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교 白蓮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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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종교적 비밀 결사(秘密結社)로 송(宋) · 원(元) · 명(明) · 청(淸)대에 걸쳐서 활동한 민간 종교의 일파. 중국의 역대 종교 결사 중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특히 명청(明淸) 시대에는 사교(邪敎)의 대명사로 불릴만큼 활동이 왕성하였다.
〔역 사〕 남송(南宋) 소흥(紹興) 연간(1131~1162)에 호군 곤산(昊郡 昆山, 지금의 江蘇 昆山)의 승려 모자원(茅子元)이 개창한 백련종(白蓮宗)에서 비롯된 백련교는 아미타정토(阿彌陀淨土) 신앙에 의한 결사로서, 염불을 행하고 살생계(殺生戒)를 지키면서 정토에 왕생(往生)하기를 바라는 염불 결사(念佛結社)였다. 백련종은 개창 이후 고종(高宗, 1127~1162) 때 일시 후대(厚待)되기도 하였지만 곧바로 이단으로 몰려 관헌의 탄압을 받았는데, 개창자인 모자원이 유배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교리가 쉽고 수행이 간편해 남송 말에는 몽고 통치하의 북방 지역에까지 전파되었고, 모자원이 죽은 후에는 점차 반체제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원(元)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백련교는 조정의 승인과 장려를 받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와 정산호(淀山湖)의 백련당(白蓮堂)은 원대 백련교의 양대 중심이었다. 중기(中期)에는 여산 동림사의 보도(普度)가 《여산연종보감》(廬山蓮宗寶鑑) 10권을 저술해 교리를 집대성하기도 하였으나, 점차 조직과 교리상에 변화가 생겨 계율이 해이해지 고 종파도 난립하였으며, 간혹 원의 통치에 반항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1308년 백련교의 교세가 확대되는 것을 꺼려 금지령을 내렸고, 이후 백련교에 대한 탄압과 승인이 교차하였다. 말기에는 평등주의, 민족주의, 무술 집단과의 결합, 금욕주의를 특징으로 하면서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홍건(紅巾)의 무리인 유복통(劉福通)과 결합한 한산동(韓山 童)의 반란이었다.
명대(明代)에도 백련교는 민중 사이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명실록》에는 백련교와 관련된 사건이 80여 회나 나타나며, 백련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종교 관계의 사건도 200여 회나 발견된다. 이러한 백련교에 대해 명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이를 사교로 규정하고 철저히 금압(禁壓)하였다. 이에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술(術)로서 이단시된 백련교는 비밀 결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그러나 명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백련교 조직은 강건하게 살아 남아 중기 이후에는 교리 면에서 정리되고 체계화되었으며, 무위교(無爲敎)와의 결합으로 교리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리고 백련교 계통의 새로운 종교 결사로서 열반종(涅槃宗), 홍봉교(紅封敎) , 노자교(老子敎), 나조교(羅祖敎) 남무교(南無敎) , 정공교(淨空敎) 오명교(悟明教) , 대성무위교 (大成無爲敎) 등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이러한 종교 결사는 일정한 금욕적 덕목의 실천, 기도, 송경 誦經) 그리고 여러 가지 주술에 의하여 현세의 이복(利福)을 약속하거나 재난 등을 면할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민중 가운데 침투한 백련교는 명말(明末)의 사회 분화와 지배층의 봉건적 착취에 반발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고, 1622년 문향교(聞香敎)를 배
경으로 발생한 서홍유(徐鴻儒)의 난(亂)은 명말 최대 규모의 백련교의 난이라고 일컬어진다.
청조(淸朝)에 들어와 백련교의 교세는 더욱 증가하여 100여 종에 달하는 지파(支派)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사교로 탄압을 받아 활동이 미미하다가 1785년 유지협(劉之協)이 백련교계인 혼원교(混元敎)를 삼양교(三陽敎)로, 《혼원점화경》(混元點化經)을 《삼양요도경》(三陽了道經)으로 바꾸고 체제를 정비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명 황실의 후손인 우팔(牛八)을 옹립(擁立)하고, 교파 지도자 유송(劉松)의 아들 유사아(劉四兒)를 미륵불의 전세(轉世)로 삼아 우팔을 보좌하게 하면서 1796년에 백련교의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은 호북(湖北) · 사천(四川) · 섬서(陝西) · 하남(河南) · 감숙(甘肅) 등지에 영향을 미친 대규모 반란으로 1804년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참가 인원 20여 만명, 전쟁 비용 1억 2천만 냥이라는 엄청난 인원과 비용을 소모한 청조는 이를 계기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민중 반란의 큰 줄기를 이룬 것은 백련교계의 결사였다.
〔사 상〕 백련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민간 신앙 및 종교와 접근 절충 · 연합 · 변질을 겪으면서 발전하였다. 이들의 경전인 《보권》(寶卷)에 의하면 백련교의 중심 사상은 이상향과 모성신(母性神)을 가리키는 '진공가향(眞空家鄕) 무생부모(無生父母)' 의 팔자 진언(八字眞言)과 미륵 신앙에서 도입된 말세론 내지 신시대 대망론인 '삼양설' (三陽說)이다.
진언(眞言)에 의한 백련교의 세계관 내지 미래상은 "천지가 있기 전에 먼저 무생노모(無生老母)가 있었는데 그는 우주 만물과 억만의 아녀(兒女)를 낳았다. 그런데 그들 아녀는 홍진 세계인 동토(東土)에 떨어져 원성(原性)을 깨닫지 못하고 타락하여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고, 말겁(末劫)의 재앙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무생노모는 신불조사(神佛祖師)들을 하범(下凡)시켜 아녀 들을 선도해서 그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수원(收元)이다. 그래서 미륵불장세(彌勒佛掌世)의 시대가 오면 이들 아녀는 모두 구제되어 환향(還鄕)하여 용화회(龍華會)에서 무생노모를 만나 장생불로하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격(神格)은 무생노모와 미륵불인데, 무생노모의 세계는 미륵불이 주재하는 세계이고 인간의 고향이며, 현세는 가상(假像)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교리는 당시 종족적 결합이나 지연적 동질성이 희박한 이주민 사회에서 현세적 · 전통적인 인간 관계 및 가족 관계를 하나의 가상으로 보기 때문에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동체적인 지연 · 혈연을 바탕으로 하는 당시의 정치 · 사회 체제에 있어서는 극히 위험스러운 측면도 있었다.
이처럼 미륵하생(彌勒下生) 신앙은 백련교의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특히 미륵 신앙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미래상은 민중들에게 커다란 매력으로 작용하였다. 비록 이러한 이상향을 약속하는 미륵불의 출현이 56억 7천만 년 뒤여서 결코 실현성이나 현실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에서는 아주 가까운 시기에 미륵불이 출현한다는 믿음이 일찍부터 있었고, 이것은 민중
반란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 세계의 출현은 삼양설에 근거한다.
명 · 청대를 거치면서 광범하게 유포되었던 삼양설은 우주의 개천(開天) 이래의 역사를 미래까지 포함하여 청양(靑陽) · 홍양(紅陽) · 백양(白陽)의 3기로 나누며, 각 시기의 주재자를 연등불(燃燈佛) · 석가불(釋迦佛) · 미록불(彌勒佛)로 설정한다. 여기서 미륵불이 주재하는 백양기가 가까이 오면 커다란 기대와 함께 재앙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륵과 겁재(劫災)의 교리는 다양하고 통일된 체계를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미륵불의 하생이 선전되고 미륵불의 전세(轉世)로써 특정 인물이 제시되며 신비화된다. 또한 미륵불 출현의 전조라고 할 수 있는 혹독한 자연 재해의 도래가 예시되고, 겁재를 피하기 위해서 입교를 하거나 특정한 주문을 외우는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추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 교도들의 입교 동기는 이상향으로의 진입보다는 이를 통해 재난을 면하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백련교는 현세적 문제의 해결은 미륵 정토의 현세적 완성을 약속하는 미륵불을 통해 구체화하고, 원칙적이고 본래적인 구제에 대한 염원은 인류를 '진공가향'이라는 이상향으로 이끌 '무생노모' 에게 의탁하는 구도였다. 따라서 "진공가향에는 무생부모가 있고, 현재의 여래로는 미륵이 우리의 주인이다" 라는 주문에서 그들의 이상과 현실을 알 수 있다.
〔종교적 특징과 천주교와의 관계〕 백련교의 종교적 특징은 5계(五戒 ; 不殺, 不盜, 不淫, 不妄, 不酒)에 기초하여 행동하며, 매일 아침 각 사람의 생활 태도 점검과 참회〔晨朝禮懺文〕가 있고, 여기에 기초한 일상 생활의 금욕적인 도야(陶冶)와 훈련은 민중의 주체 사상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또한 백련교에서 표방한 채식주의(마니교계의 喫菜事魔와 유사)는 육식이 어려운 하층민의 생활과 친화감을 조성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백련교가 민중에게 쉽게 침투할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밤에 모이고 새벽에 헤어지며(夜聚曉散), 삭망(朔望)에 두 번 재회(齋會)를 개최하고, 소향(燒香) 예배를 행하는 것은 산간 벽지에 살거나 낮에 노동하는 민중들에게 상당한 친밀감을 주었다. 그리고 백련교에 남존여비의 관념이 약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이다.
한편 천주교의 중국 전파와 관련하여,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인식하였던 불교계 인사와 관리들은 백련교와 천주교의 유사성을 강조하였는데, 18세기에도 탄압이 필요할 때에는 천주교를 백련교와 의례적인 면에서 유사하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천주교로 개종한 불교계 인사 양정균(楊廷筠)은 《난곡 불병명설》(鸞鵠不鳴說)을 지어 천주교와 백련교의 유사성을 부인하였다. 실제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관성은 찾기 어렵지만, 이러한 논의 속에서 백련교가 당시 사교의 대표로서 정부가 가장 고심한 부류였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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