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리 본당

法院里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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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법원리 434 소재. 1963년 7월 4일 의정부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안드레아 김대건. 관할 구역은 파주시 법원읍, 파주읍, 광탄면. 〔교 세〕 1963년 100명, 1965년 840명, 1971년 1,250명, 1976년 1,052명, 1981년 1,312명, 1985년 1,638명, 1990년 1,221명, 1994년 1,140명, 1995년 1,176명, 1996년 1,261명. 〔역대 신부〕 초대 김병기(金炳基) 암브로시오(1963. 7~1965. 8), 2대 이석충(李錫忠) 요한(1965. 8~1968. 8), 3대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1968.8~10), 4대 서원택(徐元澤) 알베르토(1968. 10~1969. 1), 5대 송광섭(宋光燮) 베드로(1969. 3~1970. 6), 6대 박고빈(朴稿斌) 시메온(1970. 6~1971. 1), 7대 안경렬(安慶烈) 토마스 아퀴나스(1971. 1~1972. 1) , 8대 이종효(李宗孝) 글레멘스(1972.1~1975. 5), 9대 여형구(呂瑩九) 미카엘(1975. 5~1978. 3), 10대 김희선(金喜善) 요셉(1978. 3~1980. 5), 11대 박귀훈(朴貴勳) 요한(1980. 5~1981. 8), 12대 송순용(宋淳勇) 라자로(1981. 9~1984. 8), 13대 김인규(金仁圭) 마티아(1984. 8~1985. 4), 14대 김정진(金正鎮) 바오로(1985. 8~1990. 9), 15대 이재돈(李載敦) 세자 요한(1990. 9~1992. 10), 16대 이사응(李思應) 안토니오(1992. 10~1996. 10), 17대 정세덕(鄭世德) 아킬레오(1996. 10~현재).
〔공소 시대 및 본당 설립〕 법원리 일대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896년에 김근배, 김연배, 박 베드로 등이 갈곡리(葛谷里)로 이주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이 이곳에 형성한 신앙 공동체는 1904년에 개성 본당 소속의 갈곡리 공소로 설정되었는데, 당시 법원리 일대는 이 공소 관할이었다. 이후 갈곡리 공소는 1925년에 신암리 본당으로, 1934년에는 덕정리(현 의정부2동) 본당으로 이관되었다. 신자들은 1936년에 공소 강당을 마련하였으나 한국 전쟁 중인 1951년에 불타 버려, 1952년 7월에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53년 4월에 이를 완공하였다.
한편 갈곡리 공소 관할인 법원리 일대에서는 1955년부터 따로 공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3년 뒤인 1958년에 의정부 본당 관할의 법원리 공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별도의 공소 건물 없이 공소 회장 유후준(토마스)의 집에서 공소를 보다가 1959년에 본당 설립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여 우선 606평의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그 후 이강섭으로부터 202평의 대지를 희사받아 808평의 부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60년에는 이승주(시메온) 등 6명을 중심으로 성당 건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고, 현지 미군 부대의 자재를 지원받아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성당을 완공한 법원리 공소는 1963년 7월 4일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김병기 신부가 부임하였다.
〔성장과 변모〕 이후 2대 주임 이석충 신부가 재임할때까지 본당에는 이미 성당과 주요 부속 시설이 구비되었고 본당 회장단 등 기본 단체도 조직되었다. 즉 1966년에 성당의 담장 공사를 끝냈고, 그 해 6월에는 사제관 일부를 개조하였으며, 유치원도 설립하였다. 그리고 11월에는 인보 성체회 수녀들이 초대되고 이어 1967년 초에 시작된 성당의 내부 수리가 1968년 9월에 완료되었다. 이렇게 외적으로 성장해 가던 법원리 본당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이 기간에는 5명의 신부가 교체됨으로써 본당 사목이 안정될 수 없었고, 게다가 본당에 임명된 신부들이 서울에서 숙식하고 주일 미사만 본당에서 드렸기 때문에 법원리 본당은 공소나 다름이 없었다. 이후 1972~1980년 사이에는 본당 신부의 재임 기간이 다소 길어졌지만, 주일에만 본당에 와서 미사를 집전하는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므로 이 시기에도 적극적인 사목 활동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침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1대 주임 박귀훈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박귀훈 신부는 부임 직후, 대민 봉사의 일환으로 고려대학교 의과 대학 부속 병원 의료 팀의 협조를 얻어 무료 의료 사업을 실시함으로써 관내 주민 1,600여 명에게 무료 진료 혜택을 주었고, 1980년 6월에는 사목회와 평신도회를 구성하여 본당의 체계를 세워 나갔다. 또 14대 주임 김정진 신부는 1986년 9월에 사제관을 신축하면서 처음으로 본당에 상주하였고, 본당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는 협소한 성당을 신축하기로 결정한 뒤, 1989년 3월 11일 건평 366평에 강당을 포함한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성당 공사에 착공하여 1990년 5월 24일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15대 주임 이재돈 신부는 전임 신부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신자들의 신앙 생활 및 본당 활동을 중점적으로 지도하였는데, 1991년에는 대건회를 설립해 본당의 모든 행사를 주관하도록 하여 신자들의 단체 활동과 봉사 활동을 적극 권장하였다. 바로 이때가 본당의 단체 활동이 가장 활성화된 시기였다.
한편 1996년에 부임한 17대 주임 정세덕 신부는 교회의 역할을 지역 사회까지 확대시켜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사목 활동이 아니라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를 만들려고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97년 4월에 교육관(75평)을 건립하여 신자들에게 활동 공간을 마련해 주었고, 1997년 8월부터는 문화 센터를 개설하여 신자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문화 강좌를 실시해 오고 있다. 음악, 무용, 건강 교실, 미술, 아동반 등 다양한 강좌가 개설되어 있는 이 문화 강좌는 지역 주민에게 문화적인 혜택을 줌으로써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1997년 현재 법원리 본당 사목 관할 구역은 7개 구역 22개 반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평신도 단체로는 반장회, 대건회, 요셉회, 연령회, 성모회, 레지오 마리애 6개 쁘레시디움, 주일학교 교사회, 주일학교 자모회, 안나회, 복사단 등이 활동하고 있다. (→ 서울대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한국 천주교회 연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