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643 소재. 1958년 1월 29일 김포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
었으며, 주보는 그리스도 왕. 관할 구역은 강화군 전체. 본당 소속 공소로는 강후 공소(하점면 창후리), 고능리 공 소(불은면 고능리), 교동 공소(교동면 대룡리), 내가 공소 (내가면 고천1리), 냉정리 공소(선원면 냉정리), 삼산 공소 (삼산면 석모리), 상방리 공소(화도면 상방리), 오두리 공소 (불은면 오두리), 온수리 공소(길상면 온수리), 장정리 공소
(하정면 장정리), 초지 공소(길상면 초지리), 흥왕리 공소 (화도면 흥왕리) 등 12개소. 〔교 세〕 1958년 236명, 1963 명 1,788명, 1968년 3,004명, 1978년 4,301명, 1983년 5,075명, 1989년 6,062명. 〔역대 신부〕 초대 장금구 그리소스토모(1958. 1~1959. 5), 2대 맥키(Thomas McKee, 모) 토마스(1959. 5~1962. 7), 3대 파터슨 파트리치오(1962. 8~ 1965. 4), 4대 브란스필드 미카엘(1965. 9~1969. 5), 5대 김상용(金相湧) 힐라리오(1969. 5~12), 6대 둔니간 요한 (1969. 12~1970. 5), 7대 황상근(黃相根) 베드로(1972. 1~1973. 6), 8대 룃트게링(Joseph Röttgering, 오명환) 요셉 (1974. 11~1975. 12), 9대 박복남(朴福男) 요셉(1975. 12~1980. 1), 10대 장희영(張喜榮) 시몬(1980. 1~1984. 2), 11대 김영건 베난시오(1984. 2~1987. 2), 12대 이윤하 로베르토(1987. 2~1990. 2), 13대 한의열(韓義烈) 요셉(1990. 2~1991), 임시 직무 대리 한세만(韓世晩) 시몬(1991~1992. 3), 14대 펠리니(Robert Pellini, 방인이) 로베르토(1992. 2~현재).
〔공소 시대〕 박해 시대 이미 강화도에서는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그 후 이곳에 처음으로 신자가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박해가 끝난 뒤인 1871년이었다. 이때 충청도에 거주하던 이 아가다가 이곳 외교인과 혼인한 뒤 강화읍 대산리(일명 돌머리)에 정착한 것이다. 그 집안 후손들은 이후 대산리에 거주하면서 전교를 해왔는데, 1925년 충청도 출신의 안 야고보가 하점면 부근리에 옹기점을 시작하면서 이곳이 공소로 설정되었고, 1933년에는 충청도 서산군 팔봉면에서 이주해 온 신자들이 거주하던 온수리에 또 하나의 공소가 설정되었다. 부근리 · 온수리 공소는 답동 본당 소속으로 그 곳 신부들의 방문을 받아 오다가 1935년 대산리 공소(회장 : 이재명 야고보)가 설립되면서 이에 편입되었다. 이 공소는 해방 이후까지 존속되다가 6 · 25 사변의 발발로 폐지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1952년에는 이재명(야고보)이 북에서 피난해 온 김병태(베드로), 최명선(바오로) 등과 함께 최명선의 집을 공소로 정해 공소 예절을 재개하게 되었다. 이 공소 신자들은 1956년 성당 부지 매입 자금을 확보한 뒤 서울교구 노기남(바오로) 주교의 지원을 얻어 현 성당 부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이 공소는 답동 본당에 속해 있다가 이후에는 1948년에 설립된 김포 본당 신부들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57년 11월에는 본당 신원식(申元植, 루가) 신부에 의해 '강화 공소' 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서울에서 노기남 주교를 위시하여 장금구, 정덕진 신부 등이 공소부지를 둘러보았으며, 그 결과 본당 설립 요건을 인정받
아 1958년 1월 29일 장금구(莊金龜, 그리소스토모) 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임명되었다.
〔본당 설립과 성장〕 본당 설정 당시 신자들은 이재명의 자택을 양도받아 이곳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해 오다가 1960년 성당과 사제관 건립을 시작하여 그 해 8월에 이를 완공하고 10월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중 사제관은 제11대 주임 김영건(金英建, 베난시오) 신부 재임 시인 1986년에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 교육관 겸 사제관(지하 1층, 지상 2층) 건립이 시작되어 제12대 주임 이윤하(李欽夏, 로베르토) 신부 재임시인 1987년 10월에 축성되었다. 이와 함께 신자들은 각 공소 강당 건립에도 노력하여 1961년 6월 오두리 공소 강당을 축성한 이래 1983년까지 모두 13개의 강당을 건립하였는데, 그 중 더리미 강당 외에는 지금까지 존속해 오고 있다. 한편 본당에서는 설립 이래 30여 년을 지내오는 동안 여러 평신도 단체들을 설립하여 신앙의 활성화에 노력해 왔으며, 현재 관할 구역을 12개 직할 구역과 12개 공소 지역으로 편성하여 구역장과 공소 회장을 중심으로 본당 사목을 운영해 오고 있다. 또 하나 본당의 특기 사항으로는 다양한 전교 활동과 대사회 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제3대 주임 파터슨(Patrick Patterson, 파파트리치오) 신부 재임시에는 무의촌의 불편을 덜어 주고자 진료소 설립 허가를 얻고 1965년 3월에 그리스도왕 의원' 을 개설하였으며, 다음으로 제4대 브란스필드 (Michael Bransfield, 전 미카엘) 신부 재임시인 1966년 4월에는 남산리에 그리스도 왕 농장' 을 개설하여 공소와 극빈 가정에 돼지 신품종을 나누어 주었다. 이중 본당의 의료 사업은 그 후 천주의 섭리 수녀회로 이양되었다. 브란스필드 신부 재임기에는 또 경운기, 탈곡기, 양수기 등을 무료 분배하여 농촌 소득에 도움을 주었고, 의료 지원 및 영농 기술 지원에 힘썼으며,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결성하여 근로자들의 정당한 권익 보호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68년 1월에 발생한 '강화도 심도 직물 사건' 은 바로 본당의 노동 청년회가 근로자들을 위해 활동하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었다. 이어 제6대 둔니간(John Dunnigan, 두래건 요한) 신부 재임시에는 강화읍 중심으로 100여 개의 마을 금고를 설립하여 육성하였으며, 무료 진료를 통해 가난한 이웃을 도왔다. 그 결과 브란스필드 신부 재임시에는 750명이 새로 영세 입교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본당에서는 이후 1970년대부터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장려, 교리 학교의 활성화, 신자 재교육과 신심 활동 강화에 노력하게 되었다. 특히 제11대 김영건(베난시오) 신부는 공소 활성화에 주력하여 12개 공소를 다시 3개 구역으로 구분하고 월례 모임을 갖도록 하였으며, 각 대표 공소에 성체를 모시도록 하는 등 현재의 모습을 갖추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 인천교구) 〔車基眞〕
강화 본당
江華本堂
글자 크기
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