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梨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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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토마스 신부 탄생 150주년 배티 성당(왼쪽)과 입구의 순교 현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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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토마스 신부 탄생 150주년 배티 성당(왼쪽)과 입구의 순교 현양비.

박해 시대의 교우촌.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鎭川郡 栢谷面 兩白里) 소재.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때 인근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이로 인해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박해 소설 《은화》(隱花)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차령산맥 줄기의 산간 지대로,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군의 경계가 되는 고개에 자리잡고 있는데, 마을 어귀에 꿀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 고개' 로 불리다가 '이치' (梨峙)라는 한자로 표기되었으며, 다시 그 훈독인 '배티' 로 굳어지게 되었다.
〔교우촌의 형성과 박해〕 배티 산곡에 교우촌이 형성된것은 1820~1830년대 무렵이었다. 기록상으로는 1839년의 기해박해로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이 순교한 뒤 그의 4남 최우정(崔禹鼎, 바실리오)이 이웃 동골의 친척 집에서 양육되었고, 3남 최선정(崔善鼎, 안드레아)이 목천의 서들골(천안시 목천면 松田里의 西德洞)에 있는 백부 최영설(崔榮說)의 집에서 양육된 것으로 나타난다. 동골과 서들골은 서로 인접해 있으면서 신자들끼리 왕래가 빈번하던 교우촌이었다.
당시 최경환의 장남 최양업(崔良業, 토마스)은 마카오에 유학하고 있었다. 그 후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3일에 귀국하여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éol, 高) 주교로부터 임지를 부여받은 뒤 배티 이웃의 동골에 거처를 정하고, 그 해 말부터 6개월 동안 전국 5개 도에 퍼져있는 교우촌들을 순회하였다. 또 1851년 6월에는 절골(백곡면 龍德里), 1854년 11월에는 동골, 1857년 9월에는 불무골(백곡면 葛月里)에 머무르면서 서한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배티와 절골뿐만 아니라 그 이웃인 삼박골(양백리), 용진골(용덕리), 정삼이골(용덕리), 발래기(백곡면 明岩里), 명심이(명암리), 지구머리(백곡면 沙松里), 새울(梨月面 新溪里), 지장골(진천읍 芝岩里), 굴티(문백면 九谷里) 등지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깊은 산중에 교우촌들이 산재해 있었으므로 성직자들의 휴식처로는 제격이었다. 그러므로 최양업 신부가 동골에 거처를 정한 데 이어 프티니콜라(Pethincolas, 朴德老) 신부는 배티에 거처를 정하게 되었다. 프티니콜라 신부는 1856년 조선에 입국한 이래 1858년부터 충청도 · 경기도 · 강원도 등지를 순방하였는데, 바로 이 기간 동안에 배티를 사목 활동의 중심지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861년 6월에 최양업 신부가 사망하고, 10월에는 프티니콜라 신부도 건강 때문에 제천의 배론[舟論] 신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이듬해 배티를 떠나게 되었으므로 당분간은 배티에 머무르는 성직자가 없게 되었다. 이 무렵 경상도 서부 지역을 담당하게 된 칼래(Calais, 姜) 신부는 서들골 이웃인 소학골(천안시 북면 納安里)을 여름 휴식처로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5년 뒤인 1866년에 문경의 한실 교우촌에서 박해 소식을 듣고는 가까스로 그곳을 탈출하여 백곡의 삼박골 교우촌을 거쳐 소학골에 도착하여 동료 페롱(Féron, 權)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칼래 신부는 삼박골에서 배티 인근의 신자들에게 판공 성사와 영세를 주었다.
병인박해는 배티 인근의 모든 교우촌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기록상 이 지역 출신이거나 거주자로서 1866~1868년 사이에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들은 오반지(바오로), 이 생원 등 모두 27명에 이르는데, 이들의 거주지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배티 · 발래기 · 지장골 · 동골 · 용진골 · 정삼이골 · 굴티 · 절골 교우촌들이었다. 또 이 밖에도 순교자 박 바르바라와 시누이 윤 씨의 무덤이 현재 백곡 공소 안에 있으며, 삼박골에 순교자 이 생원 가족의 무덤이, 배티 사적지 안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다. 한편 병인박해 때 목천의 서들골 · 소학골 등지에서도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교우촌의 재건과 사적지 조성〕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박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체포됨으로써 일시적으로 와해되고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신자들은 다시 이곳에 모여 교우촌을 재건하였다. 그 결과 1888년에는 충청도를 전담하게 된 두세(Doucet, 丁加爾) 신부에 의해 배티 공소가 설립되었고, 1892년에는 간양골 본당(충남 예산군 예산읍 間良里)의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신부에 의해 새울과 용진골이, 1893년에는 삼박골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그중에서도 배티 공소는 1890년 이래 파스키에 신부의 주목을 받아 교리 학교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후 배티 · 용진골 · 새울 공소에서는 여러 명의 성직자를 배출하였으며, 1894년 이래 합덕(合德)과 공세리(貢稅里) 본당에 속하였다가 1897년부터는 새울 공소가 감곡(甘谷) 본당 소속으로, 1901년부터는 배티 · 용진골 공소가 안성(安城) 본당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1956년 이후에는 모두 진천 본당 관할 공소로 변경되었다.
배티가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이때 청주교구에서는 이 지역에 관심을 갖고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와 함께 인근의 교우촌과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을 조사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의 위치에 경당을 짓고 야외에는 14처 순례의 길과 제대, 그리고 삼박골 비밀 통로를 조성하였다. 그러다가 1976년 이래 진천 본당에 재임하면서 이곳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
던 장봉훈(張奉勳, 가브리엘) 신부가 1993년 4월에 배티 사적지 전담 신부로 임명된 후 성당 건립에 노력하여 1997년 4월 15일에 이를 완공하고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배티 사적지에서는 1995년부터 이웃 동골을 사목 중심지로 하여 활동하였던 최양업 신부의 시복 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으며, 앞으로는 배티 순교자 묘역도 조성할 계획으로 있다. (→ 최양업)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下/ 《치명일기》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 《병인박해 치명 사적》 金玉姬, 《崔良業 神父와 敎友村》, 천주교 청주교구, 1983/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대전교구 교세 통계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0/ 정양모, <최양업 신부의 사목과 사상>, 《韓國 가톨릭 文化活動과 教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차기진, <최양업 신부와 배티 성지>, 《교회와 역사》 206호(1992. 7), 한국교회사연구소, pp. 14~18/ 배티 사적지 편, 《최양업 신부의 서한》,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제1집, 천주교 청주교구, 1996/ 一,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제3집, 천주교 청주교구, 1996.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