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신부. 세례명은 도미니코. 호는 봄비. 1934년 8월 4일 경남 김해군 녹산면 생곡리 272번지에서 태어나 1953년 서울대학교 농경제학과에 입학한 후 1957년에 졸업하였으며, 그해 동(同) 대학원에 진학하여 1960년에 농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세례를 받은 후에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복음 전파를 사명으로 하는 사제직을 희망하여 1961년에 28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로 가톨릭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1964년 졸업과 동시에 로마에 유학하여 교황청 우르바노(Urbanum) 대학원에서 철학과 신학을 수학하였으며, 1970년 5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 우르바노 대학원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 1973년에는 사목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73년 6월 경기도 여주(驪州)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한 배문한 신부는, 여느 본당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본당 발전과 교세 신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목하였다. 1976년 4월에는 광주 가톨릭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1982년 2월까지 약 6년 동안 강의하였으며,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아 잠시 연구 활동을 중단하고 1982년 3월 12일 경기도 평택의 서정동(西井洞)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직후 관할 문곡리 공소와 당현리 공소를 각각 신설된 송서(松西) 본당으로 이관시키고, 주일학교 건물을 보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늘 신자들과 함께하면서 사도직 단체들을 활성화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이때 본당 신자들과 쌓은 돈독한 정은 그가 1984년 12월 7일 수원 가톨릭대학 제2대 학장으로 전임된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학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교수로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고, 1987년에는 대학원장을, 1992년에는 다시 제4대 학장으로 임명되어 사제 성소 양성 및 학교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한편 일찍부터 농촌에서의 바람직한 사목 방향에 대해 관심을 가진 배문한 신부는, 여러 연구 논문들을 통해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으며, 특히 그 과정에서 교회의 가르침과 해결 방안들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아울러 10여 년에 걸쳐 성인 108인의 행적과 말씀들을 《경향잡지》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61세 때인 1994년 8월 5일,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 온 서정동 본당의 신자들과 함께 자신의 회갑 축하연 겸 휴가차 강원도 삼척의 성 바오로 수녀원 앞 해수욕장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물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한 신자 3명을 구조한 후 사망하였다. 평소에 강론이나 기고란을 통해 강조했던 것처럼 스스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큰 사랑을 실천한 것이었다. 이후 그의 시신은 수원으로 옮겨져 8월 8일에 거행된 장례 미사 후 미리내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수원 가톨릭대학)
※ 참고문헌 <가톨릭 신문> 1917호(1994. 8. 14), 15면/ <평화 신문> 294호(1994. 8. 14), 1~3면/ 《경향잡지》 1417호(1986. 4), pp. 49~52/ 갓등 교지 편집위원회, 《갓등》 7호, 수원 가톨릭대학, 1994/ 《교회와 역사》 267호(1997. 8), pp. 14~17/ 배문한 신부 유고집, 《꿈보다 현실이 아름답다》, 진미디어, 1994. 〔李裕林〕
배문한 裵文漢(1934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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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배문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