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 舟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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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여름의 배론 전경(왼쪽)과 배론 골짜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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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여름의 배론 전경(왼쪽)과 배론 골짜기 입구.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요,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무덤이 있는 천주교회 사적지로, 1801년에 황사영 (黃嗣永, 알렉시오)이 〈백서〉(帛書)를 작성한 곳이었고, 1855년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원주교구 관할 지역인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九鶴里)소재. 배론이란 명칭은 골짜기의 형상이 뱃바닥 같다는데서 부쳐진 이름으로, 본래는 팔송정(八松亭) 도점촌(陶店村)이며, 1890년대 이래 현재의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교우촌 형성과 <백서>〕 배론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이후로, 이들은 주로 옹기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교회측 기록에는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하자,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은 김한빈(金漢彬, 베드로)과 함께 그 해 2월 보름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 예천(醴川)과 강원도를 거쳐 그 달 말에 배론으로 숨어 들게 되었다. 이어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던 황심(黃沁, 토마스)도 배론으로 와서 함께 생활하였다. 이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신자 김귀동(金貴同)이 그들을 받아들였고,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황사영은 이후 토굴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고들은 순교 사적과 김한빈, 황심 등이 전해 주는 박해 사실을 토대로 하여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백서>를 북경에 전달할 책임을 맡은 밀사 옥천희(玉千禧, 요한)가 8월 무렵에 북경에서 돌아오다가 봉황성(鳳凰城) 책문(柵門)에서 체포되었고, 그의 밀고로 9월 15일(양 10월 22일)에는 황심이 체포되었다. 또 9월 29일에는 황사영과 김한빈이 배론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집주인 김귀동도 체포되었다. 그 결과 <백서>는 포졸들에게 압수되었고, 이에 관련된 신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배론 교우촌도 파괴되었다.
〔성 요셉 신학교의 설립〕 그 후 배론에 교우촌이 다시 형성된 것은 1840년대였다. 경기도 수원 출신인 장주기(張周基, 요셉)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1843년에 배론에 정착하게 되었고, 1855년 초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장상 역할을 하던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이곳 교우촌에 '성 요셉 신학교 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가 바로 한국 교회 안에서는 최초로 격식을 갖추어 설립된 신학교였다. 이때 메스트르 신부는 우선 장주기로 하여금 3명의 첫 입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이듬해 3월에 푸르티에(Pourthié, 申)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푸르티에 신부는 1856년 8월 15일에 배론에 도착하였다.
설립 직후 신학교 학생수는 6명으로 늘어났고, 4년 후인 1859년 말에는 다시 7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페낭(Penang) 신학교로 가서 공부하던 3명의 신학생들 중에서 1861년에 1명, 1863년에 2명이 귀국하여 모두 배론 신학교로 편입함으로써 학생수가 10명에 이르렀다가 1명이 환속하여 9명이 되었다. 이에 따라 신학교에서는 1861년부터 기존의 라틴어과와 함께 신학과를 새로 개설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가 휴양을 겸해 라틴어과 교사로 임명되어 다음해 도착하였다. 이어 신학교에서는 1864년 말에 처음으로 서품식을 갖고 2명에게 삭발례와 소품을 주었으며, 장주기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그를 대신하여 이강주(李康柱, 빈천시오)에게 한문 강의를 맡겼다.
한편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사목 방문 도중에 가끔 이곳에 들러 휴식을 취하였고, 푸르티에 신부나 신학생들과 어울려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861년 6월 15일에 사목 방문 결과를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보고하러 가던 중 문경(聞慶)의 한 교우촌에서 장티푸스와 과로로 사망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그곳에 가매장되었다가 11월 초에는 푸르티에 교장 신부의 주관 아래 배론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신학교 폐쇄와 성지 개발〕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해의 여파가 배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1866년 3월 2일이었다. 이날 서울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장주기를 체포한 데이어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였는데, 푸르티에 신부가 포졸들에게 돈을 주자 장주기는 석방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하루 동안 신문을 당한 뒤 군문 효수형을 선고받고 3월 11일(음 1월 25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후 장주기는 다시 체포되어 제천 관아에 투옥되었는데, 여기에서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고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군문 효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던 대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 등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충남 보령군 오천면 永保里)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으며,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됨으로써 배론은 순교자들의 요람지가 되었다.
이처럼 박해로 인해 신학교가 폐쇄되자 신학생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어렵게 설립한 배론 신학교는 그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한편 배론 교우촌은 박해가 끝나면서 재건되어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1942년 12월에는 공소 신자들이 최양업 신부를 추모하기 위해 그 묘비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인해 제막식을 갖지 못하다가 1945년 9월 27일 제천 본당 봉희만(奉喜萬, 안토니오) 신부의 집전으로 묘비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또 원주교구가 설정된 후인 1976년 7월에는 '배론 성지 개발위원회' 가 구성되었고, 1978년에는 양기섭(梁基涉, 베드
로) 신부가 초대 관리소장에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성지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후 배론에는 1979년에 성당과 최양업 신부 회관이, 1981년에는 황사영 순교 현양탑이 차례로 건립되었고, 4대 관리소장 양대석(梁大錫, 알로이시오) 신부 재임시인 1988년 6월에는 신학교와 황사영의 토굴이 복원되었다. (→ 배론성 요셉 신학교 ; <백서> ; 최양업 ; 황사영)
※ 참고문헌  《推案及鞫案》 《邪學懲義》/《달레 교회사》 山口正之, 《黃嗣永帛書の研究》, 大阪 : 全國書房, 1946/ 朱在用, 《배론 聖地》, 가톨릭출판사, 1975/ 崔奭祐, <한국 교회와 한국인 성직자 양성>, 《논문집》 11집, 가톨릭대학교, 1985/ 배은하,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 성바오로출판사, 1992/배티 사적지 편, 《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서한》,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제2집 , 천주교 청주교구, 1997.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