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도 15세 Benedictus XV(1854~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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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15세 교황.

베네딕도 15세 교황.


교황(1914~1922). 본래 이름은 자코모 델라 키에사 (Giacomo Della Chiesa). 1854년 11월 21일 이탈리아 제 노바(Genova) 교구의 펠리(Pegli)에서 아버지 마르케세 주세페 델라 키에사(Marchese Giuseppe Della Chiesa) 후작 과 교황 인노첸시오 7세(1404~1406)를 배출한 가문의 후손인 어머니 조반나 밀리오라티(Giovanna Migliorati)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였으나 어려서부 터 향학열에 불타 사색과 내적 진리 탐구에 힘썼던 자코모는, 초등 교육은 가정 교사로부터 받았고, 중등 교육은 교구에서 운영하는 학교(Istituto Donavaro e Giusso)에서 교구 신부들로부터 받았다. 자코모는 주위 신부들의 영향 을 받아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길 희망하였으나 당시의 반성직주의(anticlericalism)적인 사회 경향을 두려워한 그의 아버지 때문에 제노바 왕립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곳에서 민법을 공부하여 1875년에 논문 <법 해석>(The Interpretation of Laws)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로마에 있는 카프라니카 기숙 신학원(Collegio Capranica)에 입학하여 사제가 되기 위한 영성 지도와 생활 지도를 받으면서 그레고리오 대학 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3년 후인 1878년 12월 21 일에는 라테란 대성전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1879년 에는 신학 박사 학위, 1880년에는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람폴라(Mariano Rampolla) 대주교는 가톨릭 교회 의 외교관 성직자들을 훈련시키는 '교황청 귀족 학원' (Pontificia Accademia dei Nobili Eccclesiastici)을 책임 맡고 있었는데, 자코모는 이곳에서 외교 양식 연구 분과장에 임명되어 일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우정 은 날로 깊어져, 1882년에 람폴라 대주교가 스페인 교 황 대사로 임명되자 자코모에게 자신의 비서로 수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스페인에는 유행성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었는데 람폴라 교황 대사와 자코모는 환자들을 위한 구호 기관을 설립하고 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1887년에는 람폴라 교황 대사가 추기경으로 서임됨과 동시에 교황청 국무원 장관으로 임명되어 로마로 소환되 자, 자코모는 국무원에서 중요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1901년 부국무원장으로 임명된 자코모는 탁월한 지성과 국제 외교를 통한 다양한 경험으로 귀족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성격으로 교황청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명해졌을 뿐만 아니라 부국무원장의 직책을 통해 많은 주교들과 세계 저명 인사와도 접촉을 갖게 되었다. 1903년 메리 델 발(R. Merry del Val, 1865~1930)이 람폴 라 추기경의 후임으로 국무원 장관으로 임명된 후에도 그는 계속 부국무원장으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그는 1903년부터 1907년까지 당시의 교회에 위협을 주던 근대주의(modernism)에 대항하여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 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교황 비오 10세(1903~ 1914)는 그를 가리켜 "근대주의에 대항해 싸우는 오른 팔"이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는 1907년에 교황 비오 10 세에 의해 볼로냐(Bologna)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그 해 12월 22일 시스티나 성당에서 주교 서품을 받았 다. 당시 볼로냐는 사회주의 선동가들로 인해 혼란스러 운 상태였기에, 전임 대주교인 스밤파(Svampa)의 느슨하 고 겉치레적인 행정에 실망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새로운 인상을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선천적인 친절과 열성적인 사목 활동은 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하였다. 볼로냐의 새 대주교로 취임한 그는 4 년 동안 교구의 모든 본당은 물론 작은 경당과 산골 마을까지도 방문하여 사람들을 만나고 격려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노력이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1914년에는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자코모가 추기경으로 서임된 지 3개월도 채 안된 8월 20일 비오 10세 교황은 사망하였고, 이어 열린 교황 선거에서 그는 신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으로서의 활동〕 1914년 9월 6일 시스티나 성당 에서, 그 당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상황을 고려하 여 아주 검소한 규모로 착좌식을 가졌으며, 교황명으로 베네딕도 15세를 택하였다. 특별히 이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볼로냐 교구 출신인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 1758)에게 경의를 표하고, 더욱이 자신처럼 그가 교회법 에 정통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베네딕도 15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폐허와 혼란 속에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엄격한 중립 정책을 추구하면서 각 교전국에 평화 협정 체결을 요청하고 "전쟁이란 아무 쓸데없는 대학살"이라고 정의하였다. 1917년에 그는 공정한 평화 협정을 위해 여러 조항을 제안하였는데 ① 무력에 의하지 않는, 권리에 의한 평화 수립, ② 군비 축소, ③ 강제력에 의한 분쟁 조정 방지, ④ 해양의 자유, ⑤ 배상금 제도 철폐, ⑥ 점령 지역 회복, ⑦ 영토권에 대한 우호적인 검토 등이다. 이 평화안에 대해 각국의 태도는 정중하였지만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고,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만이 상세하게 답을 보내 왔을 뿐이다. 그는 재위 초부터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가지고 평화의 중개자로서 구체적인 활동을 하였지 만, 결국 평화를 위한 교황의 이 안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1917년 말에는, 지금 이 시기는 우리가 더욱더 우리의 생을 사랑해야 할 때라고 말하면서 인류에 대한 사랑과 평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교황은 투쟁적이고 극단적인 비인간화를 없애기 위해 전쟁 포로와 그 가족들의 상봉을 위한 국제 사무소를 바티칸 내에 설치하였으며, 전쟁의 희생물이 된 이들, 행 방 불명된 군인들을 찾는 일과 부상병 · 포로들의 상환, 망명자 그리고 배고픈 아이들을 돌보는 등 전쟁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베네딕도 15세 교황은 대외적인 정치 문제뿐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12개의 회칙을 발표 하였는데, 그중 1914년 11월 1일에 발표된 최초의 회칙 <앗 베아티시미 아포스톨로룸>(Ad beatissimi Apostolorum) 은 1920년 5월 23일에 발표된 회칙 <파셈 데이 풀케리 움>(Pacem Dei Pulcherrium)과 함께, 하느님의 평화는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이며, 따라서 국가간에, 사회 계급간에 교회 안에서 평화를 위해 모든 인류가 한 형제로 돌아와 형제애를 복구할 것을 호소했다. 또한 1917년 5월 1일 에 '동방 교회성' (Sacrae Congregatione pro Ecclesia Orientali) 을 설립함으로써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의 상호 이 해를 위한 노력이 촉진되었고, 같은 해 10월 15일 자의 교서 <오리엔티스 가톨리치>(Orientis catholici)를 통해 동방 교회에 관해 공부할 수 있는 교황청 동방 교회 신학원 (Istituto Orientale)을 로마에 설립하였다. 이로써 서방과 동방으로 갈라진 교회의 일치를 촉진시키는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작되어 가스파리(P. Gasparri, 1852~1934) 추기경의 주도로 이루어진 교회법전 이 1916년 12월 14일 마무리되었는데, 베네딕도 15세 는 비오 10세의 교황청 개편 지침을 약간 수정하여 법전 에 수록(242~264조, 1598~1605조)하였다. 이 법전은 1917년 5월 27일 사도 헌장 <프로비덴티시마 마테르 엑클레시아>(Providentissima Mater Ecclesia)로 공포되어 이듬해 5월 19일부터 발효되었다. 1919년 11월 30일에 는 선교사들을 위한 지적이며 영적인 준비를 위해 회칙 <막시뭄 일룻>(Maximum Illud)을 발표하였는데, 교황은 이 회칙에서 가톨릭 교회는 어느 민족이나 어느 국민에 게도 낯선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와 복음의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는 민족에 대한 일체의 차이를 초월하므로 그리스도와 교회는 어느 누구에게나 또 어디서나 이방의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선교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현지인을 성직자로 양성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시하였다. 베네딕도 15세 교황은 성 예로니모의 사망 1,500주년을 기념하여 1920년 9월 15일에 회칙 <스피리투스 파라클리투스>(Spiritus Paraclitus)를 발표하였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성 예로니모의 생애에 대해 언급한 다음 성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성서의 절대적 진리성을 단언하였다.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으로 인간에 의해 기록된 것이며, 하느님이 이 책의 주저자이며, 신자들에게 성서의 내용인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신앙 생활에 있어서 성서의 중요성을 알게 하고 또 더욱더 성서를 공부하라고 권고하였다. 베네딕도 15세 교황은 이외에도 프랑스와의 국교 회복에 힘썼으며, 17세기 이후 처음으로 영국의 대표가 신임장을 받고 교황청에 파견되었고,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조정을 시작하도록 하여 그의 후계자인 비오 11세 교황 재임시인 1929년에 정교 협약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재위 기간 중에는 교황청 주재 외교 사절의 수가 14개 국에서 26개 국으로 증가하는 등 선교 지역이 확대되었다. 감기가 악화된 폐렴으로 재위 7년 4개월 만인 1922년 1월 22일 로마에서 사망하여 베드로 대성전의 지하 무덤에 묻혔다. 인류 평화를 위해 전생애를 바친 베네딕도 15세 교황의 고귀한 정신은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까지 전달되어 이스탄불의 보스포로(Bosforo) 강기슭에 교황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졌다. 〔평 가〕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당시의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평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평화를 위한 그의 정치적 중립 노선은 간혹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였지만, 선천적인 직관력과 지성 그리고 타고난 친절함, 관대함, 섬세함 등으로 소신껏 행동하였다. 그는 업무상 엄격하였고 이탈리아인 특유의 시간 관념에 대해 철저하였지만, 인간의 행복이나 고통에는 특별한 애정을 지녔었다. (→ 교회법 ; 동방 교회) ※ 참고문헌  G. Rumi(cura), Beneditto XV e la Pcae-1918, Brescia, Morcelliana, 1990/ M.C. Carlen, Dictionary of Papal Pronouncements : Leo XIII to Pius XII, 1878~1957, New York, 1958/ H.E.G. Rope, Benedict XV : The Pope of Peace, London, 1940/ F. Vistalli, Benedetto XV , Roma, 1928/ A. De Waal, Der neue Papst : Unser heiliger Vater Benedikt XV, Hamm, 1910/ F. Piffl, The Conclaves of Benedict XV and Pius XI, Talbet 217, London, pp. 1004~1006, 1028~1029, 1059~1061/ A. Vaccari, 24 anni dopo I'Ecicl , 《Civ. Catt》 4, 1918, pp. 371~375 ; 1, 1919, pp. 278~290, 264~272/ F. Valente, S. Gerolamo e I'Encicl., S.P., 1921/ J.M. Voste, De Scripturarum veritate juxta recentiora Ecclesiae documenta, 1924/ H. Le Flock, La politique de Benoît XV, 1920/ M.C. Carlen, A Guide to the Encyclicals of the Roman Pontiffs from Leo XIII to the Present Day, 1878~1937, 1939/ F. Hayward, Un Pape méconnu : Benoît XV, 1955/ W.H. Peters, The Life of Benedict XV, 1959/ 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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