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한성 白漢成(1899~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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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한성.

백한성.

법조계 신앙인. 제 11대 내무부 장관. 세례명은 알로이시오곤자가. 본관은 수원(水原). 아호는 서진(曙津). 1899년 6월 15일 충남 논산군 은진면 내동리(奈洞里)에서 백낙호(白樂鎬)와 천순녀(千順女) 사이의 8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나 고향 부근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대전(大田)에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23년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청주(淸州) 지방 법원 입회 서기로 근무하였으나, 일본인 판사와의 잦은 마찰로 사임한 후 일본에 유학하여 1930년 사법관 시보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후 1932년 10월 11일 평양 지방 법원 판사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이
래 1935년 청진(淸津) 지방 법원 판사, 1938년 광주(光州) 지방 법원 판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8 · 15 광복 후에는 대전 지방 검찰청 검사장을 거쳐 1948년 법무부 차관, 1949년 서울 고등 법원장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이어 같은 해 11월 19일에는 대법관으로 취임하였으며, 탄핵 심판관(彈劾審判官) 헌법위원회위원 등 법조계의 주요 직책들을 역임한 후, 1953년에는 제11대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당시 사회 문제가 되었던 잡부금 문제 및 인사 비리 등을 척결하는 데 앞장 섰다. 1954년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1955년에 다시 대법관에 임명되어 1961년까지 재직하였다. 관직을 사임한 후에는 변호사로서 인권 보호와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밖에 한국 신문 윤리 위원장과 서울 변호사회 상무 위원장, 서울시 수석 법률 고문 등으로도 활약하였다. 매사에 원칙을 철저히 중시하였으나, 법 집행에 있어서는 개인의 인권 존중을 가장 중요시 하였던 그는, 1951년에 서울대학교 법대에서 민사 소송법을 강의했는데, 이후 그는 이 내용을 토대로 하여 《민사 소송법 석의》(民事訴訟法釋義)와 《민사 소송법》(民事訴訟法)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후배인 김홍섭(金洪燮, 바오로) 판사와 함께 법조계의 대표적인 천주교 신자였던 백한성은, 특히 청빈하고 성실한 생활 자세로 동료와 후배들에게 늘 모범이 되었고, 법관 재직 중 활발한 전교 활동으로 많은 동료 법조인들을 입교시켰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신앙 생활에도 언제나 충실하였다. 1968년에는 상도동(上道洞) 본당의 성당 건립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아 그 해 11
월 5일 성당이 완공되기까지 많은 공헌을 하였다. 말년에는 심한 난청(難聽)으로 강론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으나 부인의 도움을 받아 정상인보다 더 열심한 묵상 생활을 하다가 73세 때인 1971년 10월 13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경향잡지》 1245호(1971. 12)/ 《교회와 역사》 253호(1996. 6), 한국교회사연구소, pp. 13~15/ 韓龍煥 · 徐相堯 편저, 《福音의 證人》,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2, pp. 229~236/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p. 475.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