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이 작성하여 동료 황심(黃沁, 토마스) 등의 이름으로 북경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던 비밀 서한. '백서' 란 명주에 쓰여진 서한이란 보통 명사인데, 그중에서도 황사영의 서한이 가장 유명하므로 이것이 <백서>라는 고유 명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서한이 작성된 곳은 배론(충북 제천군 봉양면 九鶴里) 교우촌이고, 완성된 날짜는 1801년 9월 22일(양 10월 29일)이었다.
〔작성 배경〕 <백서>를 작성하게 된 배경으로는, 첫째 1790년 이래 조선 신자들이 북경으로 밀사를 파견하여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선교사와 함께 서양 선박의 파견을 요청〔大舶請願〕한 사실들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으로, 1801년에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와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 데 있었다.
1790년에 시작된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794년 12월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후 조선 교회에서는 다시 북경으로 밀사를 파견하여 성직자와 서양 선박의 파견을 요청하게 되었다. 우선 1796년 말(양 1797년 1월)에는 주문모 신부의 지시에 따라 성직자와 서양 선박의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작성한 다음에 충청도 덕산 출신인 황심을 밀사로 선발하여 북경으로 보냈는데, 이때 황사영, 최창현(崔昌顯, 요한),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형제 등이 그 서한에 서명하였다. 그 후 황심은 1797년과 1799년 말에 다시 북경을 다녀왔으며, 김유산(金有山, 토마스)은 1798년과 1799년에, 황심이 입교시킨 옥천희(玉千禧, 요한)는 1799년과 1800년에 북경을 다녀왔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황사영은 신유박해가 일어나 조선 교회가 위태롭게 되자 그 실상을 구베아 주교에게 알리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서양 선박의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서한을 작성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그는 1798년 이래 고향인 강화도를 떠나 서울 애오개(阿峴)로 이주해 살면서 주문모 신부를 도와 교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에 들어 박해가 일어나자 2월 초부터 서울 도성 안을 전전하며 피신 생활을 하였으며, 동대문 송재기(宋再紀)의 집에서 충청도 보령 출신의 김한빈(金漢彬, 베드로)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김한빈이 그에게 피신할 것을 권하자 황사영은 상중(喪中)에 있는 이가(李哥)로 변성명을 한 뒤, 2월 보름에 김한빈과 함께 서울을 떠났다.
이후 황사영은 충청도와 경상도 예천(禮泉), 강원도 등지를 전전하였으며, 도중에 김한빈으로부터 전라도 고산 출신으로 2월에 제천 배론으로 이주한 김귀동(金貴同)의 집으로 피신하자는 제안을 받고 그 달 말에 배론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배론에 은거하게 된 황사영은 김귀동의 옹기점 한편에 토굴을 파고 지내면서 신유박해 초기의 양상을 자신이 보고 들은 대로 정리하기 시
작하였다. 또 3월 말부터는 김한빈으로 하여금 서울로 가서 박해와 신자들의 상황을 알아오도록 하였는데, 그는 황사영에게 교회 소식을 전하다가 6월 2일 제천에서 서울 포졸들에게 체포된 적도 있었다. 이어 8월 26일(음)에는 황사영의 동료이자 오랫동안 교회의 밀사로 활동하던 황심이 배론에 도착하였다. 이때 황사영은 그로부터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는 소식을 듣고는, 본격적으로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백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형태와 행방〕 <백서>는 62×38cm 크기의 하얀 세명주(細明紬)에 가는 붓으로 작성되었다. 세명주에 서한을 작성한 이유는 교회의 밀사가 이를 옷 안에 꿰매 북경으로 가져 감으로써 감시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러한 방법은 초기 교회 이래로 흔히 사용되던 방법이었다. 이 서한의 총 행수는 122행이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1행당 110자 내외로 모두 13,311자에 달한다.
당시 북경 교회에 이 서한을 전달하기로 되어 있던 사람은 황심이었는데, 그는 9월 말 이전에 황사영으로부터 서한을 전달받아 다시 옥천희로 하여금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 황사영 역시 1800년 10월에 옥천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옥천희는 박해가 일어난 후 북경에서 돌아오다가 의주(義州)에서 박해 소식을 듣고는 1801년 4월에 다시 한번 북경으로 갔었다. 그러다가 귀국로인 봉황성 책문(柵門, 중국측 변문)에서 그 해 8월 이전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옥천희의 밀고에 의해 9월 15일(양 10월 22일)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황심이 체포되었고, 황심은 황사영으로 인하여 옥사가 커진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의 희생자가 없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황사영의 은거지를 자백하게 되었다. 그 결과 황사영은 9월 29일에 김한빈과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었으며, 이내 황사영의 몸 안에 감추어져 있던 <백서>도 발각되고 말았다. 이후 황심 · 옥천희 · 김한빈 등은 형조에서, 그리고 황사영은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게되었다.
한편 <백서>의 내용은 황사영의 추안(椎案)에 수록되었고, 그 원본은 의금부에 보관되어 왔다. 그러나 훗날 그 사본이 유출되어 이만채(李晚采)의 《벽위편》(闢衛編)에 수록되었으며, 1859년에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이 《벽위편》을 입수하여 그 안에 들어 있는 <백서>의 내용 을 채록하였고, 이것이 파리 외방전 교회로 보내져 훗날 샤를르 달레(Ch. Dallet)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인용되었다. 한편 조선의 조정에서는 한때 황사영이 <백서>를 저술한 것이 아니라 공서계(攻西系)의 한 사람인 홍낙안(洪樂安)이 지은 것이라는 설도 유포된 적이 있었다.
그 후 <백서>의 원본은 1894년에 의금부의 옛 문서들을 소각할 때,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재임하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뮈텔 주교는 그 내용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Lettre d'Alexander Hoang à Mgr. de Gouvea, Evêque de Pékin(1801)"이란 제목으로 1925년에 홍콩에서 간행하였으며, 이해 7월 5일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이 로마에서 거행되었을 때, 그 기념으로 오동나무 상자에 넣은 <백서>의 원본과 프랑스어 역본을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하였다. 이후 <백서>는 같은 해 로마에서 열린 세계 포교 박람회에 전시되었다가 교황청 민속 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그곳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한편 뮈텔 주교는 그 원본을 교황청으로 보내기 전에 실물 크기의 동판 사본을 제작하고, 이를 인쇄하여 학계에 배포하였다.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는 1946년에 이를 영인 간행하였으며, 1966년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다시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내용 구성〕 <백서>의 내용은 서론, 본론, 결론 및 대안 제시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서론은 1행부터 5행까지로, 신자로서 구베아 주교께 공경을 표하고, 아울러 서한을 보내 호소하게 된 이유와 조선 교회의 신자들이 바라는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한 부분이다.
이어 본론은 6행부터 90행까지로 전체 분량 중에서 약 70%를 차지한다. 여기에서는 신유박해의 전말과 각 순교자들의 행적을 주문모 신부의 순교까지 다루고 있는데,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중에서 황사영이 서울을 탈출하는 1801년 2월 15일까지는 그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들이지만, 이후의 사실들은 김한빈과 황심으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내용보다는 전자의 내용이 훨씬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최창현(요한),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 김건순(金建淳, 요사팟), 원경도(元景道, 요한),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최필공(崔必恭, 토마스), 최필제(崔必悌, 베드로), 오석충(吳錫忠, 스테파노),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임대인(任大仁, 토마스),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사베 리오), 홍낙민(洪樂敏, 바오로),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이희영(李喜永, 루가), 홍필주(洪弼周, 필립보), 조용삼(趙, 베드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유항검 · 관검 형제, 윤지헌, 김유산,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주문모 신부 등 26명은 그 순교 사실이나 활동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이안정(李安正), 정약용(丁若鏞, 요한), 이벽(李檗, 요한),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지황(池璜, 사바), 강이천(姜彝天), 김백순(金伯淳), 신(申, 마리아), 송(宋, 마리아) 등 9명은 간단히 언급되었으며, 이 밖에 밀고자 김여삼(金汝三), 척사론자인 홍낙안(洪義浩), 목만중(睦萬中), 박장설(朴長卨), 이서구(李書九), 최헌중(崔獻重) 등도 언급되었다.
세 번째로 결론 및 대안 제시 부분은 91행부터 122행 까지이다. 황사영은 여기에서 첫째 조목으로, 박해로 인해 피폐가 된 조선 교회의 경제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고, 아울러 교회 상황과 교우 · 지방의 상황, 신앙 생활 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북경과 조선 교회가 쉽게 연락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조선 교우가 북경에 가서 중국 젊은이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거나 책문 안에 연락처를 설립하는 계획을, 세 번째로 교황이 청나라의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 네 번째 조목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말하여 조선을 영고탑(寧古塔)에 소속시킨 뒤 친왕(親王)으로 하여금 조선을 보호 감독하게 하고 조선 왕을 부마(駙馬)로 삼을 것, 다섯 번째로 서양의 선박과 군사 무기들을 얻어 와서 조선에 출정한 뒤 국 왕에게 글을 보내 위협하여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할 것도 제안하였다. 그런 다음 박해로 인해 교회의 가르침을 따를 수 없음을 설명하면서 대소재(大小齋)의 관면을 요청하고, 황심의 이름으로 서한의 끝을 맺었다.
〔목적과 결과〕 황사영은 서양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영원히 박해가 그칠 수 없었고, 자신을 포함한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는커녕 생명조차 부지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백서>를 통해 우선 주문모 신부와 박해로 순교한 동료들의 죽음을 구베아 주교에게 알리고, 그 순교 기록을 후대에 남김으로써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희망하였다. 그것은 곧 '순교자의 피가 천주교의 씨앗 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울러 그의 의도는 박해를 받는 조선 교회의 어려움을 이해시키고, 앞으로 이를 재건하는 데 관심을 가져 주도록 요청하는 데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박해를 종식시킴으로써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조선에 출입하고, 신앙의 자유를 얻는 데 궁극의 목적이 있었으며, 그것은 곧 당파로 어지러운 조정과 불안하고 문란하여 결코 오래 지탱하기 어려운 조선 사회, 자칫 소멸되어 버릴 수 있는 교회 모두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백서> 중에서도 마지막의 결론 및 대안에 있는 다섯 가지 조목을 중시하였다. 특히 세 번째 조목인 청나라의 종주권(宗主權) 행사, 네 번째 조목인 청나라의 감호책(監護策), 다섯 번째 조목인 서양의 선박 요청과 무력에 의한 위협을 3흉(三兇)으로 지목하고, 이러한 요청을 하게 된 배경을 확인하기 위해 황사영을 여러 차례 추궁하였다. 이에 대해 황사영은 "백성과 나라에 결코 해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의해 박해를 받는 천주교 신앙을 지켜보려고" 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 아래에서 이러한 주장이 결코 받아들여질리는 만무하였다. 조선의 지식인들 중에는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북학론자(北學論者)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문화적으로 청나라보다 우위에 있다는 소중화(小中華)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벌(北閥)을 통해 이전의 굴욕을 갚으려는 배청(排淸) 의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의 위정자들은 <백서> 문제를 정치 · 외교적인 문제로 이끌어 가려고 하였으며, 황사영과 그의 동료들을 국사범(國事犯)으로 다스리고자 하였다. 그렇게 되면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모반의 무리들이므로 탄압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천주교 신앙을 배척하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황사영이 체포된 즉시 문초를 받지 않고, 10여 일이 지난 10월 9일부터 문초를 받게 된 이유도 조정에서 이 사건을 중시하여 사전에 관련 사항들을 점검하고, 그 대비책을 마련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황사영과 그의 동료들은 주로 대안 제시와 관련된 내용들, 관련된 인물들, <백서>의 사본이 청나라에 전달되었는지의 여부 등을 집중적으로 추궁받게 되었다. 그 결과 황심과 김한빈은 10월 23일(양 11월 18일) 각각 모역동참죄(謀逆同參罪)와 지정은장죄(知情隱藏罪)를 적용받아 육시형과 참수형을 당했고, 황사영은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의 명목 아래 국사범의 판결을 받고는 11월 5일에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으며, 옥천희는 같은 날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질 것을 염려하였다. 이에 1801년 겨울에는 진주사(陳奏使) 조윤대(曹允大) , 부사 서미수(徐美修), 서장관 이기헌(李基憲)을 청나라에 파견하여 천주교를 탄압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설명하고, 주문모 신부를 처형한 사실이 중국에 알려져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때 진주사 일행은 <백서> 를 거짓으로 꾸며 만든 <진주사행등본>(陳奏使行謄本, 일명 假帛書)과 10월 27일(양 12월 2일) 대제학 이만수(李晚秀)가 지어 올린 <토사주문>(討邪奏文, 일명 陳奏文草)을 청나라에 전달하였고, 청나라에서는 12월 27일에 <토사주복>(討邪奏覆, 즉 回咨)을 작성하여 진주사 일행으로 하여금 조선에 전하도록 하였다. 이 회자는 다음해 2월 조선에 전달되었는데, 청나라는 이 글을 통해 북경의 선교사가 조선의 전교에 관여할 리 없으니 '정도를 존숭하고 이단에 미혹되지 말도록' (敦崇正道 勿惑異端)하였다. 이로써 <백서> 사건은 외교적 측면에서 마무리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작성한 <진주사행등본>(가백서)은 모두 16행 923자로 축소되었는데, <백서>와는 달리 청나라의 감호책이나 종주권 발동에 관한 내용이 삭제된 반면에 서양 선박의 요청과 무력 외교, 월경 통신(越境通信)과 연락처 설치가 강조되었다. 아울러 <토사주문>에서는 우선 천주교 신자를 백련(白蓮) · 황건(黃巾)과 같은 사적(邪賊)으로 표현함으로써 박해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주문모 신부는 사적들의 우두머리로 외양이 조선인과 다름이 없어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해명하였다. 또 서양 선박의 요청과 조선 토벌 계책, 월경 통신과 연락처 설치 계획을 2흉조(二兇條)로 지목하고, 조선 신자들이 책문에 들어가는 것을 잘 감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후 의금부에 소장되어 오던 <진주사행등본>은 1894년에 <백서>와 함께 발견되었다.
〔성격과 사료적 가치〕 결국 황사영의 <백서>는 1790년 이래로 조선 신자들이 추진해 온 성직자 영입과 대박 청원 운동이 박해와 신앙의 말살이라는 극한 상황 아래에서 무력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탄생한 것이었다. 따라서 달레(Ch. Dallet)가 지적한 것과 같이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 또 이러한 몽상이 조선 왕조의 부정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혁명 원리에 입각한 반민족적 대안 제시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대안 제시가 비판 이상의 문제였다고 하더라도 당시에는 아직 근대적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반민족적이라고 규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또 <백서>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데 있었다면, 이러한 반민족적인 성격으로 인해 황사영의 신앙과 순교가 부정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 <백서>가 지니는 사료적 가치는 아주 높다. 우선 그 내용은 초기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특히 초기 신자들의 활동이나 박해 과정, 많은 순교자들의 신심이나 순교 사실들이 이를 통해서만 규명될 수 있다. 달레의 저술에서도 많은 부분이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서>의 내용은 당시대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조선 후기사를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다만, 황사영 개인의 의견이 곳곳에 첨부되어 있고, 1801년 2월 15일 이후의 내용은 전문(傳聞)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 <황사영 백서> ; → <가백서> ; 황사영)
※ 참고문헌 黃嗣永, <帛書>, 한국교회사연구소, 1966/ 《가톨릭 사전》 《달레 교회사》 上/ 《推案及鞫案》 《純祖實錄》 Lettre d'Alexander Hoang à Mgr de Gouvea, Evêque de Pékin(1801), Hongkong, 1925/ 李晚采, 《闢衛編》, 闢衛社, 1931/ 《邪學懲義》, 弗咸文化社, 1977/ 李基慶, 《闢衛編》, 曙光社, 1978/ 石井壽夫, <黃嗣永の帛書に就ぃて>, 《歷史學研究》 10권 1호, 1940/ 山口正之, 《黃嗣永帛書の研究》, 大阪 全國書房, 1946/ 尹在瑛 역, 《黃嗣永帛書外》, 正音社, 1967/ 趙珖, <黃嗣永帛書의 社會思想的 背景>, 《史叢》 17~18합집, 1977/ 朱明俊, <天主敎 信徒들의 西洋船舶請願>, 《教會史研究》 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車基真)
<백서> 帛書
글자 크기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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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실물 크기의 <백서> 동판 사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