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냐노, 알레산드로 Valignano, Alessandro(1538~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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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

예수회 소속 동양 선교사. 인도의 고아(Goa) 관구장. 세례명은 알렉산델. 한자 이름은 범예안(范禮安). 자는 입산(立山). 예수회 선교사 중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1506~1552) 다음으로 동양 선교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 1573년 9월 24일 극동 지역과 동남 아시아 지역을 포함하는 순찰사(巡察使, visitator)로 임명된 이래 1606년 마카오에서 사망할 때까지 이 지역의 전교 사업에 종사하였다.
〔서품과 동양 전교〕 1538년 12월 20일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치(Abruzzi)의 키에티(Chieti)에서 태어나 19세되던 1557년에 파도바(Padova) 대학에서 법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559년에는 소송에 휘말려 1년반 동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그는 교황 비오 4세(1559~1565)의 조카인 알템프스(Altemps)의 시티치(Mark Sittich) 추기경의 회계 감사원으로 일하였는데, 이때 발리냐노는 깊은 영성적인 체험을 하였다. 1566년 5월 29일 예수회에 입회한 발리냐노는 로마 신학원(Collegium Romanum)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70년 3월 25일 성 요한 라테란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서품 직후 약 1년 간 수련장을 역임했는데 이때 수련자인 리치(Matteo Ricci, 1552~1610)를 만났다. 1571년 9월 1일부터는 마체라타(Macerata)에 있는 예수회 신학원의 원장을 맡았으며, 예수회 총장 메르쿠리안(E. Mercurian, 1514~1580)에 의해 1573년 9월 24일에는 고아 관구 소속 동양 순찰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12월 초 로마를 떠나 12월 22일 포르투갈에 도착하였다.
38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1574년 3월 21일 리스본을 출발하여 9월 6일 인도의 중서부 해안에 있는 고아에 도착한 발리냐노가 여기에서 해야 할 임무 가운데 하나는 인도 서남부와 동부의 말라바르 그리스도교(Malabar Christians) 신자들을 로마 교회로 복귀 ·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발리냐노가 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 지역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져 그들을 위한 교육 기관을 인도에 설립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임무를 성공리에 마친 발리냐노는 1577년 9월 중순경 중국을 향해 출발하였으며, 도중에 말라카 지역(지금의 말레이시아)을 순찰하고 이듬해 마카오(Macao)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중국 전교의 방법을 모색한 끝에 1555년, 1568년, 1575년 세 차례에 걸친 중국 전교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적응주의' 노선을 채택하였다. 우선적으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고아 관구장에게 중국 전교를 담당할 선교사를 요청하였으며, 그 결과 1578년에 리스본을 떠나 인도 고아에 와 있던 루지에리(Michel Ruggieri, 1543~1607) 신부가 선발되어 1579년 7월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일본과 중국에서의 활동〕 중국 전교를 루지에리 신부에게 맡긴 발리냐노는 1579년 7월 7일 마카오를 출발하여 7월 25일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가 일본에서 사용한 전교 방법도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지의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선교 방법으로 물의를 빚고 있던 카브랄(F. Cabral) 신부를 출국시키는 한편, 적응주의에 입각한 《일본의 풍습과 기질에 관한 주의와 조언》이란 소책자를 저술 · 간행하였다. 그리고 오오무라(大村純忠) 영주로부터 항구 일부를 위임받아 예수회의 근거지로 만들었으며, 1579~1581년에는 세 차례에 걸쳐 사제 회의를 개최하여 미야코(都), 붕고(豊後), 시모(下) 등 세 개의 전교 구역으로 나누었고, 아리마(有馬)와 안추치(安土)에 소신학교를, 붕고의 후나이(府內)에 대신학교를 설립한 데 이어 1581년에는 일본을 고아 관구로부터 분리하여 준관구(準管區)로 승격시켰다. 이때 일본 준관구의 장상으로는 코엘료(G. Coelho) 신부가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발리냐노는 교황청과 유럽에 일본의 신자를 소개하고, 또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교 문화를 견학시킬 목적에서 1582년 2월 20일 덴쇼오 소년 사절단(天正少年使節團)을 구성하여 로마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마카오에 도착하여 고아에 있던 리치를 중국 선교사로 임명하여 마카오로 오도록 하였으며, 다시 베트남의 남부 지방인 코친(Cochin)을 거쳐 이듬해 5월 23일 고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때 고아 관구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로마로 가지 못하고 1587년까지 인도 고아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1587년 관구장을 사임한 발리냐노는 로마에서 돌아온 일본 사절단과 함께 1588년 4월 13일 고아를 떠나 7월 28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들 일행은 이곳에서 약 2년 간 머물러야만 했는데,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발리냐노는 중국 전교를 위해 노력하여 최초의 중국인 예수회 지원자들을 입회시켰고, 인쇄소를 세우기 위해 포르투갈로부터 인쇄기 1대와 3종류의 활자를 들여왔다. 그런 다음 1590년 7월 21일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하면서 이 인쇄기를 일본으로 가져 가서 교리서와 《나포일사전》(羅葡日辭典) 등을 출간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활판 인쇄의 효시가 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인도의 부왕 사절(副王使節)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 면담한 결과, 일본에서의 천주교 박해를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었다. 1592년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10월 24일 다시 마카오로 돌아온 발리냐노는 일본과 중국의 전교를 위해 어학과 철학,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마카오에 설립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1593년 학교의 일부가 건립되었고, 1594년 11월에는 학교의 규칙이 정해졌다. 이후 마카오 학교는 중국과 일본 전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5년 3월 4일 고아로 돌아온 발리냐노는 9월 말에 동양 순찰사를 사임하고, 극동 지역 즉 일본 · 중국의 순찰사만을 맡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극동 전교에 나서 1597년 8월 마카오로 갔으며, 1598년 7월 14일에 세번째 일본 방문을 위해 그곳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필리핀 총독 사절단의 자격으로 1593년 일본에 입국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공공연한 전교 활동으로 물의를 일으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7년에 박해령을 내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프란치스코회 수사 등 26명이 나가사키의 니시사카(西坂) 언덕에서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598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발리냐노는 1603년 1월 15일까지 약 4년 6개월을 일본에 머무르면서 전교 단체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꾸준히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관심을 두었다. 이미 그가 첫 번째 일본 입국시에 설립하였던 학교와 훗날의 마카오 학교도 이러한 목적을 반영한 것이었다. 1603년 2월 10일 마카오로 돌아온 발리냐노는, 1604년 4월 10일 예수회 총장에게 순찰사를 사임하고 중국 내륙으로의 여행을 계획하였으나 1606년 1월 20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에 그는 '동양의 천사' 라고 불렸다.
〔전교 방침과 업적〕 발리냐노의 선교 방침은 철저한 '적응주의' (適應主義, accommodatio) 노선에 입각한 것 이었다. 선교 단체들이 그 나라의 사회 구조에 적응하였을 때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그 지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게 함으로써 그에 맞는 전교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교 방침은 그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활동한 리치나 인도의 노빌리(R. de Nobili, 1577~1656)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와 함께 발리냐노가 중시했던 것은 마카오와 일본에 신학교를 설립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지인 성직자 양성이었다. 또 그는 사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고아에 있는 성 바오로 대학에 연구회를 조직하였으며, 1582~1590년에는 유럽에서 일본 외교를 위한 최초의 선교 단체를 조직하였고, 전교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3)로부터 '교황청 일본 재원' (Japan-Revenue)을 승인받았으며, 마카오 · 일본의 실크 무역에 예수회가 간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발리냐노는 일본의 전교 활동을 촉진시켰고, 중국 전교의 기초를 닦았다.
현재 알려진 그의 저서로는 일본 순찰의 보고서인 《일본제사요록》(日本諸事要錄)과 그 보유(補遺)가 있으며, <일본 교황청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에 대하여>(De Mis-sione legatorum Japonensium Curiam, Macao, 1590), <일본인과 인도 국가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한 해설>(Commentarii ad Japonios, et ad caeteras Indiae nationes christianae fidei mysteriis imbuendas), 《1580 ~ 1599년간 일본과 중국
상황에 대한 서한》(Litterae de statu Japoniae et Chinae ab anno 1580 ad ann. 1599) 외에도 《나포일사전》(羅葡日辭典), 《일본의 풍습과 기질에 관한 주의와 조언》, 《그리스도교 신앙의 교리서》(Catechismus christianae fidei, Olysophone, 1586)등이 있다. (→ 예수회 ; 일본 천주교회사)
※ 참고문헌  J.F. Schütte, 《NCE》 14, p. 522/ J. Wicki, 《LThK》 8, pp.605~606/ L. Pfister, Notices biographigues et bibliographiques sur les Jésuites de L'ancienne mission de Chine 1552~1773, Changhai, Imprimerie de la Mission Catholique, 1932, pp. 13~14/ 《가톨릭 사전》/ Léon Pagés, 吉田小五郎 역, 《日本切支丹宗門史》, 東京 : 岩波書店, 1939/ 《力 卜 リ ツ ク 大辭典》 1, 東京 : 上智 大學出版部, 1954, PP. 248~256/ A.Valigniano, 松田毅一 監 역, 《日本巡察記》, 1973/ ル イ ス · フ ロ 亻 ス, 柳谷武夫 역, 《日本史》 5(# リ シ タ ソ傳來のこ 3), 東京 : 平凡社, 1978/ 助野健太郎 《キ リ ス 卜敎人名辭典》, 東京 : 日本基督教團出版局, 1986, p. 158.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