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 본당

白翎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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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소속 본당.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진촌리 807-1 소재. 1959년 5월 9일 답동(沓洞)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성 야고보. 관할 구역은 백령면과 대청면(대청도, 소청도) 일대. 공소는 백령도 9개, 대청도 3개, 소청도 2개 등 총 14개. 〔교 세〕 1960년 2,837명, 1969년 7,803명, 1975년 4,725명, 1982년 6,279명, 1987년 3,529명, 1991년 1,519명, 1995년 1,563명. 〔역대 신부〕 초대 모페트(E. Moffett, 傅영발) 에두와르도(1959. 5~1973. 4), 임시 태이슨(R. Theisen, 태의선) 로마노(1973. 4~1974. 2), 2대 강의선(姜義善) 힐라리오(1974. 2~11), 3대 황상근(黃相根) 베드로(1974. 11~1976. 12), 4대 이근창(李根昌) 프란치스코(1976. 12~1977. 12), 5대 강용운(康龍雲) 시몬(1977. 12~1981. 2), 6대 김재영(金在英) 로베르토(1981. 2~1983. 1), 7대 이덕진(李德眞) 가브리엘(1983. 1~1986. 2), 8대 강성욱(姜聖旭) 마태오(1986. 2~1988. 2), 9대 호인수(扈寅秀) 베네딕도(1988. 2~1990. 2), 10대 유승문(柳承文) 바오로(1990. 2~1991. 2), 11대 안규도(安奎度) 도미니코(1991. 2~1994. 2), 12대 유영훈(劉英勳) 토마스 데 아퀴노(1994. 2~현재).
〔공소 시대〕 백령도는 해로를 통해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Ferréol, 高) 주교의 지시를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에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지도를 탁송했던 매우 유서 깊은 지역이다. 광복 이전까지 황해도 감목 대리구의 장연(長淵) 본당(1950년 12월경 폐쇄)에 속해있었던 이곳은, 도서(島嶼) 지방이라는 지역적인 특수성과 함께 무속 신앙이 강하게 남아 있었으며, 이미 1895년부터 프로테스탄트가 진출하여 중화동(中和洞) 교회를 건립한 후 전교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백령도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1944년 3월에, 장연 본당의 경애(敬愛)유치원 교사였던 김양겸(金良謙, 가타리나)이 이곳 면장이었던 최경림(崔京琳, 바오로)과 혼인한 뒤 주일마다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이듬해 9월에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가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1946년 3월부터는 매년 한 차례씩 이곳을 방문하였다. 그러다가 1947년에 장연 본당의 이호연(李浩然, 바오로), 정만원(鄭萬源, 마르코), 홍인강(洪仁綱), 장인균(張仁均, 시몬) 가족이 백령도에 정착함으로써 13세대 신자 36명의 답동 본당 관할 백령 공소가 설립되었고, 이와 동시에 이호연의 창고를 개조해서 강당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장연 지역 신자들은 이 지역으로 대거 남하하였는데, 1952년에 부평(富平, 현 부평2동) 본당이 설립되자 백령 공소는 이 본당 관할이 되었고, 1958년 1월 강화(江華) 본당 설립과 함께 이 본당 소속이 되었다가 1년 후에 다시 답동 본당으로 편입되었다.
〔본당 승격과 성장〕 이처럼 백령 공소의 신자들은 본당이 신설될 때마다 그 소속이 변경되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1958년에 한국에 온 미공군 군종인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모페트 신부가 공소 신자들의 이러한 사정을 알고 본당 설립을 추진한 결과, 1959년 5월 9일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이때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모페트 신부는 면사무소 소유의 건물을 인수하여 184평 규모의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하였으며, 지리적 여건상 공소 설립이 불가피하자 백령도에 10개, 대청도에 4개, 소청도에 2개 등 16개의 공소를 설립하였다. 모페트 신부는 미국 가톨릭 복지 협회(N.C.W.C.)의 구호 식량을 주민들에게 배급하면서 전교 활동을 확대하였고, 각 공소마다 2명씩 배치된 인보 성체 수도회 소속 수녀들은 교리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1960년 11월 14일에는 무려 930여 명의 견진성사자가 탄생하였다. 또 1960년에는 성당 바로 옆에 초현대식 의료 기관인 '복자 김 안드레아 병원' 을 설립한 데 이어 양로원 · 고아원 · 보육원 등을 운영하였고, 1961년 7월 15일에는 15~20세의 소년들을 중심으로 힐라리오회를 조직하여 청소년 전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본당 승격 3년여 만에 영세자가 4,000여 명 이 되었고, 1969년에는 14,203명의 주민 가운데 신자수가 7,803명에 달하는 등 인천교구에서 교세 증가율이 가장 높은 본당으로 성장하였으나, 1970년을 고비로 점차 감소하였다.
15년 간 본당의 기초를 세우는 데 공헌한 메리놀 외방 전교회는 1974년 2월에 백령 본당에서의 사목을 인천교구로 이관함으로써 2대 주임으로 한국인 강의선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의선 신부는 그 해 2월 4일 복자 김 안드레아 병원의 운영권을 대한적십자사(현재의 백령적십자병원)에 인계하고, 양로원 · 고아원 · 보육원도 모두 폐원하고 본당 사목에만 전념하였다. 한편 1973년 2월에는 인보 성체 수도회 분원이 폐쇄된 후 곧 이어 천주 섭리 수녀회에서 1982년까지 본당 사목을 돕다가 7대 주임 이덕진 신부 때인 1985년 3월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분원이 마련되어 현재까지 4명의 수녀가 본당 사목을 돕고 있다. 그리고 교육관으로 사용해 왔던 옛 병
원 건물이 1994년에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자 본당에서는 옛 보육원 건물을 개축해서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동안 백령도는 군사 요충지라는 이유로 어로 통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육지로 전출하는 인구가 점증하여 신자수가 많이 감소하였으나, 1995년부터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함에 따라 본당에서도 관광 사목을 계획하는 등 새로운 선교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 인천교구 ; 답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黃海道天主教會史》,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인천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사》, 천주교 인천교구,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의 전사》, 자료로 본 천주교 인천교구사 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인천교구 25년》, 자료로 본 천주교 인천교구사 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교세 통계표》, 자료로 본 천주교 인천교구사 4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인보 성체 수도회 편, 《隣保》, 인보 성체 수도회, 1986/ 吳栢陳 편저, 《白翎島》, 샘터사, 1979. [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