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소속 본당. 부산시 동구 범일1동 1375 소재. 경남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1890년에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원죄 없으신 잉태. 관할 구역은 동구 범일1 · 2 · 4~6동, 좌천1 · 3동, 진구 범천1 · 2 · 4동 일대. 절영도(絶影島)에 설립되었다가 1891년에 초량(草梁)으로 이전하였고, 1916년에 이를 다시 범일동으로 이전하면서 본당명을 '부산진' 으로 명명하였으며, 1966년 9월 18일부터 '범일' 본당으로 개칭하였다. 〔교 세〕 1891년 1,171명, 1909년 1,364명, 1916년 1,901명, 1925년 2,507명, 1936년 1,661명, 1944년 1,877명, 1958년 4,556명, 1965년 4,268명, 1973년 7,678명, 1980년 4,548명, 1986년 6,762명, 1991년 7,314명, 1995년 7 669명. 〔역대 신부〕 초대 조조(M. Jozeau, 趙得夏) 모이세(1890~1893. 4), 2대 우도(P. Oudot, 吳保祿) 바오로(1893. 4~1898. 4), 3대 타케(E. Taquet, 嚴宅基) 에밀(1898. 4~1899. 6), 4대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플로리아노(1899. 6~1900. 7), 5대 로(J. Rault, 盧若望) 요한(1900. 7~1902. 9), 6대 르 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루도비코(1902. 9~1909), 7대 줄리앙(M. Julien, 權裕良) 마리오(1909~1915. 10), 8대 페셀(P. Peschel, 白鶴老) 페네(1915. 10~1923. 5), 9대 서정도(徐廷道) 베르나르도(1923. 5~1924. 10), 10대 델랑드(L. Deslandes, 南大榮) 루도비코(1924. 10~1928. 5), 11대 뷜토(J. Bulteau, 吳弼道) 요셉(1928. 5~1938. 5), 12대 를뢰(P. Leleu, 盧) 베드로(1938. 5~1939. 5), 13대 베르트랑(J. Bertrand, 韓聖年) 율리오(1939. 5~1943. 2), 14대 서정길(徐正吉) 요한(1943. 2~1945. 12), 15대 정재석(鄭在石) 요셉(1945. 12~1952. 9) 16대 이성만(李性萬) 이냐시오(1952. 9~1954. 7), 17대 서정길(1954. 7~1955. 9), 18대 정재석(1955. 9~1957. 9) 19대 강영철(姜永哲) 프란치스코(1957. 9~1958. 5), 20대 유봉운(俞鳳雲) 야고보(1958. 5~10), 21대 팔다니(F. Faldani, 范德禮) 프란치스코(1958. 10~1961.2), 22대 장주민(張周民) 발타사르(1961.2~1964.5), 23대 이영식(李永植) 히지노(1964. 5~1965. 12), 24대 김경우(金慶佑) 알렉시오(1965. 12~1968. 1), 25대 이철희(李哲熙) 바오로(1968. 1~1971. 6), 26대 김성도(金成道) 모이세(1971. 6~1972. 12), 27대 박태산(朴泰山) 요아킴(1972. 12~ 1975. 1), 28대 제찬규(諸燦奎) 시메온(1975. 1~1979. 6), 29대 이철우(李喆雨) 바오로(1979. 6~1981. 2), 30대 장병룡(張丙龍) 요한(1981. 2~1988. 2), 31대 박문선(朴文善) 야고보(1988. 2~1996. 2), 32대 최영철(崔榮喆) 알로이시오(1996.2~현재).
〔전사 및 공소 시대〕 부산 지역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늦게 복음이 전파된 곳으로, 기록에는 1850년대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가 경남 남부 지역의 공소를 방문하던 길에 부산의 동래(東萊) 지방을 순회한 것으로 나타난다. 1861년경 이 지역에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당시 경남에서 가장 먼저 공소가 설립되었던 울주군 일대의 신자들이 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이곳 동래 지역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양업 신부의 뒤를 이어 이 지역을 순방한 선교사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였으며,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공주 진밭(사곡면 신영리)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도 한때 이 지역을 순방하였다.
한편 1868년에는 동래의 신자들이 일본인과 접촉한 일이 발각되어 같은 해 8월 초 이정식(李廷植, 요한)을 비롯한 이관복(李寬福, 프란치스코), 박 마리아, 이삼근(李三根, 베드로) 등 8명이 동래 포졸에게 체포되었고, 다음 달 중순에 동래 장대(將臺)에서 참수당함으로써 이 지역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그나마 형성되기 시작한 신앙 공동체는 자취를 감추고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본당 설립과 초기 현황〕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의 체결로 부산이 개항장으로 설정되고, 1886년 5월 30일에는 한불수호통상조약(韓佛修好通商條約)이 비준되자, 1885년 이래 경북 칠곡의 신나무골(枝川面蓮花里)에 정착하여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고 있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는 1888년에 부산 지역인 밤대와 절영도, 동래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또한 부산이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고 판단한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경남 일대를 관할하는 부산 본당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로베르 신부와 함께 신나무골에서 체류하고 있던 조조 신부를 1890년 초에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처음에 부산 시내에 터전을 마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해 여름 김보윤(金甫允, 로무알도) 회장을 비롯한 절영도의 조내기(潮落里, 지금의 青鶴洞) 공소 신자들이 본당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절영도에 정착하게 된 조조 신부는, 지금의 청학(靑鶴) 본당 수녀원 자리에 초가 한 채를 지어 임시 성당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섬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하여 전교 활동에 어려움이 따르자 조조 신부는 1890년 가을에 초량에 대지를 구입하고 이듬해 봄부터 소성당을 포함한 사제관 공사를 시작하여 7월경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당시 조조 신부는 경남 전체와 경북 동남부 일대의 울산, 언양, 양산, 기장, 동래, 거제, 고성, 진주, 삼가, 함안과 경북의 하양, 영천, 자인, 청도, 경주 등 35개의 공소를 관할하였으며, 영천과 소촌(召村, 진양군 문산면 蘇文里)에는 교리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제관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1893년 4월 전라도 배재〔梨峴〕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그의 후임인 우도 신부가 같은 해 8월 이를 완공하였다. 1896년 6월 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 신부를 보좌로 맞이한 우도 신부는 보다 수월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나, 2년 뒤인 1898년 4월에 황해도의 매화동(玫花洞)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3대 주임으로 부임한 타케 신부는 1899년 진주 · 하동 · 함안 · 고성 · 산청 등지에서 일어난 교우 칭탁(稱託)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도 경남 서부 지역의 교세가 확대되자 진주(晋州)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 냈다. 이에 따라 그는 초량 본당을 드망즈 신부에게 넘기고, 1899년 6월에 진주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성당 이전과 성장〕 부임 초에 성당 이전을 계획한 드망즈 신부는 신자들의 거주지에서 좀더 가까운 곳(초량3동 47번지, 현 초량 입구의 정발 장군 동상 근처)에 성당 부지를 매입한 후 공사를 시작하여 1899년 10월 말에 이전
하였으며, 신자수가 증가하고 있는 울산의 초정, 자과, 경주의 하먹, 못앞, 아실, 소야 등지에 6개의 공소를 설립하였다. 이어 부임한 5대 주임 로 신부는, 일본인들이 1895년에 우도 신부가 매입해 두었던 부지에서 임의대로 일본인들이 철도 공사를 시작함으로써 야기된 '철도부지(鐵道敷地) 사건' 으로 인해 재임기 내내 고초를 겪다가 콜레라에 감염되어 1902년 9월 13일에 사망하였다. 로 신부 후임으로 부임한 르 장드르 신부는 초량 성당의 위치가 장차 일본인들의 거류지에 속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 신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염려하여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성당 이전을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 후 한일합병(韓日合倂) 이듬해인 1911년 4월 8일에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부산 지역이 대구 대목구 관할이 되자, 7대 주임 줄리앙 신부는 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에게 본당 이전 문제를 다시 건의하여 1915년에 범일동으로의 이전을 허락받게 되었다. 이에 8대 페셀 신부는 1916년 1월 26일 범일동(지금의 성당과 데레사 여자고등학교 자리)을 성당 부지로 확정하고, 초량 성당의 대지를 매각한 후 5월 말에 목조 성당을 신축하여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아울러 그는 '천주 공교 협회' (天主公敎協會)를 창립하여 평신도 활동을 조직화하였으며, 50평의 목조 건물로 된 학사(學舍)를 건립하여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훗날 이 학교는 교리 학교와 야학을 겸한 학교로 변모하였다.
1924년에 부임한 10대 주임 델랑드 신부는 일련의 성당 개축 공사와 함께 이미 조직되어 있던 부인회와 천주공교 협회 등 여러 평신도 단체들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으며, 1926년 5월 30일에는 경주(慶州, 현 城東) 본당을, 그리고 이듬해 5월 9일에는 언양(彥陽) 본당을 분리하였다. 이어 11대 뷜토 신부는 1932년 1월 17일 천주공교 협회를 '부산 지방 재산 관리위원회' 로 개편하여 합리적인 재산 관리를 도모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31일에는 절영도의 조내기 공소가 청학(靑鶴) 준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그 동안 이용해 온 목조 성당이 너무 비좁고 협소하여 잦은 보수 공사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편이 따르자 1936년에 새 성당을 건립하고 9월 13일에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13대 주임 베르트랑 신부는 부산교구 설정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설립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그러다가 1945년 12월에 부임한 정재석 신부는 이듬해 2월 소화 보육원(小花保育院)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은 부산에서의 최초의 보육 사업이었다. 이 무렵에는 '소년 소녀회' 를 비롯하여 '청년회' 도 설립되었으며, 1948년 8월에는 대청동(大廳洞, 현 中央 주교좌) 본당이 분리되었다.
〔본당 분할과 변모〕 부산은 한국 전쟁으로 인하여 1950년 8월에 임시 수도가 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때 수도여자중고등학교(현 首都女子高等學校)가 부산진 성당 안에 가교사(假校舍)를 짓고 잠시 생활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 휴전이 되면서 환도하자 정재석 신부는 가교사를 보수하여 1954년 5월에 '데레사 여자중고등학교' 를 개교하였다. 한편 피난민의 급증으로 효율적인 사목이 시급히 요청되어 1951년 5월에 초량 본당을 분리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동래(東萊) 본당을 분할하였다. 그런 가운데 1952년에는 가톨릭 신우회를 창립하고 성당 신축 계획을 추진해 나갔으며, 1954년 11월 12일에는 동항(東港) 본당을 분할하였고, 2년 만인 1956년 12월 20일에는 수영(水營, 현 廣安) 본당을 분리하였다.
1954년 6월 18일에 '경남 감목 대리구 (慶南監牧代理區)가 설정됨과 동시에 초대 감목 대리로 임명된 서정길 신부는, 부산진 본당에 주재하면서 '경남 교구 설치 기성회' (慶南教區設置期成會)를 창립하여 교구 설립을 추진함으로써 1957년 1월 21일자로 부산 대목구가 설정되었다. 이러한 교구의 성장과 더불어 부산진 본당은 1958년 5월 29일에 구포(龜浦) 본당, 1960년 12월 11일에는 서면(西面) 본당, 이듬해 2월 23일에는 대연(大淵) 본당을 분리하였으며, 1962년 7월 17일에는 다시 수정(水晶) 본당을 분리하였다. 이처럼 교세 증가로 인해 1960년대 초까지 2년마다 본당을 분리해야 했던 부산진 본당은 그때마다 재정적인 곤란을 겪어 성당 신축은 계속 지연되었다. 그러다가 1964년 10월 12일에 현 소재지에서 성당 공사를 시작하여, 1년 만인 1965년 12월 말에 75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이후 28대 주임 제찬규 신부는 1975년 1월 29일 문현(門峴) 본당을 분리하였으며, 본당의 모든 조직을 개편하는 한편 1975년부터 1978년까지 7차례에 걸쳐 전교의 달 행사를 실시함으로써 본당의 면모를 쇄신하였다. 또 1981년 2월 30대 주임으로 부임한 장병룡 신부는 같은 해 4월 16일에 장차 유치원 및 수녀원을 건립할 부지를 매입하였고, 이어 1985년 9월 17일부터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2월 17일에 이를 완공하였다. 이후 부산진 본당은 매년 본당의 날 행사를 개최하고, 성가 경연 대회와 윷놀이 대회 등을 통해 신자들의 본당 활동 참여를 유도하고 친목을 도모해 왔다. 그 결과 1980년대 초에 잠시주춤했던 교세 증가율이 1980년대 중엽 이후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1997년 현재 8,000여 명에 이르게 됨으로써 다시 본당 분할을 계획하고 있다. (⇦ 부산진 본당 ; → 부산교구 ; 초량 본당 ; 절영도 본당)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中, p. 347/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 신문사, 1987/ 《신앙 전래 이백년사》, 천주교 언양 성당, 1993/ 天主教大邱大教區史 編纂委員會 편, 《교구사연대표》, 천주교 대구대교구, 1984/ ―, 《大邱本堂百年史》, 대건출판사, 1986/ 부산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教區三十年史》, 천주교 부산교구, 1990/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서울 敎區年報》 I , 천주교 명동 교회, 1984/ ―, 《서울 教區年報》 II , 천주교 명동 교회, 1984/ 천주교 명동 교회 편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I (1890~1895),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가톨릭사회》 2호, 부산교구 홍보국, 1989/ 《교회와 역사》 130호(1986. 4), 한국교회사연구소, pp. 2~3/ 《경향잡지》 838호(1936. 9), p. 567. 〔金成喜〕
범일 본당
凡一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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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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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5월 말에 신축한 목조 성당(왼쪽)과 1930년대의 장례 예절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