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제임스 파트릭 Byrne, James Parick(1888~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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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파트릭 번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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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파트릭 번 주교.

주교. 초대 평양 지목구장. 초대 주한 교황 사절.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파트리치오. 한국 이름은 방일은(方溢恩). 1888년 10월 26일 미국 워싱턴에서 10남매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나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1908년 메릴랜드 주 케톤스빌(Catonsville)의 세인트 찰스(St. Charles) 대학을 거쳐 1909년 9월 볼티모어(Baltimore) 교구의 세인트 메리(St. Mary) 신학교에 들어가 1915년 6월 23일 졸업과 동시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신학교 입학 당시부터 해외 선교를 갈망하였던 그는, 곧바로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이듬해 9월 3일 메리놀회 총장 월시(J.A.Walsh) 신부의 비서 겸 참사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17년에는 월시 신부가 새로운 포교지를 물색하기 위해 아시아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자 총장 대리로 활동하였다. 이어 1918년 6월에는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튼(Scranton) 부근의 메리놀 버나드(Venard) 소신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약 4년 동안 신학생 양성에 주력하다가, 1922년 11월 메리놀회가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平安道) 지역의 포교권을 위임받자 그 해 11월 27일 한국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5월 10일 평양 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한국에 입국하여 임시로 서울 주교관에 머무르던 번 신부는, 심한 이질에 걸려 요양차 잠시 상해로 갔다가 돌아와 한국 천주교회의 실정을 파악하면서 평안도의 전교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3년 10월 22일에 클리어리(P.J. Cleary, 吉) 신부가, 11월 24일에는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신부가 차례로 입국하자 의주(義州) 본당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메리놀회 한국 지부를 정식으로 출범시키는 동시에 이들과 함께 평양 지목구 신설을 위한 준비 작업을 추진하였다. 아울러 새로 한국에 진출하는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수녀들이 보다 원활한 전교 활동을 펼 수 있도록 도와 주는 한편, 평안북도 비현(枇峴)에 메리놀회의 임시 본부를 설치하고, 신의주(新義州)를 왕래하면서 본당 신설을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비현 지역의 교통이 점차 불편해져 1924년 초 신의주(新義州)에 있는 일본인 사가(私家)를 매입하여 본부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1926년 5월에는 그 동안 자문 역할을 했던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서울 대목구로 복귀하자 그의 뒤를 이어 신의주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번 신부는, 부임 직후 진사동(眞砂洞) 일대에 새 부지를 매입한 후 직접 성당 신축 공사를 지휘하여 한양(韓洋) 절충식 연와제 성당을 완공하였으며, 교세 신장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또 평안도 지역의 교세가 꾸준히 증가하자 캐시디(J.Cassidy, 美) 신부로 하여금 중강진(中江鎮) 지역에 본당을 신설하도록 하였다.
1927년 3월 17일 서울 대목구로부터 평양 지목구가 분리 · 설정되면서 초대 지목구장이 된 번 신부는, 지목구의 새로운 중심지를 관서(關西) 지방의 중심지인 평양으로 이전하고 그곳에 주교좌를 설치할 것을 계획한 뒤, 평양 북쪽의 서포(西浦)에 본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29년 8월 미국에서 개최된 메리놀회 총회에 참석했다가 총장 부재시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제1 참사 위원으로 선출되어 지목구장직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메리놀 신학교 학장으로 전임되었고, 1934년에 메리놀회의 일본 진출이 결정되면서 다시 새 포교지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같은 해 7월 12일 일본에 입국하였다. 1937년 7월 17일 교토(京都) 지목구가 설정됨에 따라 초대 지목구장으로 활동하였으나, 미 · 일 관계가 점차 악화되자 1939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일본인 주교를 서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에 지목구장직을 사임한 번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계속 일본에 머무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1946년 7월 휴가차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봄 다시 일본에 입국하여 사목하였다.
1947년 8월 12일 번 신부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초대 주한 교황 사절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교황청에서 한국을 정식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해 10월 9일 다시 한국에 입국한 번 신부는, 즉시 한국을 합법적인 독립 국가로 인정한다는 교황청 문서를 발표하였으며, 1948년 12월 12일에는 유엔(UN) 총회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정식으로 승인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1948년 11월에 전국적인 차원의 교회 협의체 구성을 계획하여 이를 동료 크레이그(Craig, 奇厚根) 신부에게 위촉하였고, 그 결과 이듬해 4월 5일 '한국 천주교 중앙위원회' (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발족되기에 이르렀다. 이어 1949년 4월 17일에는 가제라(Gazera) 교구의 명의(名義) 주교로 임명되어 같은 해 6월 14일 명동(明洞)성당에서 주교 성성식을 가졌다. 이때 그는 '주님이 아니시면' (Nisi Dominus)을 사목 표어로 정하고 주교 문장 안에는 한국을 상징하는 무궁화를 넣었다.
그러나 이 무렵 북한 지역에서는 공산 정권에 의해 교회 탄압이 가중되고 있었고, 1949년 5월에는 제6대 평양교구장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주교가 불법 납치되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에 번 주교는 북한에서의 종교 박해와 성직자들의 체포 · 감금을 신랄히 비판함으로써 북한 공산 정권으로부터 무서운 보복을 하겠다는 협박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부 외국인 성직자들을 일본으로 피난시킨 뒤 교황 사절관을 지키다가 그 해 7월 11일 보좌 부드(W. Booth, 夫文化)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다른 외국인 성직자 · 수도자들과 함께 서울 소공동(小公洞)의 삼화 빌딩에 감금되었다가 인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여러 날 심문과 모욕을 당한 뒤 평양으로 이송되어 7월 19일에는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9월 5일에는 다시 만포(滿浦)로 이송되었고, 이어 10월 8일에는 고산진(高山鎮)으로, 다시 초산진(楚山鎭) 등으로 끌려갔다가 11월 7일 중강진(中江鎮) 부근의 하창리(下昌里) 수용소에 수용되는 '죽음의 행진' 을 겪어야 하였다. 이 행진 도중에 겪은 고초와 수난으로 인해 번 주교는 1950년 11월 25일, 62세의 나이로 수용소에서 순교하여 하창리 마을 밖에 묻혔다. 한편 그의 동료이자 만주 무순(撫順)교구장이었던 레인(R.A.Lane) 주교에 의해 번 주교의 일대기이자 순교기(殉敎記)인 《쇠사슬에 매인 교황 대사》(Ambassador in Chains)가 1955년에 뉴욕에서 발간되었다. (→ 교황 사절 ; 메리놀 외방전교회 ; 부드 ; 평양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신문> 1864호(1993. 7. 18), 1면/ 《가톨릭 청년》 65호(1949. 6 · 7), p. 21 韓龍煥 · 徐相堯 편저, 《福音의 證人》,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2, pp. 85~95/ 平壤教區史編纂委員會 편, 《天主教平壤教區史》 198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6 · 25 사변과 천주교회의 순교자들>, 《사목》 189호(1994. 10), pp. 26~35/ 《韓國 가톨릭 어제와 오늘》, 가톨릭 코리아사, 1988/ W.J. Coleman, 《NCE》 2, p. 921/ R.A. Lane, Ambassador in Chains, New York, 1951(박준영 역, 《기억의 돋보기》, 성바오로출판사, 1994).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