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 언급된 여러 가지 제사 방법 가운데 하나로, 가죽을 벗긴 짐승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에 태우는 제사. 이 제사의 형태로 인해 한국에서는 '굽다, 사르다'를 뜻하는 '번' (燔)자를 붙였다.
〔종교사학적인 관찰〕 종교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번제는 가장 오래된 제사 방법 중의 하나이다. 셈족의 종교에서 신(神)은 불사(不死)의 존재이며, 인간 세계와 분리되어 살기 때문에 특별한 음식과 음료를 먹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신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 세계에 머무를 때, 자신의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 없기에 지상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그중에서 신들에게 가장 잘 맞는 음식물이 바로 동물의 피와 기름으로 여겼다. 특히 피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여겨졌다. 셈족의 종교에서 번제를 드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은 신과 인간이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점이다. 번제를 드리는 과정에서 죽인 동물의 피와 기름기는 신에게 불에 태워 바쳐지고, 나머지는 제사를 지낸 사제의 몫이 되었다. 따라서 신에게 바쳐진 감사 혹은 속죄의 표시가 번제를 통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바로 신과 인간의 합일(合一)로 해석될 수 있으며, 번제에 부여된 이 같은 의미는 번제가 고대 근동 지방에서 가장 널리 행해지던 제사 형식으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번제에 바쳐지는 제물은 다양하다. 가축, 곡식, 그 외에 귀한 물건들 그리고 종종 인간이 제물로 바쳐지는 경우도 있었다. 근동 지방에서는 가축과 곡식을 바칠 때면 언제나 수컷인 맏배나 맏물을 제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때묻지 않은 새로운 것을 신에게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러한 생각은 우가릿(Ugarit)에서 출토된 희생 제사의 제물 목록이나 페니키아,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문헌에서 보여지듯이 근동 지방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Ras Shamra 1939, ii. 18 ; Ras Shamra 1929, i. 1 ; ii. 15~16 ; Glaser 1150, 3). 이와 같이 가장 귀한 것을 마땅히 신에게 바쳐야 한다는 사고, 그리고 이런 제물들에 특별한 효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구약성서에 그대로 수용되었다(레위 19, 23-25).
인간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는 종교 풍습은 고대 근동 지방의 종교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구약성서에서는 자식을 몰록(Molech) 신에게 바치는 행위를 이방인의 종교 행위라 하여 철저히 배격하였다(레위 18, 21 ; 2열왕 23, 10). 몰록 신은 팔레스티나 지역의 토속신으로 이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어린이가 불속을 지나도록 하는 종교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그 외에 카르타고의 종교 의식이나 그리스 신화, 고대 게르만 종교, 그리고 멀리는 인도의 화장 의식도 인간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유추된다(Apollodorus Bibliotheca, v. 1 ; L. Beinart, Lexikon der Theologie und Kirche, 7, p. 1168).
그러나 번제는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사 형태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번제가 가지는 일반적인 의미는 제사의 의미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다른 희생 제사와 마찬가지로, 번제를 통하여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거나 속죄를 한다든가 행복을 기원하는 등 다양한 형태를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제가 고대 제사 형태 중에서도 눈에 띄는 위치에 있는 것은 번제에 주어진 상징성 때문이다. 희생 제물을 제단에 놓고 거룩한 불에 태우면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데, 이를 두고 고대인들은 신이 그 냄새를 맡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사고는 구약성서에서도 발견된다(출애 29, 18 ; 레위 1, 9 ; 참조 : 이사 1, 13).
〔구약성서에서의 번제〕 구약성서에서 '제사' 를 가리키는 가장 보편적인 용어는 하느님께 '드림' 이라는 뜻을 가진 '민하' (מִנחָה)이다. 고대 근동 지역 종교의 일반적인 인식과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에서도 무엇인가를 신에게 바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 하느님의 거룩한 보호를 받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1사무 10, 27). 또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나가는 것을 부끄러운 행위라고 생각하였다(출애 23, 15 ; 34, 20 ; 신명 16, 16 이하).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바치던 제사 형태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제물을 불에 태우는 제사 형태는, 제물로 사용되는 동물이 주로 가축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유목민이었음을 알려 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손에 이끌려 이집트를 빠져 나온 다음, 야훼는 자신의 백성과 계약을 맺고 생활 규범 및 여러 가지 제사 규칙 등 방대한 내용을 담은 율법을 준다. 이 율법서에 번제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출애 29, 10-18 ; 레위 1장). 히브리어로 '올라' (עֹלָה)라고 하는 번제는, 구약성서에서 모두 280여 회 사용되었는데, 희생 제물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에서 희생 제사에 속한다. 희생 제사는 성전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바쳐졌다. '올라' 는 '(제단 위에서, 또는 연기로 하느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 이라는 의미이다(1사무 7, 9. 10 ; 13, 9). 번제 중에서 제물을 통째로 태우는 것을 '칼릴'(כָּלִיל)이라 하고, 특정 부위만 태우는 것은 '제바흐'(זֶבַח)라 한다. 번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은 언제나 완전히 태워져야 하며, 태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 야훼를 기쁘게 해드린다(레위 1, 9. 13. 17). 구약성서에서 번제는 공적 예배의 한 부분이었으며(출애 29, 38-42), 하느님과의 이상적인 관계 유지, 또는 변하지 않는 헌신을 상징한다. 그리고 기능적으로는 주로 속죄의 제사와 관련이 있다(출애 29, 14 ; 레위 1, 4).
번제물로 바쳐지는 가축으로는 황소, 숫양, 숫염소가 있고, 날짐승으로는 산비둘기와 집비둘기가 있다. 가축을 야훼께 번제로 드릴 경우에는 언제나 흠이 없는 수컷만을 선택해야 하며, 제물을 바치는 장소인 제단은 성전의 중심부인 만남의 장막 문 앞이다. 여기서 우선 소를 죽이고 사제들이 소에서 나온 피를 받아 제단 주변에 두루 뿌린다. 그 다음 번제물을 바치는 이가 소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미면 사제들이 제단에 불을 피우고 그 불 위에 장작을 얹는다. 그리고 이 장작불에 저민 고기와 머리와 기름기를 태우고, 제물 바치는 이가 내장과 다리를 씻어 놓으면 이것 역시 사제들이 제단 위에서 사른다. 번제물이 비둘기인 경우는 사제가 먼저 머리를 떼어 제단 위에서 사르고, 피는 제단 턱에 대고 뺀다. 제물을 바치는 이는 모이 주머니와 오물을 떼어내 제단 동쪽의 잿더미에 버려야 한다. 그리고 두 날개를 잡고 아주 떨어지지 않게 비둘기의 몸통을 찢어 놓으면 사제가 이것을 제단에서 사른다(레위 1장). 번제에서는 원칙적으로 가축을 번제물로 봉헌해야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비둘기를 번제물로 사용하였다(레위 5, 7).
〔신약성서에서의 번제] 번제를 뜻하는 그리스어 '홀로 카우토마' (ὁλοκαύτωμα)는 신약성서에 모두 3번 언급되어 있다(마르 12, 33 ; 히브 10, 6. 8). 예수와 어떤 율법학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첫째가는 계명에 대한 대담' (마르 12, 29-31)에서 율법학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나 친교 제사보다 더 낫다"는 대답을 하였다(12, 33). 그리고 히브리서 10장 1-11절에서는 시편 40편 7-9절을 인용하면서 "제사와 제물과 번제와 속죄(제사)를 하느님이 더 이상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시며, 그리스도가 몸을 바치심으로써 이것들이 치워졌다" (10, 8-9 참조)고 설명한다. 이러한 성서의 언급들은 유대인들에게 전통적으로 이루어지던 각종 제사의 중요성이 상대화되었으며, 제사의 형식을 초월하는 정신적인 의미가 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신약성서에서 '번제' 라는 낱말은 다분히 부정적인 어감을 가진다. 이는 유대교와 분리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전통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결국, 위에 언급한 마르코 복음 12장의 대담은 1세기경 해외 거주 그리스도인들이 성전 제사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구절들이라 하겠다.
앞의 세 구절들 외에도 예수가 성전을 정화한 사건(마르 11, 15-19 ; 마태 21, 10-17 ; 루가 19, 45-48 ; 요한 2, 13-16)에 등장하는 '비둘기 장사' (마르 11, 15)는 바로 번제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이다. 이는 당시에 미처 제물을 준비해 오지 못한 이들, 혹은 성전 뜰에서 제물을 살수 있다는 생각으로 빈손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온 사람들에게 번제물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내용이다. (→ 제사)
※ 참고문헌 L. Beirnaert, 《LThK》 7, pp. 1166~1176/P. van Imschoot, Bibel Lexikon, p. 1264ff/ 《ER》 12, pp. 544~557/J. Gnilka, Das Evangeliumnach Markus, 《EKK》 II -2/ H. Hegermann, Der Brief an die Hebräer, 《THNT》 16/ X. Leon-Dufour, T. Prendergast trans., Dictinary of New Testament, New York, 1983/ 정양모 역주, 《마르코 복음서》, 200주년 신약성서 2, 분도출판사, 1981/ 《기독교 대백과 사전》 16, 기독교문사, 1980, pp. 870~897. 〔朴泰植〕
번제 燔祭 〔히〕עֹלָה 〔그〕ὁλοκαύτωμα 〔라〕holocaustum 〔영〕burnt sacrif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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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는 가죽을 벗긴 짐승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에 태우는 제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