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사르, 한스 우르스 폰 Balthasar, Hans Urs von(1905 ~ 1988)

글자 크기
5
발타사르 신부.

발타사르 신부.

신부. 현대 스위스의 대표적인 문학자. 철학자. 신학자. 스위스 루체른(Luzern)에서 1905년에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고향에서 김나지움(Gym-nasium)을 마치고 빈, 베를린, 취리히 대학 등에서 독문학을 전공하였다. 이어서 그는 1928년에 <현대 독일 문학 속에 나타난 종말론적 사상의 역사>라는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학위를 취득한 직후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며, 그 후 독일 풀라흐(Pullach bei München)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프르치바라(E. Przywara, 1889~1972)와, 프랑스 푸르비에르(Fourvière bei Lyon)에서 신학을 전공하면서는 뤼박(Henri de Lubac, 1896~1991)과 친분을 나누었다. 1936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939년에 스위스 바젤의 대학생 지도 신부가 되었는데, 이때 그는 독일 고전의 출판과 프랑스 가톨릭 작가들(P. Claudel, C. Péguy, G. Bernanos, F. Mauriac 등)의 작품을 주로 번역하였다. 1941년에는 '대학생 연수회' 를 결성하고 당대의 명사들을 초빙하여 강연하도록 주선하기도 하였다.
당시 바젤 대학에는 바르트(K. Barth, 1886~1968)가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때 그는 바르트와의 대화 또는 대결을 통해 "그리스도론 중심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이 기간 중에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스페이어(Adrienne von Speyer, 1902~1967)와의 만남이다. 스페이어와의 대화를 통해서 '세상 안으로 파견된 교회상' 을 배운 발타사르는 이러한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그녀와 함께 1945년에 재속 수도회인 '요한 공동체' (Johannes-gemeinschaft)를 창설하였으며, 1947년에는 이 공동체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요한 출판사' (Johannes Verlag)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요한 공동체' 를 계속 돌보기 위해 1950년에 예수회를 탈퇴하였다.
그 후 그는 독일 전역을 순회하면서 강연하고 피정을 지도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현대인과 신의 문제》(Die Gottesfrage des heutigen Menschen, 1955)를 출간하였다. 또한, 1950년에 출간하였던 《역사 신학》(Theologie der Geschichte)을 보완 증보하여 1963년에 《단편 속에 있는 전체》(Das Ganze im Fragmente, Aspekte der Geschichts-theologie)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1958년 이후 그는 자신의 주저인 전 15권의 '삼부작' 즉 제1부 《밝은 빛을 발하는 하느님의 광채》(Herrlichkeit, 7권, 1961~1969), 제2부 《신의 드라마》(Theodramatik, 5권, 1973~1983), 제3부《신-학》(神-學, Theo-logik, 3권, 1985~1987) 그리고 끝으로 《후기》(Epilog, 1987)를 저술 출간하였다. 이러한 '삼부작' 의 내용은 1963년에 출간된 《믿을 만한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Glaubhaft ist nur Liebe) 속에 이미 암시되어있었다.
발타사르의 저서들로는 단행본 85권을 비롯하여 500편이 넘는 논문, 그리고 거의 100권에 달하는 번역서가있다. "내가 출간하고자 했던 것은 모두 남김없이 출간하였다"고 했던 그는 1988년 6월 26일 로마에서 추기경으로 서임되기 이틀 전에 사망하였다. 그의 책상 위에는 그 해 성탄절 선물로 친구들에게 주려고 작성한 <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Wenn ihr nicht werdet wie dieses Kind)이라는 원고가 놓여 있었다.
〔사상적 배경〕 발타사르의 철학적 · 신학적 사상은 그의 생애 중에 이룬 몇 사람과의 '만남' 을 통해서 형성되 었다고 할 수 있다.
프르치바라와의 만남 : 발타사르는 프르치바라를 통해 현대의 중반기를 지배하고 있던 신(新)스콜라 학파의 '이층 구조적(二層構造的)인 세계관' 을 극복할 수 있었다. 당시의 신스콜라 학파에 의하면, 그 자체로 독립되어있는 하나의 '순수한 자연' (natura pura)이 있고, 그것은 그 고유한 '자연적 목표' 를 가진다. 그리고 여기에 '은총' 과 그 '초자연적 목표' 가 하나의 '부가물' (附加物, Beigabe)로 주어진다고 하였다. 이런 주장은 은총의 무상성(無償性)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으로, 결국 인간 본성에 주어져 있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갈망' 은 하나의 부가물로 전락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초월적인 것'에 대한 요청은 '초월 신학' (超越神學, Transzendental-theologie)을 태동시켰다. 이 신학은 벨기에의 예수회 철학자 마레샬(Joseph Maréchal, 1878~1944)에게서 시작되어 독일의 신학자 라너(Karl Rahner, 1904~1984)로 이어졌는데, 이 노선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精神, Geist)은 존재(存在, Sein)에로 개방되어 있으며, 결국 존재의 무한하고 초월적 지평인 신을 향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프르치바라는 '존재의 유비(類比)' (analogiaentis) 이론을 연구하였고, 발타사르는 그의 이러한 노선을 이어받아 전개 · 발전시켰다. 우선 프르치바라는 초월신학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그 주장에는 신의 초월성이 인간의 본성에 함몰되어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신의 자기 계시가 결국 인간의 정신에 속해 있는 것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프르치바라는 출발점을 인간의 주체성, 즉 정신의 자기 실현에 두지 않고, 세계의 대상성(對象性) 즉 현실에 두었다. 그리고 거기서 신과 세계가 얻어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자리를 찾으려 하였다. 프르치바라에 의하면, 대상적인 현실은 이중의 극(極)을 갖는다. 그것은 '있다' (存在, das Dasein)와 '이다' (本質, das Sosein)의 긴장 관계로 드러나며, 다른 한편 그것은 '피조자' (被造者, der Geschöpf)와 '창조자' (創造者, der Schöpfer)의 긴장 관계로 드러난다. 이러한 긴장 관계를 프르치바라는 '존재의 유비' 라는 이론으로 해결하려 하였던 것이다.
프르치바라에 의하면, 사물들은 근본적으로 유비적(analogisch)이다. 즉 그들은 신의 존재를 '닮았다' , 그리고 동시에 '닮지 않았다' . 그리고 '닮았다' 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지금 '있다' 는 점에서이다. '닮지 않았다' 는 것은 그것이 지금 실제로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실제로 '있다' 는 것은 전적으로 신에 의해서 그 존재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비는 한편으로 '닮았다' 는 점 때문에 사물의 긍정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물은 무조건적으로 긍정되어야 하고, 또한 사랑받아야 한다. 다른 한편, 유비는 그 '닮지 않았다' 는 점 때문에, 사물의 부정성(不定性)에 근거한다. 그래서 사물은 필연적으로 자기를 '넘어서서' '보다 큰 것' 그리고 '보다 높은 것'으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초월적인 신의 존재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유비가 가진 양면성은 동격적인 것이 아니다. 창조자에 대한 피조자의 비유사성(非類似性)은 그 유사성에 비하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다. 결국 '유비의 원리' (Analogieprinzip)는 신과 세계 사이에 있는 모든 가능한 동일성(同一性)을, 또한 그때마다 뛰어넘는 상이성(相異性)을 말해 주고 있다. 피조자의 움직임〔運動〕은 끊임없이 '그때마다 보다 더 큰 신' (Deus semper major)에게로 향해 움직여 나아가야 한다. 결국 프르치바라에 의하면, '유비' 란 모든 인식을 넘어서서 인식 불가능한 신을 향한 인간을 이끌어 들이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르치바라는 말년에 점점 더 유비의 비동일성(非同一性)을 강조한 나머지, 모든 동일성을 사라지게 하였다. 그에 비해 발타사르는 유비의 동일성을 유지해나갔다. 즉 피조자가 가진 무조건적 긍정성을 굳게 견지해 나갔던 것인데, 바로 여기서 그들의 사상은 달라졌다. 발타사르에 의하면, 세계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는 '창조' 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세계는 창조를 통해서 그 고유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함으로써 무조건적인 긍정성 하나는 결코 잃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유일회성(唯一回性)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적인 것은 잠정적인 것이며,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고 건너 뛸 수 없는 한계를 갖는다.
바르트와의 만남 : 바르트는 '존재의 유비' 개념을 '반(反)그리스도의 발명품' 으로 여겼다. 그러나 발타사르에게는 프르치바라가 말하는 존재의 유비가 그리스도교 신학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즉 신과 세계는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동일 철학' (同一哲學)과, 신과 세계는 전적으로 철저하게 서로 대립되어 있다는 '절대적 변증법' (絶對的 辨證法) 사이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을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바르트가 존재의 유비를 거부한 이유는 그것이 '존재' 라고하는 추상적인 일반 개념에 하느님과 세계를 동일하게 종속시킨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을 출발점으로 하여 하느님께 이를 수 있고, 하느님을 출발점으로 하여 인간에게 이를 수도 있다고 보았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만이 비로소 이루어질 뿐이다. 그는 이것을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라고 하였다.
발타사르는 바르트의 이러한 '절대적 변증법' (《로마서주해》, 2판, 1922)에 반대하여, '창조' 를 통해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고 그 때문에 결코 파괴될 수 없는 하나의 공동성(共同性)이 마련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최소한의 공동성을 전제할 때, 신에 대한 인간의 배반이라고 하는 '죄' 가 비로소 가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구원 행위' 역시 '신의 창조 행위' 를 전제해야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바르트에 대한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발타사르는 바르트로부터 그리스도론 중심의 신학' (Christozentrik)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뤼박과의 만남 : 발타사르는 뤼박에게서 '신학적 고향' 을 발견하였다. 뤼박은 하나의 신학적 체계보다는, 풍부한 그리스도교 유산을 작업해 내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뤼박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신학에 자신감을 가지고 확고히 작업해 나갈 수 있었다.
스페이어와의 만남 : 스페이어의 영성은, 첫째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상으로, 세상 안으로 파견되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서야 하고···세상의 한가운데서 복음 삼덕을 글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에게 파견되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스페이어의 영성은 발타사르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신학 사상〕 이러한 만남들을 통해서 발타사르는 자신의 '신학 사상' 을 전개시켰고, '삼부작' 을 통해 이를 표현하였다. 그는, 신의 사랑은 그 자체로는 볼 수 없는 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보여 준 것이라 하였다. 즉 신의 사랑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하나의 '모습' (Gestalt)을 취한 것이다. 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죄인이 되어, 세상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는다' 는 사실 그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옥에 내려간다' 는 사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을 '구한다' 는 사실 속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신의 사랑이 그 자신을 보여 주는 이러한 '모습' 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찬란히 빛나는 광채'(Herrlichkeit)이며 우리 인간을 사로잡고 넋을 잃게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모습' 은 하나의 고정되어있는 형상이 아니라, 하나의 '진행되는 사건' 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로 향한,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벌이는 사건(Geschehen)이다. 신은 인간의 역사적 세계라고 하는 무대에서 놀이를 벌인다. 그리고 인간은 그 놀이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서 그 놀이를 함께 벌인다. 그리하여 인간의 놀이는 바로 신의 놀이가 된다. 그래서 이 놀이를 '신의 놀이' (Theodramatik)라고 부른다.
신이 인간과 더불어 벌이는 이러한 '신의 놀이' 는 하나의 '진리' 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사고와 사실(事實)의 일치' (adaequatio intellectus et rei)라고 하는 차원의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신이 인간과 더불어, 그리고 인간이 신과 더불어 벌이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벌어지는 사건' 으로서의 진리이다. 발타사르는 이것을 '신-논리학' (神-論理學) 또는 '신-학'(神-學, Theo-logik)라고 칭하였다. (→ 신학사)

※ 참고문헌  M. Kehl · W. Löser Hgg., In der Fülle des Glaubens, Hans Urs von Balthasar-Lesebuch, Basel · Freiburg · Wien, 1980/ M.Lochbrunner, Analogia Caritatis, Darstellung und Deutung der Theologie Hans Urs von Balthasars, Freiburg · Basel · Wien, 1981/ K. Kossi · J. Tossu, Streben nach Vollendung, Zur Pneumatologie im Werk Hans Urs von Balthasars, Freiburg · Basel . Wein, 1983/K. Lehmann · W. Kasper Hgg., Hans Urs von Balthasar, Gestalt und Werk, Köln, 1989/ E.J. Bauer, Hans Urs von Balthasar(1905~1988), Sein philosophisches Werk, Christliche Philosophie im katholischen Denken des 19. und 20. Jahrhunderts, hrsg. von E. Coreth · W.M. Neidl · G. Pfligersdorffer, Bd. 3, Graz · Wien · Köln, 1990/P. Henrici, 《LThK》 1,pp. 1375~1378. 〔鄭達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