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통하여 참된 신앙을 받아들인 자가 그 신앙의 진리를 포기하고 신앙 생활을 저버리는 행위. 배교는 불신앙(不信仰, infidelitas), 이단(異端, haeresis), 이교(離敎, schisma) 등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장 거스르는 죄들에 속하며, 항상 중죄(重罪)로 여겨져 왔다. 이 용어는 종교를 버린 자의 관점이 아니라 그가 버린 종교의 관점에서 사용되므로, 같은 종교를 갖고 있으나 믿음의 형태를 달리하고 있는 '이단자' 들은 '배교자' 들로 간주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배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는 것' (apostasia a fide)을 의미하며(교회법 751조), 교회법적인 관점에서는 '성직 신분(clerical state)을 비합법적으로 저버리는 것' (apostasia ab ordine) 혹은 '종신 서원(終身誓願, perpetual vow)을 비합법적으로 포기하고 수도회에서 떠나는 것' (apostasia a religione, 참조 : 구교회법 644조)도 여기에 포함된다.
〔개념의 발전〕 라틴어 '아포스타시아' (apostasia)는 '반역' , '동맹에서의 탈퇴' 를 뜻하는 성서 그리스어(Koine)인 '아포스타시아' (ἀποστασία)를 음역한 것이다. '아포스타시아' 는 70인역 성서에서 '야훼께 대한 반역' , '신앙의 포기' 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여호 22, 22 ; 2역대 29, 19 ; 예레 2, 19 : 1마카 2, 15), 이사야 예언서 30장 1절에서는 배교하는 사람을 '아포스타타' (ἀποστασία)로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모세 율법의 배척' (사도 21, 21),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하느님을 배반하는 행위' (2데살 2, 3)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말을 사용하였다. 후에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 160~223)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포기' 라는 명백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그는 유대인들을 '배교의 자식들' (apostatae filii)이라고 불렀다(De Pudicitia, 8). 이 용어를 테르툴리아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배교를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고 다른 종교, 특히 이교를 따르는 행위' 라는 뜻으로 정착시킨 사람은 치프리아노(Cyprianus, ?~258)이다.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는 '인간의 타락' (Fall of Man)을 '첫 사람의 배교' (apostasia primi hominis)라고 불렀는데(C. Jul. lib. 3), 그가 이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원죄에 물듦이 없이 하느님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었던 원조들의 절대적인 자유가 그 행위로 인해 자발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배교자' (apostata)라는 명칭은, 온갖 수단을 다하여 교회를 박해하였던 로마 제국의 황제 율리아누스(Julianus, 361~363)에게 붙여지면서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De civitate Dei, V, 21). 중세에 와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수도 생활 혹은 성직 생활을 포기하는 것' 도 배교라는 개념에 첨가시켜 설명하였다. 배교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과 일치하면서 존재하는 하느님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것, 하느님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즉 "배교는 '신앙을 버리는 것' , '하느님의 계명을 거부하는 것' , '수도 서원이나 성직 신분에 뒤따르는 직무를 포기하는 것' 을 말한다" (Sth., II-II, q.12, a. 1). 토마스 아퀴나스는 "배교는 모든 죄의 근본으로 보여진다"(apostasia videtur omnis peccati principium)라고도 하였다.
〔성서적 고찰〕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인 배교는 많이 볼 수 있지만, 개인이 이스라엘의 종교를 버린 예는 드물게 나타난다. '야훼께 대한 신앙을 버리는 것' 은 특히 '우상 숭배' 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의 반복되는 죄였으므로, 그들은 이교의 신들로부터 벗어나기를 항상 되풀이하면서 야훼 하느님을 섬겼다(여호 24, 14-23 : 예레 2, 2-5). 실제로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십계명에서 배웠지만(출애 20, 3-5 ; 신명5, 7-9),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출애 32장 ; 1열왕 12, 28)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고, 동시에 예언자들로부터 통렬한 비난을 받았다(호세 8, 5 ; 13, 2). 신명기 법전에서는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꾀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매우 엄하게 규정하고 있다(신명 13, 7-12).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야훼께 대한 배신은, 아합과 엘리야 시대에 크게 일어났던 배교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야훼와 이방신을 함께 숭배하거나 또는 가나안 신들을 숭배하는 의식과 유사한 방법으로 야훼를 섬기려고 하는 시도 속에서 발견된다. 에제키엘서에서는 야훼의 성전에서 우상을 몰래 숭배한 예를 설명하고 있다(에제 8, 5 이하). 예언자들이 우상 숭배에 대한 벌로서 내린 경고가 바빌론으로의 유배라는 형태로 실현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하느님과 자신을 올바로 찾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상 승배자나 하느님을 부정하는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판관 2, 11-15 ; 10, 6-13 ; 1사무 12, 10 ; 1열왕 14, 22-24 ; 2역대 28, 1-4). 그러나 마카베오 시대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기원전 175~164)가 극심하게 박해를 하는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와 순교 중 양자 택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2마카 6, 18-7, 42 ; 4, 13-15).
신약성서에서도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에서 배교를 한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묵시 13, 14 ; 16, 2). 그런데 많은 경우에 개종자들의 타락은 엄격히 말해서 배교가 아니라 유대교적인 요소가 있는 그리스도교로 빠지는 것이었으며(히브 10장), 그들 중 일부가 우상 숭배자가 되어 배교자가 된 데 대해서는 다만 그러한 시사(示唆)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일단 우상 숭배를 버리고 참된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 하더라도, 일상 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이교적인 풍속과 습관에 다시 떨어질 위험에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었다(1고린 10, 25-30). 즉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공경을 일단 멈추기만하면 즉시 여러 가지 피조물들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 위험한 상황에서 생활하였던 것이다. 돈(마태 6, 24), 술(디도 2, 3) 탐욕(골로 3, 5 ; 에페 5, 5), 정치적 권력(묵시 13, 8), 쾌락, 질투, 증오(로마 6, 19 ; 디도 3, 3), 죄악(로마 6, 6) 등이 그것이며, 순전히 겉치레뿐인 율법 준수(갈라 4, 8-9)도 여기에 속한다. 따라서 사도들은 우상 숭배 등에 빠져 하느님을 저버리는 배교자들에 대해 경고를 계속하였다(1고린 10, 14 ; 2고린 6, 16 ; 갈라 5, 19-21 ; 디도 3, 10 ; 1디모 1, 20 ; 유다 1, 23 ; 1요한 5, 21 ; 묵시 21, 8 ; 22, 15).
〔교회사적 고찰〕 초대 교회에는, 바르 코크바 반란(Bar Kokhba Revolt, 132~135년에 바르 코크바의 주도하에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반로마 운동)이 끝날 무렵까지, 정성스럽게 유대교 예식을 행하거나 이교 성전에 바쳐진 음식을 먹는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갈라 2. 11-14 ; 1고린 8-10). 이러한 행위들은 처음에는 엄밀한 의미의 배교는 아니었으나, 정통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적인 요소들이 있는 그리스도교와 그노시스주의(Gnostism) 등과 같은 이단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면서부터 명백한 배교 행위로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로마 제국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은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으며 주저 없이 총독의 요구에 응하기도 하였다. 로마제국의 황제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에게 보낸 비티니아(Bithynia)의 총독 플리니우스(Plinius, 111~113)의 편지는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은 모두 당신의 초상과 신들의 성상(聖像)들을 예배하였으며, 그리스도를 저주하였다" (Hi quoque omnes et inaginem tuam deorumque simulacra
venerati sunt et Christo male-dixirunt). 신플라톤 학파(Neo-Platonis school)의 창시자인 암모니우스 삭카스(Ammonius Saccas, 175~242)도 본래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나 배교하였다고 한다(에우세비오, 《교회사》, 6, 19). 배교한 자를 라틴어로는 '랍시' (lapsi)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배교의 죄란 단지 교의적으로 교회를 버리고 떠난 것뿐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이교에 순응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 배교자란 '이교의 신상(神像)에 희생 제물을 바친자' (sacrificati), , '이교의 신상에 분향한 자' (turificati, '희생 제물을 바치지는 않았지만 규정된 제헌 증명서를 뇌물을 주고 사서 관청 목록(libellus)에 등록한 자' (libel-latici)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후에 '성서를 불태운자' (treditores)도 이에 포함되었다.
배교에 대한 초대 교회의 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이 당시 자의적(自意的)인 배교는 살인, 간음과 같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취급되었다. 성 치프리아노 시대에 이르기까지 배교자를 공동체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에 대한 대중적인 존경심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배교의 죄에 대한 엄격한 법 규정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황제의 박해 직후인 306년경에 스페인에서 열렸던 엘비라 교회회의(Council of Elvira, 300~303년 혹은 309년에 개최되었다는 학설도 있음)의 규정(Canon)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고의적으로 희생 제사를 드린 성인(成人)' (1항), '세습적인 유대교 사제직을 맡고 있으면서 그 의무를 수행해 온 신자' (2항), '신자가 살해되도록 정보를 제공한 사람' (68항)들에 대해 병자성사를 주지 못하게 하였다. 또 313년 2월에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관용령을 반포한 후부터는, 배교의 죄가 사회법에 의해서도 처벌받는 범죄로 인정되었다. 《테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us, 439)에는, "이교로 배교를 하는 사람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유산(遺産)을 물려줄 수 있는 권리도 소멸되었으며, 모든 공적인 지위도 박탈당하였다" (De apostatis, XVI, 7)고 되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Codex Justiniani, 527~565)도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배교하도록 유인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그 반면에 박해가 약해지고 결국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교회법의 엄격한 규정은 완화되어, 배교자들은 일정 기간 동안 합당한 회개 생활을 한 후에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게 되 었다. 성 치프리아노와 카르타고 주교회의(Synod of Carthage, 251)는 배교의 죄를 임종 전까지 사해 주도록 원칙을 정하였으며, 이 결정은 교황 고르넬리오(251~253)에 의하여 인준되었다. 이후에 배교자들에 대한 사면 규정은 점차 전체 교회에 확산되어 실행되었다. 314년 갈라디아에서 개최된 안키라 교회 회의(Council ifAncyra)의 규정에는, 정도가 심한 배교자들이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회개 생활을 하면 교회에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규정하
고 있다(9항).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에서는 이런 배교자들을 '참회자' (paenitens)로서 12년 동안 지내게 한 다음, 그 화해의 표시로 성찬식(Commumion rite)에 참여하게 하였다(11항). 더 나아가 397년의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는 사실상 배교자들을 영구히 교회에서 배척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회개하거나 주님께 귀의한 배교자들에게는 은총이나 화해가 거부되어서는 안된다" (Apos-taticis conversis vel reversis ad Dominum gratia vel reconciliatio non negetur) .
중세에 들어오면서부터, 교회법과 사회법은 배교자들(apostates)과 이단자들(hereics)을 분리해서 보기 시작하였다. 또 교황 그레고리오 9세(1227~1241)의 칙령집 제5권 9장에 관한 주석에서는 '교도권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 (apostasia inobedientiae)과 '다시 세례를 받는 행위' (iteratio baptismatis)도 배교 행위로 보았다. 그리고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받아들여서 배교를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는 것' (apostasia a fide, 혹은 apostasia perfidoe) , '성직 신분을 포기하는 것' (apostasia ab ordine, 혹은 apostasia a clericatu), '종신 서원을 포기하는 것' (apostasia a religione, 혹은 apostasia a monachatu)의 세 종류로 분류하였다(De Synodo dicecesana). 중세에는 교회가 거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버리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도 없었으며, 배교와 이단은 극형으로 처벌되었다. 그러나 인문주의와 계몽주의 등 근대 사상과 사조의 영향을 받으면서 배교에 대한 사회법의 처벌 규정은 점차적으로 없어지게 되었고, 교회법 안에서만 존속되었다. 예컨대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배교자에 대한 교회 내에서의 장례 미사를 금지시켰으며, 배교를 혼인 장애의 요인으로 명시하였다. 또 교황 비오 9세(1846~1878)의 교황령 <아포스톨리체 세디스 모데라시오니>(Apos-tolicae Sedis Moderationi, 1869)와 구교회법(2314조 참조)은 배교를 '그 사실 자체로' (ipso facto) 자동 파문되는 중죄라고 하였으며, 배교자의 교회 내의 모든 공직과 권리를 박탈하였다. 구교회법 1240조 1항에 의하면, 배교자는 교회 묘지에 매장될 수 있는 권리도 박탈되었다.
〔윤리 신학적 고찰과 사목적 배려〕 교회는 배교자에 대하여 오랫동안 의심할 여지없이 중죄로 제재를 가해왔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 헤르메스(G. Hermes), 프로샴머(J. Frohshammer), 슈미트(A. Schmid)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자들에 의해 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배교를 객관적인 관점과 주관적인 관점으로 구분해 보면서, "가톨릭 신자는 객관적인 면에서 신앙을 포기할 이유를 가지지 못하지만, 주관적으로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포기할 수 있다" 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바우어(A. Bauer), 셰벤(MJ. Scheeben) , 클로이트겐(J. Kleutgen) 등과 같은 신학자들은, "가톨릭 신자는 주관적으로도 그의 신앙을 포기할 아무런 이유도 가질 수 없다" 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는 이 논쟁에 개입하여, "가톨릭 교회 안에서 신앙을 고백한 신자는 자기 신앙을 바꾸거나 의심할 '정당한 이유' 를 전혀 가질 수 없다" 고 선언하였다 (DS 3014, 3036).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알면서도 이 교회에 들어오기를 거부하거나 끝까지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교회 14항)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배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세례를 통하여 일단 가톨릭 진리를 받아들인 신자가 '신앙을 전부 포기' (교회법 751조)하는 경우에만 물을 수 있는 것이지, 사회적으로 교회와 연관을 맺고 있거나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부과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보호하려는 교도권과 신학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이후에 무신론과 세속주의(seculaism) 등의 영향으로 교회 이탈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현대의 커다란 사회 변혁의 와중에서 전쟁과 자본주의적 사회 모순, 국가주의나 사회주의, 혼인 제도와 산아 제한 방법, 과학 · 기술 · 경제 · 예술 등 현세의 실재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와 시각에 회의를 느끼고 점차적으로 많은 신자들이 떠나고 있다. 또한 현대는 '종교의 자유' 라는 구실 아래 신앙의 중요성이나 계시 진리의 요청을 일종의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이유로 배척하려는 경향도 만연해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이탈 현상을 교회는 더 이상 방관하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으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에서 확고한 신앙의 진리를 보호해야 할 긴급한 과제를 재천명하였다(교회법 823조 1항, 831조 1항).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분열에 대하여 "때로는 양쪽 사람들에게 탓이 있었다고 그 잘못을 인정하면서, 교회의 단일성 안에 나타나는 이런 다양성의 긍정적인 가치를 인정하였다(일치 3~4항). 이러한 선언이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스르는 죄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기도에 열심하고, 신앙의 진리와 가치를 더 깊이 알아야 하며, "외적 활동에 있어서도 교회와의 친교를 항상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교회법 209조 1항). 또 교회 자체도 교리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실천적 정책의 면에서도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충실해야 할 중대한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모범에서 나타나는 사랑을 표징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교회는 반대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그리스도교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자세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 배교자 ; → 순교 ; 이단 ; 이교)
※ 참고문헌 C. Coleman, 《CathEnc》 1/ F.J. Foakes-Jackson, 《ERE》1/ G.B. Guzzetti, 《SM》 1/ B. Häring, Das Gestz Christi. II, Freiburg, Erich Wewel Verlag, 4th ed., 1961/ A. Hollerbachs, Rechtphilosophie und Rechtgeschichte, Freiburg, 1977(최종고 · 박은정 역, 《法哲學과 法史學》, 삼영사, 1984)/ H.G. Kippenberg, 《ER》 1/ ―, 《DTM》/ F.X.Lawlor, 《NCE》 1, p. 679/ K.H. Peschke, Christian Ethics-Moral Theology in the Light of Vatican II, vol. 2 : Special Moral Thelogy, Alcester and Dublin, C. Goodliffe Meale, 4th ed., 1985(김창훈 역, 《그리스도교 윤리학》 2, 분도출판사, 1992)/ 김창수 편역, 《가톨릭 교회사》上, 가톨릭 출판사, 1981/ 정하권, <가톨릭 신앙의 개념>, 《신학 전망》 32호, 1976/ 최창무, <신앙 생활>, 《신학 전망》 32호, 1976/ 최창무, 《윤리 신학》 2, 가톨릭대학 출판부, 1989/ 황적인, 《로마法―西洋法制史》, 박영사, 1985. 〔李太成〕
배교 背敎 〔라〕apostasia 〔영〕apos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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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께 대한 신앙을 저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 미가(구스타브 도레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