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니샤드의 성격〕 산스크리트어로 '우파니샤드' 는 '가까이 앉는다' 는 뜻인데, 여기서 파생되어 스승과 제자가 가까이 앉아 스승이 제자에게 전수하는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가르침 (guhyādeśa) 또는 이러한 가르침을 담은 문헌을 일컬게 되었다. 문헌으로서의 《우파니샤드》는 《베다》 (Veda) 의 끝 (anta) 부분을 구성하고 있기에 이를 베단타 (vedānta) 라고도 한다. ‘안타’에는 ‘목적’, ‘절정’이라는 의미도 있어 《우파니샤드》는 후에 《베다》의 목적, 또는 궁극적 취지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우파니샤드>는 대략 기원전 8세기경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방대한 문헌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도 100여 종에 이른다. 그중 비교적 오래되고, 후대의 베단타 학자들의 주목을 끌어 주석서가 전해지는 것은 보통 18개 정도이다. <우파니샤드>는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어 상징과 비유, 시적 상상과 신화적 요소들이 혼합되었으며, 서술 방식도 체계적이거나 논리적이라기보다 시적이고 상징적이다. 또 사상과 내용도 잡다하고 함축적이어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러므로 해석의 관점에 따라 일원론적 · 이원론적 베단타, 절대론적 혹은 유신론적 베단타 등 여러 학파들로 분화되었다. 그중에서도 오늘날 힌두 철학과 종교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남긴 것은 상카라(Śaṅkara)에 의해 정립된 '불이적 베단타 학파' 이다. 범아일여 사상도 이 학파의 관점에 의거해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파니샤드>의 근본적인 사상은 '브라만' 과 '아트만'으로 응집된다. <우파니샤드>와 베단타 학파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브라만에 대한 탐구이고 아트만에 대한 인식(Atma-bodha)이다. 이들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을 외부의 대상적 사물에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아트만에서 찾았고, 더 나아가 양자가 동일한 실재임을 발견하였다. 참다운 나인 아트만이 곧 무한, 절대의 브라만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윤회의 속박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절대적 자유(해탈)와 평온을 얻는 것이 〈우파니샤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브라만〕 궁극적 실재를 의미하는 브라만은 '성장하다' , '터져 나오다 라는 의미의 어근 brh에서 파생된 명사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리그 베다》에서는 처음에 '만트라' (呪文, 讚歌)를 가리키다가 점차 만트라가 가진 힘을 의미하게 되었고, 제의서(祭儀書)인 〈브라마나)(Brahmana)에서는 제의, 혹은 제의가 가진 힘을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제의서 시대(기원전 1000~800경)에 있어 제사란 대우주와 동치(同置) 관계를 갖는 소우주였기에 브라만은 우주의 운행과 인생의 길흉화복을 지배하는 힘이었고, 제식(=브라만)을 아는 자는 곧 우주와 인생을 통제하는 힘을 소유하였다. 따라서 바라문(婆羅門, Brahmana) 사제는 브라만을 알고 그것을 소유한 자인 만큼 제의서 시대에는 이들에게 신보다 더 높은 위계가 주어졌다.
<우파니샤드>(=베단타) 시대에 와서 브라만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이자 만유의 근원자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끊임없이 변천하는 현상적 · 경험적 존재에 한정되지 않는 영원 불변의 절대적 실재이며, 만물이 그로부터 생 성 · 유지되고, 마침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우주의 근원이 곧 브라만이다. 그러나 우주 만유는 브라만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에 의존해서만 존속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브라만은 하나의 실재이지만 초월적인 측면과 내재적인 측면이 있고, 그에 따라 무속성(無屬性) 브라만(nirguna Brahman)과 유속성(有屬性) 브라만 (saguna Brahman)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감각과 개념적 인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불가언설(不可言說)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neti, neti)라는 유명한 문구가 보여 주듯 오직 부정적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후자는 전지전능한 창조주인 이슈와라(Isvara, 主宰神)로서 신앙과 기도에 응답하고 은혜를 베푸는 인격신이다. 전자가 명상과 신비적 직관(Jiana, 智) 속에서 드러나는 절대자라면 후자 는 인간의 정의적(情意的) 측면에 호소한다. 이슈와라는 창조력인 마야(maya)에 의해 스스로의 의지로부터 이 세 계를 창조하며, 동일한 이슈와라를 우주의 창조적 측면에서는 브라만 신(梵天), , 유지적 측면에서는 위슈누 (Visnu) 신, 파괴적 측면에서는 쉬와(Siva) 신으로 구분한다(三神一體) 그러므로 브라만의 두 측면은 분리된 것 이 아니라 단일한 실재의 양면이며,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즉 이슈와라(유속성 브라만)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통해 마침내 무속성 브라만과의 신비적 합일에 이를 수 있다.
브라만은 대상적 · 객체적 존재가 아니라 주 객의 대립을 넘어선 신비적인 체험이다. 이것은 언어나 개념으로 인식될 수 없고, 이의 체험은 흔히 '존재-의식-회열'(sat-cit-ananda)로 기술된다. 즉 브라만은 허무를 부정하는 존재의 충만으로 체험되고, 시공에 한정된 경험적 현상(물질이나 마음)이 아닌 순수 의식(cit)으로 체험되며, 감각적 쾌락과 다른 영적 희열로써 체험되는 그 무엇이다. 브라만은 그것을 앎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참다운 실재로서, 이것을 아는 자는 곧 브라만 자체가 된다. <우파니샤드>는 무한 · 불변 · 절대의 실재인 이 브라만을 깨닫고 브라만을 실현함으로써 마야(maya, 無知)의 베일에 싸인 윤회적 세계의 무상함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평화와 생명을 얻으려는 종교적 모색의 표현이다. 그리고 브라만을 어떻게 실현하고 어떻게 윤회로부터 해탈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아트만이다.
〔아트만〕 브라만과 더불어 인도 종교와 인도 철학의 중심 개념인 아트만은 '호흡하다' 는 의미의 어근 an에서 파생되어, 처음에는 호흡을 뜻하였으나 점차 생명 · 영혼 · 자아 혹은 개체의 본질적 자아라는 의미로까지 확장되었다.
《리그 베다》에는 "태어나지 않은 부분" (ajo bhagah X, 16, 4)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인간에게는 태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죽지 않는 불사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험적 나를 구성하는 신체 · 마음(manas, 意根). 의식(vijnana)과는 다른 것으로, 이 모든 것을 제거하고도 남아 있는 존재, 즉 아트만이다. 인간의 보편적 자아 인 아트만은 심신이라는 외적 형태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 순수 존재이자 순수 의식으로서, 외적 부가자(upadi)로부터 벗어날 때 체험되는 영적 실재이다. 마치 이름과 형태(nama-rupa, 名色)로 이루어진 현상계가 브라만의 현 현이듯이, 심신 복합체로 이루어진 개체(jiva, individual self)는 단일한 보편아(普遍我, 즉 아트만)의 다양한 표현 이다. 또한 브라만이 우주의 역동적 흐름의 밑바닥에 있는 영원한 고요라면, 아트만은 개체의 의식적 활동 밑에 놓여 있는 내적 바탕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우주적 무지(無知)인 마야에 의해 현현된 현상계를 참다운 실재로 착각하듯이, 개아(個我)도 참 자아〔我〕와 나 아닌 것〔非我〕을 분별하지 못하는 개체적 무지에 의해 윤회의 고(苦)를 경험한다.
이처럼 개체적 무지(ajinana)에 싸여 있는 아트만은 다섯 가지 덮개에 가려져 있다. 이를 오장설(五藏說)이라 고 하는데, 겉으로부터 차례로 열거하면 ① 음식으로 이루어진 것(食所成藏), ② 생기로 이루어진 것(生氣所成藏), ③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意所成藏), ④ 지성으로 이루어진 것(識所成藏), ⑤ 환희로 이루어진 것(歡喜所成藏)의 다섯이다. 이 다섯은 변화하고 괴멸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신(身, Sarira)이라고도 하는데, ①은 감각기관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조대신(粗大身), ②~④는 감각 기관에 의해 지각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미세신(微細身), ⑤는 근원적 무지로서 조대신과 미세신을 생성시키는 원인이라는 의미에서 원인신(原因身)이라고 부른다. 오장 혹은 세 가지 몸은 아트만이 아니지만, 범부들은 무지 때문에 이들을 아트만으로 착각하고 집착함으로써 괴로움을 겪는다.
자아에 대한 탐구에 있어 오장설과 더불어 주목할 만한 이론은 사위설(四位說)이다. 사위란 의식의 네 가지 상태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깨어서 활동하는 상태(覺醒位〕, 꿈꾸는 상태(夢眠位), 깊은 잠의 상태(熟眠位)를 반복한다. 그리고 앞에서 뒤로 갈수록 우리의 의식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제4위(第四位, turiya)인 희열(喜悅, anan-da)의 상태, 즉 아트만에 가까워진다. 각성위에서는 우리의 감각 기관이 외계 대상과 접촉하여 갖가지 인상을 획득하며, 시간 · 공간 · 인과율에 제약된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경험이므로 보편위(vaisvanaman라도 한다. 몽면위는 각성위 상태에서 얻은 잠재적 인상을 소재로 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상태이다. 이것은 감각 기관의 활동이 그치고, 마음(manas)만이 스스로의 빛으로 잠재적 인상을 인식하므로 광명위(tajina)라고도 한다. 숙면위는 인식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순수한 의식(cit)의 덩어리만 남아 있으므로 지혜위(prajia)라고 부른다. 이 상태는 주 · 객의 이원성이 사라진 제4위의 경험과 유사하나, 후자와 달리 무지를 본질로 하며 유한하고 제약적인 경험적 자아의 영역에 속한다. 이에 대해 제4위는 모든 조건과 한계를 벗어난 초월적 의식으로서, 볼 수도 표현할 수도 인식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불이(不二), 적정(寂靜, Santa)의 상태라고 한다. 이것이 곧 아트만이다. 이것을 앞의 세 가지 몸과 대비하면 각성 위는 조대신에, 몽면위는 미세신에, 숙면위는 원인신에 각각 대응한다. 조대신은 감각 기관이 활동하는 각성위에서 경험되는 것이고, 미세신은 감각 기관의 활동이 지멸된 상태에서도 작용하는 것이며, 원인신은 무지를 본질로 하는 숙면위와 상응된다. 이상의 3위, 3신의 바탕이 되는 순수 의식이 제4위, 즉 아트만이다.
〔범아일여〕 <우파니샤드> 혹은 베단타는 브라만과 아트만이 동일한 실재의 다른 표현이라고 가르친다. 즉 우주적 · 향외적 실재인 브라만은 초월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세계에 내재하며, 인간 내면의 영적 실재인 아트만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우파니샤드>는 범아일여의 실현을 통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파니샤드>의 궁극적 목적은 브라만=아트만의 자각(bodha)을 통해 죽음에서 불사로, 거짓(asat)에서 실재(sat)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을 윤회에 속박시키는 근원인 무지를 소멸시켜 주고, 해탈을 가능하게 하는 브라만=아트만의 자각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브라만=아트만은 인식 · 주관에 의해 파악되는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근저에서 주 · 객의 이원성을 통일하는 원리이다. 그것은 주 · 객의 대립을 전제로 하는 일상적 · 세속적 인식 방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으며, 오랜 명상 수행의 결과인 신비체험 속에서 드러날 수 있다. 이 신비 체험을 무분별 삼매(無分別三昧, nirvikalpaka-samadhi)라고 부른다. 그러나 범아일여의 체험을 초래하는 무분별 삼매도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천계서(天啓書, Srauta)라고 불리는 《베다》(여기서는 <우파니샤드>)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진리 중의 진리인 '범(梵)=아(我), 는 감각-개념적 인식을 통해서는 결코 알려질 수 없으며, 이슈와라에 의해 르시(Rsi, 聖仙)들에게 계시된 《베다》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 범아일여의 진리를 가르치는 문장을 '위대한 문장 (mahavakya)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음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순수 의식이 곧 브라만이다' (Prajianam Brahman), ② '내가 곧 브라만이다' (Aham Brahmasmi), ③ 그대가 곧 그것이다' (Tat-tvam-asi), ④ '이 아트만이 곧 브라만이다' (Ayamatma Brahma).
이상의 문장들은 모두 개체 의식〔我〕과 우주 의식(梵〕의 동일성을 가르치고 있으며, '분할 불가능한 단일 실재의 지시자 (akhandarth-bodhaka)이다. 다시 말해서 이 문장들은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불이(不二)의 의식인 브라만뿐임을 깨우치고자 의도한다. 유일한 실재인 브라만은 물질이나 물질에서 파생된 마음이 아니라 영적 실재인 순수 의식임을 시사하며, 동시에 일상적 인식으로 경험되는 다양한 현상계는 참다운 실재가 아닌 '일시적 나타남' (false appearance)임을 가르친다.
'범아일여' 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곧 브라만이다' 라고 함으로써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속박된 존재라는 그릇된 관념을 제거하고, 참 자아(아트만)는 독존적이고 무한 · 영원 · 청정하고 항상 자유로운 것임을 가르친다. 반대로 '브라만이 곧 아트만이다'라고 할 때는 궁극적 실재, 혹은 절대자는 고원하고 도달될 수 없으며 감추어진 존재라는 그릇된 생각을 제거하고, 그것이 우리 자신의 내면에 상존하며, 직접적으로 도달할 수 있으며, 언제나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존재임을 시사한다. 신은 저 멀리 인간 바깥에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 속에서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범아일여'사상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네 위대한 문장 가운데서도 특히 'Tat-tvam-asi' (그대가 곧 그것이다)는 대표적 문구로서 불이적 베단타 학파에서 성전 해석의 소재로 사용된다. 불이적 베단타 학파에 따르면 이 문장은 그것(tat)과 그대(tvam)의 동일성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문장을 문자적 · 일차적 의미에서 해석하면 tat' 와 'tvam' 의 동일성이 이루어질 수 없다. 먼저 'tat' 의 일차적 의미는 마야(maya), 그에 결부된 의식(즉 이슈와라), 어떠한 속성과도 결부되지 않은 순수 의식(즉 무속성 브라만), 세 가지를 모두 합한 것이며, 'tvam' 의 일차적 의미는 개체적 무지, 그에 결부된 의식, 순수 의식 (즉 아트만), 모두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tat' 는 순수 의식과 그 위에 부가된(superimposed) 현상계를 함께 뜻 하며, 'tvam' 은 참다운 나, 즉 아트만과 무지에 의해 그 위에 부가된 비본래적인 나, 즉 신체 · 생기 · 의식 · 마음을 모두 합한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일차적 의미에서는 'tat' 가 'tvam' 과 동일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장이 동일성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이차적 · 함의적 의미로써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tat' 의 이차적 의미는 'tat' 로부터 비본래적이고 부가적인 것을 배제한 순수 의식, 즉 무속성 브라만을 의미하며, 'tvam' 의 이차적 의미는 'tvam' 으로 부터 무지에 의해 부가된 것을 배제하고 남은 순수 의식, 즉 아트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tat' 와 'tvam' 으로부터 비본질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남은 동일한 순수 의식(caitanya)이 바로 동일성을 뜻하는 'Tat-tvam-asi' 의 의미이다.
이러한 범아일여의 실현에 대해서 불이적 베단타 학파는 세 가지 단계를 제시한다. 첫째는 진리를 깨달은 스승으로부터 경전에 대해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단계이고, 둘째는 진리를 다만 수동적으로 듣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반성함으로써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단계이다. 마지막은 브라만과 개아의 동일성에 대해 오랜 시간 깊이 명상함으로써 진리를 영적으로 체험하여 삶 가운데 구현시키는 단계이다. 명상을 통해 찾아오는 무분별 삼매와 더불어 차별적인 현상계는 사라지고 무지의 베일 너머로 '범=아' 의 단일한 실재만이 빛난다. 이 범아일여의 실현을 통해, 살아 있으면서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생해탈(jivan mukta)이 성취된다.
실재는 궁극적으로 단일하며, 그것은 감각-개념적 인식이 아닌 주 · 객의 이원성을 넘어선 직관 속에서 직접 체험된다는 범아일여 사상은 힌두 신비주의를 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 브라만 ; 아트만 ; → 힌두교 ; 윤회)
※ 참고문헌 Radhakrishinan, The Principle Upanis. ads, Lo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68/ Swami Satprakashananda, Methods of Knowledge, Calcutta, Advaita Ashram, 1974/ 이지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