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수류(水流) 본당의 전신으로 1889년 가을에 설립되었다가 1895년에 폐쇄된 초기 본당 가운데 하나. 전북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完州郡 九耳面 安德里) 소재. 당시 금구군(金構郡, 1914년 군면 통폐합에 의해 김제군으로 편입)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금구 배재' 로도 불렸다.
〔전 사〕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중국으로 피신하였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1870년대에 들어 만주 요동 지방의 작은 교우촌인 챠쿠(岔溝)에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는데, 이 계획은 1876년 조선의 문호 개방과 함께 실현될 수 있었다. 같은 해 5월 드게트(V. Deguette, 崔東鎮) 신부와 함께 잠입에 성공한 블랑(Blanc, 白圭三) 신부는 그 이듬해 신자가 많았던 전라도 지역의 전교를 위해 고산 어름골(氷洞, 현 完州郡 飛鳳面大峙里)에 정착하였으나, 그가 주로 머무른 곳은 인접해 있던 다리실 공소였다. 1878년 봄 판공을 시작할 즈음 리델(F. Ridel, 李福明) 주교의 체포 소식을 접한 블랑 신부는 1879년 부활 때 충청도 서부 지방을 담당하던 두세(C. Doucet, 丁加彌) 신부를 전라도로 불러 고산 빼재(完州郡 雲洲面 九梯里, 일명 秀峙)에 거주하게 하였으나, 이어 드게트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장수군 계북면 월현리 큰골로 피신하여 뒷산 상여덤에 있는 굴 속에서 함께 숨어 지냈다. 이후 신자들은 이 굴을 백 주교 피난 굴 이라 불렀다.
1882년 부주교였던 블랑 신부가 조선 대목구장직을 대행하기 위하여 상경하게 됨에 따라, 그 해 가을 리우빌(A. Liouville, 柳達榮) 신부가 고산 어름골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884년 9월 조스(Josse, 趙) 신부가 전라도로 발령받아 리우빌 신부가 담당하던 전라도 북부 지방을 제외한 남쪽을 담당하였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1886년 1월 28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리우빌 신부 혼자 전라도와 충청도에 산재해 있는 55개의 공소를 감당하기가 힘들자, 경상도 여진이(善山郡 海平面 洛山洞)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와 신나무골(漆谷郡 枝川面 蓮花洞)의 로베르(B. Robert, 金保祿) 신부가 전라도 지역을 일부 맡아 주기도 하였다. 그 후 1887년 봄 리우빌 신부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라푸르카드(Lafourcade, 羅) 신부가 고산 어름골로 부임하였다. 1888년 2월 말에는 그전에 두세 신부가 거처하였던 고산 빼재로 본당을 이전하였으나, 라푸르카드 신부는 7월 초부터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다가, 마침 전주(현 殿洞) 본당 신부로 발령을 받아 소양면 대성동(현 完州郡 所陽面 大勝里)으로 가던 베르모렐(J. Vermorel, 張若瑟) 신부가 이곳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베르모렐 신부가 이곳에 머무르게 되어 결국 전주 본당의 설립은 신부의 부재로 인해 당초 예정보다 늦추어지게 되었다.
〔공소 시대와 본당의 설립〕 금구 배재에 언제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리우빌 신부가 작성한 교세 통계에 의하면 1882년에 이곳에 공소가 있었고, 이듬해에는 신자가 35명에 달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 1879년 9월에 만주로 추방되었던 드게트 신부가 1883년에 재입국하여 이곳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 예수 승천 대축일을 맞아 이곳 신자들과 함께 배재 동쪽에 위치한 늘안이 골짜기로 소풍 갔다가 그 기념으로 쉰질[50丈] 바위(일명 승천 바위)에 '최탁덕과차' (崔鐸德過此)라고 새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병인박해의 와중에 신자들이 이 산골 지역으로 숨어 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배재에 본당이 설립된 해는, 고산 빼재에 거주하면서 95개의 공소를 담당하던 베르모렐 신부가 가을 판공을 치른 직후 금구 배재로 옮겨 온 1889년이다. 한편 같은 해 5월에는 경상북도 여진이에 머물러 있던 보두네 신부가 전주 본당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소양면 대성동에 부임하였는데, 이로써 전주 동쪽 지역은 보두네 신부가, 서쪽은 베르모렐 신부가 관할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891년 10월 10일에는 강원도의 우도(P.Oudot, 吳保祿) 신부가 전라도로 전임되어 고산 차돌배기(현 白石,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부임함으로써 전라도 지역은 3명의 선교사가 분담하게 되었다.
〔변모와 폐쇄〕 1893년 피정차 상경한 베르모렐 신부가 4월 22일부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발령됨에 따라 부산(현 범일) 본당의 초대 주임이었던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배재 본당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일어난 갑오 농민 전쟁(甲午農民戰爭)으로 전라도 지역의 신자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배재 본당 역시 그 피해가 심각하여 조조 신부는 농민군들에게 여러차례 습격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한 교우촌이 완전히 전멸되었고, 교우들은 깊은 산중으로 숨어 들어가는 등 상황이 위급해지자 조조 신부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전보를 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7월 24일 뮈텔 주교는 전라도 지역의 선교사들에게 피신하거나 아니 면 서울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1894년 7월 27일 뮈텔 주교와 프랑스 공사에게 전황(戰況)을 자세히 보고하기 위하여 상경하던 조조 신부는, 이틀 뒤 성환(成歡)에서 일본군에 패하여 공주 방향으로 도주하던 청군 패잔병에게 체포되어 공주 금강 장기(長岐) 나루에서 마부 정보록(바오로)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로써 배재 본당에는 한동안 신부가 부임하지 못하다가 1895년에 갑오 농민 전쟁이 진정 국면에 들어서자 서울로 피난갔던 신부들이 돌아오면서 그 해 5월 9일 라크루(M.Lacrouts, 具瑪瑟)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래의 교회 발전을 위하여 굳이 배제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라크루 신부는 그 해 가을 판공이 끝난 후 면 소재지가 위치해 있던 수류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 신자들도 이곳을 떠나면서 배재 본당은 폐쇄되었다. (→ 전주교구 ; 전동 본당 ; 수류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전동 성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 호남교회사연구소, 《전동 성당 100년사》,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 교회, 199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I , 천주교 명동 교회, 1993/ 전동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사업회 · 한국교회사연구소편, 《전동 본당 100년사 자료집》 1집, 천주교 전동 교회, 1992/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연표》, 호남교회사연구소, 1993/ 김진소, 《天主教全州教區史 研究資料集》 1집(1882~1911, 地名調查報告書),
호남교회사연구소, 1987/ ―, 《天主教全州教區史 研究資料集》 2집(1882~1986, 教勢統計表), 호남교회사연구소, 1987/ 김구정 · 김영구, 《天主教 湖南發展 史》, 천주교 전주교구, 1964/ 김진소, 《신바람사는 보람》,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최석우, <조조 신부의 순직>, 《경향잡지》 1313호(1977. 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72~74. 〔金成喜〕
배재 본당
梨峴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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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