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교구 소속 본당. 1934년 만주 간도성 왕청현(汪清縣) 백초구시에 준본당으로 설립된 후 정식 본당이 되었다가 1946년에 폐쇄되었다. 주보는 성녀 엘리사벳. 왕청현 본당으로도 불렸다.
1928년 7월 19일 만주의 간도(間島) 지역이 원산 대목구(元山代牧區)로부터 분리되어 연길지목구(延吉知牧區)로 설정되고, 이듬해 2월 5일 브레허(T. Breher, 白化東) 신부가 초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이 지역에는 8개의 본당과 12명의 선교사, 그리고 11,764명의 신자가 있었다. 그 후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발한 틈을 이용하여 마적의 약탈 행위가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마침내 육도포(六道泡, 즉 팔지) 본당이 폐쇄되었고, 삼원봉(三元峰, 즉 영암촌) 본당이 대립자(大拉子)로, 대령동(大嶺洞) 본당이 다조구(茶條溝)로 이전하였으며, 합마탕(蛤蟆塘, 延吉縣 大房子市) 본당과 돈화(敦化) 본당이 일시 폐쇄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본당 설립을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져, 1934년에 합마탕 본당 관할의 백초구 공소가 준본당으로 승격되면서 합마탕 본당 주임 쾨스틀러(B. Köstler, 高) 신부가 초대 주임을 겸하였다. 백초구는 비록 준본당이었으나, 왕청현 일대에서는 최초로 설립된 본당이었기에 교세는 꾸준히 증가하여 1936년에는 신자수가 108명에 달하였다.
그 후 김충무(金忠務, 글레멘스) 신부가 이곳으로 정식 파견되면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나, 정확한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당시 백초구 본당에는 전교 수녀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매달 한 번씩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연길 본원에서 수녀를 파견하였고, 1940년대 초부터는 이신숙(李信淑, 미리암) 수녀가 백초구 본당으로 정기적인 '이동 전교 를 다녔다. 1943년 3월에는 김충무 신부가 사제수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평양 대목구의 비현(批峴) 본당 주임으로 전임됨에 따라 신윤철(申允鐵, 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3년 만인 1946년 4월 말,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한 후 중국 공산군에 의해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왕청 지역에 남아 있던 신윤철 신부는 1948년경에 체포된 후 인민 재판에 회부되어 장살형(杖殺刑)을 당할 뻔하였다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백초구 본당은 본당 신부의 부재로 폐쇄됨으로써 침묵의 본당이 되었다. (⇦ 왕청현 본당 ; → 연길교구)
※ 참고문헌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편, 《은혜의 60년》, 199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P.H. Walter, 정학근 역, 《승리의 십자가》, 분도출판사, 1978/ <신윤철 신부>, 《교회와 역사》 104호(1984. 2), 한국교회사연구소, pp. 9~10/ 《가톨릭 청년》 41호(1936. 10)/ 《가톨릭 연구》 9호( 1936. 9)/ 《북한 선교》 14호(1986. 8). 〔金成喜〕
백초구 본당
百草溝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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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