교회의 안전과 신자들을 위로 격려하고 성무를 집행하면서 평양을 비롯한 교구 내 수복 지구에 대한 복구 작업을 서둘렀다. 먼저 관후리 대성당과 그밖의 성당 및 부속 건물 전부를 다시 찾았다. 한창 평양교구 재건을 위한 준비에 분망할 때 미 8군에 소속되어 선발대로 평양에 온 캐롤(George Carrol, 安) 신부가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고, 캐롤 신부에 의해 강현홍 신부는 관후리 주교좌 성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12월 중공군의 뜻밖의 참전으로 국군은 후퇴하였다. 다시 남으로 밀려 내려 온 강현홍 신부는 평양교구 신우회의 지도 신부로 평양교구 출신 신학생들을 유학 보내고 평양교구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다 후배 신부에게 이임하고 1957년 3월 양평(楊平)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60년 3월 14일 서울교구와 평양교구 사이에는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었다. 즉 평양교구 소속 신부 9명(강현홍, 尹恭熙, 張大瀷, 金瑨河, 池學淳, 白敏寬, 鄭義采, 李炳萬, 朴正一)이 남북 통일이 이루어져 이북 본 교구로 돌아갈 때까지 서울교구에서 봉직하도록 된 것이다. 그런데 협정서의 체결 이후 평양교구 소속 신부들이 계속 많이 배출되어 서울교구에 다수가 봉직하였는데 계약대로 이행된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실이 문제점으로 나타나 1962년 1월 10일 이를 해결하기 위한 평양교구 신부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서 강현홍 신부는 평양교구장 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70년 3월 서울대교구장 김수환(金壽煥) 추기경과 평양교구장 서리 캐롤 간의 협의로 평양교구 소속 신부들은 서울대교구로 입적되었다.
양평 본당에 이어 1969년 12월 수원교구 갈전리(葛田里)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1977년 3월 은퇴하였다. 은퇴 후 선종할 때까지 등촌동 성당의 미사를 도와주고예비자들을 위한 교리서 집필에 주력하였다. (→ 마산본당 ; 중화 본당 ; 관후리 본당 ; 양평 본당 ; 천주교 평양교구 신우회 ; 갈전리 본당) 〔 尹善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