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도파 ― 派 〔라〕Valdesii 〔영〕Walden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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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프랑스에서 리용의 발두스(Petrus Valdus)에 의해 설립된 반성직주의적 이단 운동.
복음적 가난이라는 이상을 내세운 이 운동을 설립한 발두스는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지 않은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그는 1173년경 마태오 복음 10장 5절 이하를 읽으면서 청빈 이상을 발견하였고 그때부터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청빈과 속죄에 대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발두스를 추종했고,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들' (pauperes Christi) 또는 '리용의 가난한 자들' 이라고 자칭하였다. 그러나 리용의 주교는 그들이 평신도이며 당시의 공식 성서인 라틴어 성서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 문제에 언급할 자격이 없다며 그들의 설교를 금지시켰다.
1179년에 발두스는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하여 교회의 인준을 받고자 하였다. 교황 알렉산델 3세(1159~1181)는 발두스의 청빈 서약은 승인하였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성직자가 초청하지 않는 한 강론은 할 수 없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발두스는 교황의 말에 순명하지 않았다. 그는 1179~1180년경에 알바노(AIbano)의 앙리 추기경 앞에서 정통 교리들로 구성된 진술서인 <신앙 고백서>(Profession of Faith)를 작성하였지만, 교회로부터 정식적으로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계속하여 설교하자 리용의 대주교는 그를 단죄하였으며, 교황 루치오 3세(1181~1185)는 베로나(Verona) 교회 회(1184)에서 발표한 칙서 <앗 아볼렌담>(Ad Abolendam)을 통해 발도파 의 활동을 금지시키고 이단으로 규정하여 파문에 처하였다. 또한 이 교회 회의에서는 모직공들이 밀라노 지방에서 형성한 종교 단체 '억겸파' (抑謙派, Humiliati)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교회로부터 파문을 받은 후의 발두스의 삶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와 그의 제자들은 점차적으로 교회로부터 분리 · 이탈하였으며, 교회의 훈령과 재가를 무시하고 나름대로 성직자들을 임명하였을뿐만 아니라 칠성사 중의 일부와 연옥 교리를 배척하였다. 또 단순한 성서주의, 엄격한 도덕 생활, 교회의 부패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펴면서, 자신들의 설교의 권리와 의무를 고집하였는데, 이것은 즈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완전한 청빈에서 생활하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설교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1207년에 란게독(Languedoc)에서 모임을 가진 일부 발도파는, 후에스카(Huesca)의 두란도(Durandus)와 그의 동료들을 중심으로 가톨릭 교회로 돌아와 공동 생활과 완전한 청빈에 대한 규칙을 승인받고자 하였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1208년 12월에 이들을 받아들였으며, 1212년부터 이들은 '두란도의 가난한 가톨릭들' 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내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발도파는 계속해서 증가하여 남부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독일, 피드몬트(Piedmont), 롬바르디, 스위스,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미디(Midi) 등지로 퍼져 나갔다. 또한 짧은 기간 이나마 피드몬트에서는 종교 자유를 향유하기도 하였다.
종교 재판관이었던 베르나르도 구이(Bernard Gui)에 따르면, 발도파의 교계 제도는 매우 특이하였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주교가 중심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강론과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있고 마지막에는 주교와 사제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부제가 있었다. 모든 교직자들은 존경을 받는다는 의미로 '바르베스' (barbes)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며, 가난한 삶을 살았고, 유랑 생활을 하였으며, 사적으로 강론을 하고, 신자들의 고백을 들었으며, 보속으로 단식과 주의 기도 등을 주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는 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발도파는 정규적으로 신앙 고백을 하고, 1년에 한 번씩 성찬례를 거행하고, 금식을 하며, 청빈을 가르치긴 하였지만,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거나 교회를 신성시하는 등의 가톨릭 교회의 전례와 교리들을 배척하고, 맹세를 요구한다는 이유에서 국가법을 배척하였다. 또한 그들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자격이 없다고 여겼고, 교회 역시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아가 성가(聖歌)는 미신적인 것이고, 성인들의 축일을 지내고 그들에게 기도하는 것과 대사 교리에 대하여도 비난하였다.
16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발도파는 종교 개혁자들과 접촉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파렐(G. Farel)이 1526년에 발도파 성직자들에게 종교 개혁 신학을 소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532년에 샹포랑(Chanforans)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예정설이 포함된 새로운 신앙 고백문이 채택되었으며, 국가 법정의 권위와 성직자의 독신을 인정하고, 세례와 성찬례만을 인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피드몬트의 발도파는 자신들의 주장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후에도 그들은 박해를 받았지만 비가톨릭 구성원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고 크롬웰(O. Cromwell, 1728~1779)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정치적 · 종교적 자유를 얻게 된 것은, 1848년에 스위스의 시민권을 얻으면서부터였다. 19세기 후반에 발도파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현재 여러 곳에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 발도파는 이탈리아의 토레 펠리체(Torre Pellice)에서 개최되는 총회에서 선출하는 '7인 위원회' 가 운영을 감독하고 있다. 한편 1860년에 피렌체에 세워진 발도파 대학은 1922년에 로마로 이전하였다. (→ 열교 : 종교 개혁)
※ 참고문헌  A.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4판, 1990)/ E.A. Livingstone,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Y. Dossat, 《NCE》 14, pp. 770~771/ A.Mens, 《LThK》 10, pp. 933~935.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