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부터 프로테스탄트에 의한 종교 개혁에 대응하여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동시에 교회의 쇄신을 목표로 특정 지역에 한정되어 일어난 운동.
〔시대적 배경과 개념〕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는 서구 대이교(大離敎) 사건(1378~1417)을 종결시켰지만, 두 번째 과업이었던 교회의 쇄신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는 세속 권력의 부당한 간섭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교 회 당국자들의 비복음적인 세속화에서 비롯된 폐단도 이에 못지않았다. 다양한 계층에서 복음과 초기 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회개의 호소가 높았지만 교회 쇄신의 결과는 미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M. Luther, 1483~1546)의 종교 개혁 운동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고, 이 분열을 치유하려는 운동이 1522~1648년 사이에 일어났는데 이러한 가톨릭 개혁을 19세기 초 역사가들은 '반종교 개혁' (Gegen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
'반종교 개혁' 이라는 용어는 1766년 퓌터(Göttingen Pütter, 1725~1807)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이미 받아들인 지역을 가톨릭 교회 신앙으로 회복시킨다는 의미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용어는 19세기 초까지는 독일어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 의미도 처음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지역에서 이에 대항하고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 등 한정된 지역의 제한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었을 뿐, 넓은 의미의 역사적 운동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연 구〕 가톨릭 저자인 케르커(Joseph Kerker)는 프로테스탄트 개혁과의 혼동을 피하고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 1859년에 《가톨릭 개혁》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소위 반종교 개혁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폈고, 리터(Moritz Ritter, 1840~1923)는 1876년에 대학에서는 처음으로 '반종교 개혁' 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반종교 개혁' 이라는 용어는 리터의 저서 《반종교 개혁 시대의 독일사》(Deutsche Geschichte im Zeitalter der Gegenreformation)를 통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이탈리아에서는 중세 말기의 개혁에 대한 시도와 연구가 있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회플러(Constantin von Höfler)는 1878년에 '로마식의 개혁' 이라는 주제로 《라틴 세계와 중세 시대의 개혁적 사상과의 관계》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 저서에서 드러난 그의 개혁 사상은 프로테스탄트 역사가인 마우렌브레허(Wilhelm Maurenbrecher, 1838~1892)의 개념과 비슷하였다. 회플러는 중세 초기 개혁가들의 사상이 15세기 동안 지속되었고, 탁발 수도회와 성인들의 뛰어난 모습에 그 사상들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지적하였으며, 또한 교황 알렉산델 6세(1492~1503)의 개혁을 위한 시도와 이미 진행되고 있던 스페인의 개혁적인 분위기도 언급하였다. 1880년에 마우렌브레허는 《가톨릭 개혁의 역사》(Geschichte der Katholischen Reformation)에서 '가톨릭 개혁' (Reformatio Catholica)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이 반종교 개혁 운동의 뿌리가 프로테스탄트 개혁 시대까지 소급되며, 그중 어떤 요소들은 이미 독일에서 영성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에 추구되었고 프로테스탄트 개혁과 거의 비슷하게 가톨릭 개혁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고타인(Eberhard Gothein, 1853~1923)이 쓴 《이냐시오 로율라의 반종교 개혁》(1895)이라는 책은 반종교 개혁의 종교적이고 영성적인 원인의 이해에 필수적이었는데 그는 이냐시오 로욜라(lgnatius Loyola, 1491~1556)를 스
페인에서 반종교 개혁의 가장 중요한 주역으로 평가하였다.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는 반종교 개혁이 라는 용어로 16~17세기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반작용을 단순하게 의미하였는데, 이 용어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역사가들에 의해서 폭 넓게 받아들여졌다.
〔가톨릭 개혁과 반종교 개혁〕 '가톨릭 개혁' 과 '반종교 개혁' 이라는 이 두 가지 개념은, 기본적으로 가톨릭 신앙으로부터 분열된 프로테스탄트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정의된 '종교 개혁' 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반종교 개혁이라는 용어가 루터의 개혁 전 · 후 시대에 일어난 가톨릭 교회의 제반 쇄신 운동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소위 '반종교 개혁' 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는 쇄신을 열망해 온 수많은 평신도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일부 주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 쇄신을 추진해 왔었기 때문이다. 1497년에 창설된 신애회(神愛會, Oratorio dell'Amore Divino)는 초기 개혁자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예를 들면, 제노바의 가타리나 성녀(St. Catharina, 1447~1510)와 그의 영향을 받은 베르나차(Ettore Vernazza, 1470~1524) 등을 통하여 1515년 로마를 비롯하여 피렌체(Firenze), 루카(Lucca), 비첸차(Vicenza), 나폴리, 그외 다른 지역에도 교회 쇄신 운동을 확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쇄신 운동은 이냐시오 로욜라, 아빌라의 데레사(Therese d'Avila, 1515~1582) 등 수많은 성인들에게까지 이어졌는데 그들의 거룩한 생활과 신비적인 내용의 저서들은 당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톨릭 교회와 투쟁을 일으킨 동기와 연관된 것은 아니었다. 현대에도 그들의 가르침과 거룩한 삶은 가톨릭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
를 차지하고 있다.
가톨릭 운동에서 싹트기 시작한 개혁에 대한 노력은 도덕적인 개혁과 교리적인 분야를 넘어서까지 확대되었다. 따라서 루터는 개혁을 부르짖었던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본 의도와는 달리 간접적으로 가톨릭 개혁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지만, 소위 반종교 개혁 운동으로 표현된 가톨릭 개혁의 기원은 루터와는 별개로 시작되었다. 즉 가톨릭 사가들은 트리엔트 공의회 전후인 16세기에 일어난 교회의 쇄신 운동이 하느님의 힘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종교적인 분열로부터 영향받은 것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가톨릭 개혁만을 참된 개혁으로 보았다. 따라서 반종교 개혁이라는 개념 이면에는 종교 분열에 대한 반항 정도로만 생각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용어의 사용을 꺼리면서 종교 개혁 이전부터 진행된 가톨릭 교회의 쇄신에 종교 개혁이 미친 영향을 과소 평가하려 하였다.
프로테스탄트 학자인 마우렌브레허가 '가톨릭 개혁'이라는 용어의 창안자라면, 가톨릭의 교황사가인 파스토르(Ludwig Freigherr von Pastor, 1854~1928)는 이 용어를 유포한 주역이었다. 파스토르 이후, 특히 가톨릭 학자들은 반종교 개혁이라는 용어 대신 '가톨릭 개혁'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는 경향을 가졌었는데, 이 두 가지 개혁은 서로 연결되어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최근의 연구는 가톨릭 교회의 내외적인 개혁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던 이른바 반종교 개혁과 구분하려는 논리를 부각시켰다(J. Lortz, H. Jedin). 가톨릭 쇄신 운동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전부터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중심이 되어 전체 교회로 점차 확산되었지만, 반종교 개혁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 생겨난 운동으로서 반가톨릭적인 개혁 운동의 확산을 막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히 하며, 정치적으로도 결속을 견고히 할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영향력과 실지(失地) 회복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
러한 면에서 대표적인 나라가 독일이었다.
〔독일의 반종교 개혁〕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의 반가톨릭적인 가르침을 논박하고 가톨릭의 정통적인 교리를 재확인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가담한 사람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되돌리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이러한 노력이 반종교 개혁으로 이해되었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반종교 개혁이라는 용어는 가톨릭 교회에서 수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독일 내에서 가톨릭 교회가 침체되어 있을 때, 1560년부터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프로테스탄트 반대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을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반대 세력과 투쟁으로만 인식하면 안된다. 오히려 이 운동은 가톨릭 내의 개혁 운동과 보조를 맞추어 진행되었다. 교황청은 교황 사절을 통하여 공의회 결의를 이해시키고 실천하도록 촉구하였다. 교황으로부터 특권을 받은 예수회는 과감한 사목 활동으로 영성 생활 지도와 선교 활동, 자선 사업, 청소년 교육, 특히 신학 연구를 장려함으로써 16세기 후반기에 가톨릭의 개혁 노력의 강한 중추가 되었으며, 독일에서는 반종교 개혁과 가톨릭 신앙 복구의 원동력이 되었다. 예수회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타도를 위해 설립되었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독일의 루터파나 라틴계 칼뱅파에 대항한 가장 강력한 중심 세력이 되었다. 남부와 서부 독일에서 종교 개혁이 퇴화되고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간 지역이 가톨릭 교회로 되돌아온 것은 주로 예수회의 노력과 헌신의 덕택이었다. 특히 독일의 제2 사도로 추앙받고 있는 가니시오(Petrus Canisius, 1521~1597)를 비롯하여 예수회의 활동과 그 외의 다른 수도회 활동은 개혁의 전위병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쇄신에 대한 열망과 신선한 힘을 새로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독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 여러 유럽 제국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독일의 가톨릭 제후들도 새롭게 변화되는 가톨릭의 모습에 고무되어 쇄신을 촉진하였고, 자기들의 영지 내에서 가톨릭만을 인정하였다. 영주 중에서는 바이에른의 알프레히트(AIbrecht, 1550~1579) 공작이 1564년에 이를 처음으로 시작하였는데, 그는 프로테스탄트 귀족의 반항을 진압하고 가톨릭 신앙을 북돋우기 위한 순회와 평신도들을 위한 기도 모임을 자주 개최하였고, 도시에서 엄격한 검열을 하였으며, 모든 관리와 교수들에게 '트리엔트 공의회 신앙 고백' 을 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회의 교육 사업을 적극 장려하였다. 가톨릭 평신도 제후들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확산은 정치적 · 종교적 갈등과 투쟁을 야기하였다. 그러나 1555년에 맺은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宗敎和議)는 제국의 가톨릭 제후들에게 자기들의 영토에서 가톨릭 신앙만을 인정하도록 하였다. 합스부르크(Habs-burg) 가의 헝가리 왕도 동유럽에 프로테스탄트가 확산되는 것을 억제하였다.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드 1세(1556~1564)는 교리서 편집을 위해 가니시오를 비롯한 예수회 회원을 초빙하였으며, 분명한 반종교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페르디난드 2세(1619~1637)는 등극할 때부터 제국 전체가 가톨릭 신앙을 전통대로 수호하도록 하였다. 이미 1617년에 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최대한 억제하려 함으로써 '30년 전쟁' (1618~1648)이 일어나 독일을 파멸 상태에 이르게까지 하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Westfalen) 조약으로 정치적인 면에서는 독일 황제의 권위가 크게 타격을 받았고, 종교적인 면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쌍방의 동등권을 갖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므로 이 조약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반종교 개혁과 종교 분쟁의 종결을 가져왔다.
〔의 의〕 반종교 개혁의 성과는 적지 않았는데, 가톨릭 교회는 제도와 조직을 재정비하여 내외적으로 쇄신 운동을 더욱 강화하였고, 사목자들도 교회의 고유한 사명인복음 전파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교 개혁의 확산은 가톨릭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쇄신해 나아갈 수 있는 자극제가 되었지만, 프로테스탄트는 반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더욱 공격적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들의 태도는 다시 가톨릭 신자들에게 예리하게 반영되어 반목과 논쟁으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첨예한 종파적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소위 반종교 개혁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반응이었고, 가톨릭 교회는 이 운동으로 인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체 교회의 쇄신 운동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였던 반종교 개혁 운동의 본질을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옛 것을 완전히 뜯어고치는 '개혁' 보다는 폐단을 덜어내고 새롭게 하는 '가톨릭 쇄신 운동' 으로 칭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 쇄신 운동이 전체 교회에 확산된 전반적인 운동이었다면, 반종교 개혁 운동은 많은 경우 특정 지역의 한정된 분야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 이전과 진행 과정에서,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되었던 가톨릭 쇄신 운동과 반종교 개혁은 기본적으로 이미 교회에 내재된 기본적인 힘과 트리엔트 공의회의 쇄신 운동 및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수도회의 활동 등이 없었더라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가니시오, 베드로 ; 가톨릭 개혁 ; 예수회 ; 종교 개혁)
※ 참고문헌 K. Bihlmeyer · H. Tuechle, Storia della Chiesa, Ⅲ , trad. M. Belllincioni · L. Randelini, Brescia, 1973/ E.M. Burns, The Counter Reformation, Princeton, 1964/ A.G. Dickens, The Counter Reformation, London, 1968/ A. Franzen,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E. Isefloh . H. Jedin, Reformation and Counter Reformation, History of the Church, vol. 5, trans. by A. Biggs · P.W. Becker, New York, 1980/ H. Jedin, Riforma Cattolica, 《EC》 10, pp. 904~907/E.L. Lampe, 《NCE》4, pp. 384~389/ W. Maurenbrecher, Geschichte der Kath. Reformation, 1, Nordingen, 1880/ H. Outram Evennett, The Spirit of the Counter Reforma-tion, London, 1975/L. Willaert, La Restaurazione Cattolica dopo il Concilio di Trento, A. Flich · V. Martin ed., Storia della Chiesa, 18, trad. da C. da Capodimonte · A. da Poggio Cancelli, Torino, 1976. 〔金喜中〕
반종교 개혁 反宗敎改革 〔라〕Contrareformatio 〔영〕Counter Re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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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이냐시오 로욜라는 스페인에서 반종교 개혁의 주역으로 평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