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도회

〔라〕Ordo St. Benedicti, Benedictini · 〔영〕OrderofSt. Benedict (O.S.B.), Benedictines

글자 크기
5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역사는 수비아코(왼쪽)와 몬테 카시노 등지에 수도원이 설립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 / 18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역사는 수비아코(왼쪽)와 몬테 카시노 등지에 수도원이 설립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성 베네딕도(St. Benedictus, 480~547)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남녀 수도회들의 연합(聯合)으로 가톨릭 교회 수도승 수도회(monastic order) 중의 하나. 한국에서는 과거에 한문 표기에 따라 분도회(芬道會)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베네딕도회는 수도원(monastry)들)들의 연합 형태인 여러 연합회들(congegations)로 이루어져 있고, 각 연합회들은 하나의 베네딕도회 총연합(confederation)을 이루고 있다. 비록 각 수도원이 연합의 형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어떤 수도원이 같은 연합회에 속한 다른 수도원에 대해, 또는 어떤 연합회가 다른 연합회에 대해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은 서로 종속 관계에 있지 않고 각자 독자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자치 수도원들이기 때문이다.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Congregation Ottiliensis Ordinis Sancti Benedicti)와 같이 보통 베네딕도회 다음에 연합회의 이름을 표시함으로써 전세계에 산재해 있는 베네딕도회를 구별한다. 한편 베네딕도회 총연합을 대표하는 수석 아빠스(Abbas primas) 가 있고, 각 연합회마다 그 연합회를 대표하는 연합회 총재(praeses) 혹은 총 아빠스(archiabbas)가 있다. 〔창립과 발전〕 베네딕도회는 근세 이후에 설립된 수도 회들과는 달리 어떤 특정한 사도직 활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일정한 장소에 정주(定住)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을 찾는 삶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때로는 지역 교회의 필요성에 따라 교육, 학문, 선교 활동 등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경우에도 반드시 아빠스좌 수도원(abbey, abbatia)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부득이 공동체 를 이탈하여 혼자 생활하면서 활동해야 할 때에는 일시적 또는 임시적으로만 활동하게 되어 있다.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학교 운영이나 신학 · 철학 · 과학 등의 학문 연구 및 예술 활동 등에 있어서의 문화 활동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베네덕도회 초기(6~9세기) :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역 사는 6세기 초 베네딕도 성인이 이탈리아의 수비아코 (Subiaco)와 몬테 카시노(Monte Caasino) 등지에 수도원을 설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577년경 몬테 카시노 수도원은 롬바르드(Lombards)족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수도승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그중 일부는 《베네 덕도 규칙서》 원본을 가지고 로마에 가서 정착하였다. 그 후 596년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이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노를 위시한 40명의 베네딕도회 수도 승들을 영국에 선교사로 파견함으로써 영국 내에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이 설립되었고, 8세기에는 영국에서 성 보 니파시오(680~755)와 그의 동료 수도승들이 독일 지역으 로 파견됨으로써 유럽 전역에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이 확산될 수 있었다. 《베네딕도 규칙서》는 그 옹호자들 특히 카알 대제(768~814)에 의해서 빠른 시간 내에 광범위 한 지역에 보급되었는데, 이 규칙서는 이후 12세기까지 서방 교회 대부분의 수도원에서 지켜졌고, 그 후에도 서 방 교회 수도 생활의 기초가 되었다. 한편 이 규칙서의 급속한 전파로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은 널리 확산되었지 만, 동시에 세속화로 인해 수도 정신은 약화되고 수도 생 활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8세기 말에 이르러 아니안의 베네딕도(Benedictus of Aniane, 756~821)에 의 하여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된 개혁 운동으로 세속화로 약화된 수도 정신이 앙양되었다. 그는 루이 황제(Louis, +840)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순수한 수도 생활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821년 아니안의 베네딕 도의 사망과 야만족의 침입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10세기 초엽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은 더 이상 번창하지 못하였다. 중세 후반의 베네덕도회 황금 시기 : 10세기경 베네딕 도회 수도 생활에 부흥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먼저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을 비롯한 교회 내의 개혁 운동으로 수도 생활은 전례 없던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오도 (Odo), 마을로(Majolus), 오딜로(О㏈), 후고(Hugo), 베 드로(Petrus) 아빠스들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클뤼니 개혁 의 특징은 외부의 간섭과 압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는 것과 가대 의무(歌臺義務, 성무 일도 또는 하느님의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는 데 있다. 클뤼니는 또한 최초의 베네딕도 ''회' (order)를 만들었는데, 클 뤼니의 새로운 생활을 받아들인 기존 수도원들과 새로 창설된 수도원들이 클뤼니 수도원과 밀접하게 연결됨에 따라 성 클뤼니 수도회(Sacer Ordo Cluniacensis)가 생겨났다. 완전히 중앙 집권적 조직을 갖춘 이 클뤼니 수도회는 18세기 말까지 존재하였다. 중세적 사회 질서의 붕괴와 함께 베네딕도회는 새로운 개혁의 요구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012 년경 성 로무알도(St. Romualdus, 950~1027)에 의해 카말 돌리회(Camaldolese)가 창설되었다. 그는 수비아코에서 3 년 동안 은수 생활을 하였던 성 베네딕도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였는데,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지방에는 이러한 이상을 가진 은수자 그룹들이 번성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은수자 그룹들은 소위 아빠스좌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수도승 공동체 생활로 점차 전향해 갔다. 발롬브로사회 (Vallombrosa)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실베스테르회(Sylvestrines), 철레스틴회(Celestines), 올리베토회(Olivetans) 등도 이와 유사한 기원을 갖는다. 또 1098년에는 성 로베 르토(St. Robertus, 1027?~1111)에 의해 시토회(Cistercians 가 창설되었다. 시토회는 《베네딕도 규칙서》의 정신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하였다. 시토회 는 클뤼니와는 달리 아니안의 베네딕도의 이상들과 역사 적 발전을 거부하였고, 은수 생활을 이상으로 한 카말돌 리회와는 대조적으로 《베네딕도 규칙서》에 따라 수도 생활의 공동체적 형태에 머물렀다. 1664년에는 시토회로 부터 다시 개혁 시토회인 엄률 시토회(트라피스트회)가 출현하였다. 시토회는 베네딕도회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제도와 연합회를 이룬다. 이처럼 중세 베네딕도회 개혁 운동은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진행되었으나, 이 모든 개혁 운동의 공통점은 순수한 수도 생활을 하고자 분투하였다는 것과,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수도 생활의 자유를 위해 노력하였다는 것, 그리고 기도와 고 행이라는 본래의 소명으로 되돌아가려 하였다는 점이다. 아무튼 모든 이들이 베네딕도 성인에게 매력을 느껴 그의 정신을 따르는 베네딕도회 회원들(Benedictimes)이 되기를 원하였다. 중세기의 쇠퇴와 종교 개혁 시대 : 중세 말엽 정치 · 종교 · 사회적인 혼란으로 말미암아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은 또다시 쇠퇴의 징조를 보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여러 곳에 있는 수도원들이 일정한 지역에 따라 여러 그룹 들 또는 연합회들로 결합하였고, 종교 개혁 직전에는 독립 수도원들을 결합시키는 연합회에 대한 필요성이 광범 위하게 요청되었다. 왜냐하면 각 수도원들이 이러한 연합을 통하여 외부의 위험과 내부의 붕괴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5~16세기부터 이탈리아에서 새롭게 정비된 베네딕도회가 다시 유럽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베네딕도회 정신도 새로이 앙양되었지만, 종교 개혁으로 인해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은 큰 타격을 받았고 16세기 말엽 베네딕도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도 결코 밝지 못하였다. 17~18세기의 새로운 생활과 위험들 :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제25차 회의에서는 수도 생활의 부흥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졌다. 공의회는 그때까지 어떠한 연합회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베네딕도회 공동체들에게 연 합회들에 소속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이에 여러 연합회 들이 생겨났고, 17세기 중엽부터는 별개의 독립된 수도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17세기는 여러 형태의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이 활발히 전개되고 새로이 발전되는 시기였던 반면에, 18세기에 들어와서는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등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받았다. 프랑스에 있는 모든 수도원들은 거의 파괴되었고, 그 후 독일에서도 소위 국유화(수도원들에 대한 억압)로 말미암아 종교 개 혁의 위기를 모면한 모든 수도원들이 멸절되었다.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스위스에서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19세 기 중반의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오늘날의 발전 : 19세기 중엽부터 수도 생활은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흥 운동은 루드비히 1세(Ludwig I , 1825~1848)가 메튼(Metten) 수도원을 복구하였던 바 이에른(Bayen)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도움으로 다른 수도원들도 다시 소생하였고, 1846년에는 메튼 수도 원의 수도승 원머(Bonifatius Wimmer)에 의해 북아메리카에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이 전해졌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도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이 부흥하였고, 프랑스의 솔렘(Solesmes) 연합회와 독일의 보이론(Beuron) 연합회와 같은 여러 베네딕도회 연합회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교육과 영혼들을 돌보는 많은 외적인 활동을 채택한 새로운 수도 생활의 형태가 베네딕도회 내에서 시작되었다. 또 1909년 한국에 진출한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Ottiliani)도 외방 선교를 목적으 로 독일에서 창립되었다. 19세기 말까지 베네딕도회 연 합회들은 그들간에 교회법상 어떠한 동맹도 맺고 있지 않았다. 이에 교황 레오 13세는 베네딕도회 연합회들간 의 결합을 요청하였으며, 1893년에는 여러 연합회 아빠 스들의 토의 결과 각 연합회들은 하나의 베네딕도회 총 연합으로 결합되었고 수석 아빠스 제도도 생겨났다. 베네덕도회 수녀 공동체 : 《베네딕도 규칙서》는 수녀들에 의해서도 준수되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독일, 스위스 등에는 베네딕도회 수녀 공동체들이 항상 존 재하여 왔다. 몇몇 수녀회들은 봉쇄 생활과 더불어 어느 정도의 외적 활동(특히 소녀들의 교육)에도 참여하였다. 이 오래된 베네딕도 수녀회들의 역사는 대부분 아직도 어두 움에 가려져 있다. 중세기 후반의 베네딕도 개혁 수도회 들은 처음에 그들의 이상을 따르는 여자 공동체들의 창설을 꺼려 하였지만 이러한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따라서 클뤼니, 카말돌리, 시토 수녀회들이 설립되었는데, 그들은 특별한 봉쇄 밖 활동을 배척함으로써 이전 시대의 여자 공동체들과는 달랐다. 동시에 어떤 수도회에도 속하지 않은 많은 수녀회들이 설립되었다. 물론 카 말돌리 수녀회들은 남자 은수자 그룹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은수자적 이상을 실현할 수는 없었지만 처음부터 공동체 생활에 어떤 제한들이 있었다. 중세 후반의 이러한 여자 공동체들의 삶은 풍부하고 진정한 기도 생활이었고, 회원들은 흔히 귀족 출신이거나 또는 적어도 충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종교적 저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여러 형태의 베네딕도 수녀회들은 종교 개혁을 크게 겪었고, 트리엔트 공의회를 계기로 특히 봉쇄에 관한 규정이 보다 더 엄격하게 제정됨으로써 교육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점점 기도와 노동이라는 봉 쇄 생활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에 '봉쇄' 수녀회에 속하게 되었다. 18세기 말 이후 이러한 여자 수도승 수녀회들처럼 《베네딕도 규칙서》를 따르기는 하지 만 봉쇄가 보다 덜 엄격한 수녀회들이 여러 곳에서 설립 되었는데, 독일의 리오바 수녀회(Lioba Sisters), 스위스 캄(cham)에 있는 성 십자가 수녀회, 스위스의 리켄바흐 (Rickenbach)와 멜크탈(Melchctal) 수녀회 등이었다. 〔영 성〕 수도승 영성 : 가톨릭 교회 안에서 수도승들 (monks)을 다른 수도자들(religious)과 구별하는 것은 수 도원 제도나 규율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일반 적인 형태의 수도 생활 안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도승적 실존은 이차적인 목적을 갖지 않는 수도 생활의 한 형태라는 사실이다. 전통은 단지 고행과 기도 의 생활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이상인 '하느님을 찾는 것' , 또는 '하느님만을 위해 생활하는 것' 외에 수 도승 생활에 다른 어떤 목적도 부여하지 않는다. 전통적 인 수도승 생활(monastic life)이 '하느님을 찾는 삶' , 또는 '하느님만을 위한 삶'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어떤 특정한 사도직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수 도 생활(religious life)과 엄밀히 구분된다. 이러한 수도승 소명은 먼저 '세상으로부터의 떠남' 을 통해 근본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세상으로부터 떠날 때 비로소 하 느님께 대한 전적인 투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수 도승들은 그 정의상(定義上) '홀로 사는 자들' (solitari)이 다. 이것이 수도승이란 단어의 본래 의미이다. 이는 라틴어 '홀로' (solus)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형용사 '모노스' (μόνος)에 어원을 두고 있는 ‘모나코스’ (μόναχος)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의 떠남' 은 수도승 영성 의 첫 번째 특징을 이룬다. 수도승 영성의 두 번째 특징 은 기도에 우선권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기도는 하느님과 일치하고 늘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으로서 초기 수도승들의 전 삶의 중심이었고, 그들이 생계 를 위하여 하던 노동도 기도의 연장이었다. 본래 수도승 생활 안에서 공동 기도는 수도승 생활의 현저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단지 영혼이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도와 주는 규율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래 수 도승 생활 안에서 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에는 수도승 영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간주된다. 수도승 영성의 세 번째 특징은 고행에 있다. 수도승들이 고행을 하는 이유는 육신과 세상을 거부하는 그리스의 이원론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 과의 일치를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육신의 무질서하고 헛된 욕망들에 대한 자 기 통제나 자기 절제 없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기는 힘들다. 수도승 생활 안에서 고행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 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으므로 결국 수도승 생활은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으로 세 상을 떠나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생활이다. 그래서 '세상으 로부터의 떠남' , '기도의 우월성' , 그리고 '고행' 은 수도 승 영성의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된다. 베네덕도회 영성 : 베네딕도회의 영성은 수도승 영성 에 바탕을 두는데, 그 이유는 베네딕도는 수도승 영성의 대변자이기 때문이다. 베네딕도회의 생활 역시 하느님을 찾는 삶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수도승 생활 전통에 있다. 따라서 베네딕도회 회원들을 일반적인 의미의 수도자(regious)와 구분하여 수도승(monk이라고 부른다. 비록 수도승이라는 말이 원래 '결혼하지 않은 자 또는 홀 로 사는 사람' 이란 의미에서 은둔 수도자(隱遁修道者 anchorite) 혹은 은거 수도자(隱居修道者, hermit)를 지칭하였다 할지라도 점차 그 의미와 내용이 발전되면서 후에는 공생 수도자(共生修道者, cenobite)까지 모두 포괄 하는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베네딕도회 생활은 세상을 떠나 홀로 하느님을 찾는 은둔 수도 생활(anchonitic life)이나 은거 수도 생활(eremitic life)이 아닌, 한 수도원 안에서 아빠스와 규칙 아래 함께 하느님을 찾는 공생 수도 생활(cenobitic life)로서 사도 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을 이상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네딕도회 영성은 일차적으로 '공동 체적 영성' 이다. 베네딕도는 '하느님을 찾는 일' 을 특별히 강조하였는데, 그는 수련자가 하느님을 찾는지의 여부를 성소 분별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찾는가? 베네딕도는 그리스도를 하느 님을 찾는 삶의 모범으로 제시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느 님을 찾는 길을 자신의 전 삶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베네딕도는 아무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고 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놓고 있다(규칙 4, 21 : 72, 11). 베네딕도회 수도승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 서의 삶이며, 그분을 따르는 삶이다. 수도승은 그리스도 의 삶과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나 아간다. 그리스도가 보여 준 삶은 철저한 자아 포기의 삶으로서 강생에서부터 십자가 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분 의 전 삶이 이를 입증해 준다. 자아 포기는 《베네딕도 규칙서》 전체에 짙게 배어 있다. 베네딕도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어 버려라"(규 4, 10)라고 한다. 따라서 베네딕도회 영성은 또한 '자아 포기의 영성'이다. 베네딕도회 수도승 생활에서 이러한 자아 포기는 '정주' (定住, stabilitas)와 '수도승답게 생활할 것' (conversatio morum)과 '순명' (順命, oboedientia) 서원(규칙 58, 17)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베네딕도회 수도승은 이 세 가지 서원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 일에 자신의 전 삶을 투신한다. 이 서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 나는 수도승답게 생활하겠다는 서원으로서, 이는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수도승 생활적인 것들로 자신의 전 삶과 모든 태도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의미한다. 수도승은 수도승다운 생활로 세속적인 야심 · 안락 · 쾌락 · 재물 · 육 적인 욕망들을 겸손 · 정결 · 가난 · 포기 등으로 대체하 고, 끊임없는 기도와 형제적인 봉사로 하느님을 찾는 일 에 진력하여야 한다. 순명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장상이나 다른 사람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기 뜻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정주는 이곳저곳을 여행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며 또한 죽을 때까지 자신을 한 수도원에 묶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도승답게 생활하겠다는 서원 안에 가난과 정결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규칙서 안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수도 규율에 있어 본질적인 부분을 이룬다. 또한 베네딕도회 수도승 생활을 이루고 있는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는 기도(oratio), 노동(labor), 성서 독서(lectio divina)이다. 따라서 베네딕도회 수도승 생활은 결국 기도와 노동 그리고 성서 독서로 이루어지는 매일의 단순한 삶 안에서 서원을 통해 구체화되는 자아 포기의 부단한 실천으로 하느님을 찾는 생활이다. 〔연합회들〕 베네딕도회 총연합은 모두 21개의 연합회 (congregation) 소속의 연합회 밖(extra congregationes)의 6 개의 수도원(monastena)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연합회들 의 설립 연도와 소속 수도원수, 그리고 회원수는 위의 표와 같다. 여자 베네딕도회에는 전세계 284개의 수도승 수녀원 (monasteria) 소속의 수녀들(moniales) 6,248명과, 37개 의 연합회(congregatio, foederatio, unio)와 5개의 단독 수녀원(monasteria singula) 소속의 수녀들(sorores) 10,570명이 있다.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성 베네딕도회 오틸 리엔 연합회는 보이론 연합회의 베네딕도회 회원이었던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에 의해 1884년에 창설되었다. 암라인 신부는 베네딕도회적 소명에 선교 소명을 결합시켰는데, 이는 베네딕도회 영성을 바탕으로 할 때 보다 효과적인 선교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베네딕도회적 소명과 선교적 소명이 결합된 것이 바로 이 연합회의 특성이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 (intus monachus, foris apostolus)라는 이상을 표방하는 이 연합회는 이러한 창설의 기본 정신에 따라 다른 선교회처 럼 일정한 지역을 맡아서 교구와 본당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교구 내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 운영 및 예술 활동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돕는 데 있었다. 창설 즉시 진출한 동아프리카(현재 탄자니아)에서는 신부들이 교구 중심의 선교 활동을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교육 사업을 통한 기본적인 선교 방침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이 연합회는 1995년 현재 전체 회원이 1,086명이 될 정도로 베네딕도회 연합회들 중에서는 세 번째로 큰 연합회이다. 한국 진출과 역사 개관 :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한국 진출은 당시의 조선교구장인 뮈텔(Mutel, 閔德 孝)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1909년 2월에 사우어 (Bonifatius Sauer, 辛) 신부 등 2명의 수도 신부가 내한하여 서울 백동(柏洞, 현 혜화동)에서 활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함경남도 덕원(德源)을 거쳐 경상북도 왜관 (倭館)에 정착할 때까지 많은 어려움과 수난을 당하였다. ①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1909~1927) : 사범 학교 설립과 운영을 위해 뮈텔 주교가 초청한 베네딕도 수도회는 서울에 도착한 후 백동의 낙산(駱山) 아래 10헥타르(약 3만 평)의 땅을 매입하고 수도원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여, 1911년에 3층 벽돌로 된 거대한 수도원을 완공하였다. 이미 1909년 말 정식 수도원(pioratus)으로 승격되었고, 1913년에는 아빠스좌 수도원(Abbaia)으로 승격하였다. 1910년에는 내한 목적대로 숭공학교(崇工學 校)를 세워 실업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에는 숭 신학교(崇信學校)를 세워 사범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인 사범 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에 승신학교를 폐교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서도 직업 교육을 실시하여 목공 · 철공 ·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기능공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이 수도회는 수도 생활뿐 아니라 본당 사목을 맡고자 하였으나, 당시 프랑 스 선교사들의 반대로 이를 서울에서 실현시키지 못하고 함경남북도와 간도(間島) 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元 山敎區)가 설정되면서 이 지역의 선교를 위촉받았다. 그 래서 원산교구가 설정되던 1920년부터 서울에서 철수하 기 시작하여 승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에는 서울의 수도원도 함경남도 덕원(德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②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1927~1949) : 성 베네딕도 회 오틸리엔 연합회는 아프리카 선교지가 붕괴된 뒤 자연 한국 선교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0년 8월 5일 교황청에서는 한국의 원산교구 위임을 허락하고 1921년 5월 1일 사우어 신부를 주교로 성성하였다. 교구 사목은 본래 이 회의 선교 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서울의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이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2년 원산교구 통계에 의하면, 관할 내에 독일인 신부 14명, 수사 12명(3명은 한국인)뿐이었고, 전 교구 신자는 7,500여 명이었으며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인수받은 본당은 5개인데 원산(元山) 본당과 내평(內坪) 본당은 북한 지역에 있었고 간도 지방에는 삼원봉(三元 峰), 용정(龍井), 팔도구(八道溝) 본당이 있었다. 1926 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덕원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고 같은 해 11월부터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27~1928년에는 덕원 신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리하 여 덕원 수도원은 원산 선교지에 있어서 수도 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 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서의 본당 사목 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담당하였다. 이 에 투칭(Tutaing)의 포교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1925 년 11월 원산에 파견되어 본당 사목 활동 등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빈민 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인 해성 학교(海星學校) 유치원, 시약소 등을 개설하여 활동하 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40년 덕원 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본당 12개와 공소 89개, 신자 11,004명, 신부 34명(베네 딕도회 회원 29, 한국인 교구 신부 5), 수녀 33명(투칭 소속 유럽인 15, 한국인 수녀 18)의 교세를 갖게 되었다. 이 밖 에도 덕원 수도원에서는 출판 시설을 갖추어 교리 문답, 성가집, 미사 경본, 바오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 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이처럼 발전한 수도회는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하고, 1946년 토지 개 혁이 실시된 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 수도원의 모든 장상을 비롯한 신부 · 수사들이 체포 되어 1950년 10월에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 명이 처형되었고, 사우어 아빠스 주교를 비롯한 18명의 신부 · 수사들이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54년 1월 24일 본국으로 송환되었던 42명의 독일인 신부 · 수사들은 2년 간의 휴양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③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1928~1946) : 1922년 5월 약 50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던 만주 간도 지방이 원산교구의 관할로 편입됨에 따라 3개 본당의 8,000여 명의 신자들과 약 1,200명의 중국인 신자들에 대한 사목이 요청되었다. 이에 베네딕도회 신부들이 파견되어 용정을 비롯한 3곳의 기존 본당과 함께 연길 등지에 새로운 본당이 건립되었다. 1928년 7월 19 일 원산교구로부터 분할되어 연길 지목구가 설립되었고, 1922년 12월 5일 설립되어 선교 본부의 역할을 해오던 연길 수도원은 1934년 8월 1일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5일에는 브레허(T. Breher, 白化東)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성성되었고, 1937년 4월 13일 연길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됨에 따라 그 해 9월 5일에 주교로 성성되었다. 이 수도원은 수도 생활의 중 심지이자 동시에 사목적인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원산교구와 분할이 시작될 때 연길 지역에는 14명의 신 부들이 파견되어 있었는데, 그 후 수도 생활의 정착을 위 해 6명의 독일인 수사들이 새로 파견되어 목공 · 철공 분야의 일을 하였고, 인쇄소를 설립하여 소년 잡지를 비롯하여 교리 문답서, 성가집 등 교회 서적을 인쇄 · 보급하였다. 한편 1931년 11월에 스위스 캄의 올리베타노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어 여성들에 대한 교육과 병원에서의 봉사 등으로 선교 활동을 도왔다. 만주 지방의 선교는 이 지역이 정치적 · 경제적으로 불안하였기 때문에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항상 질병과 마적 떼의 위험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곳에서도 본당 사목과 함께 초등 교육 기관의 설립은 중요한 선교 활동의 하나였다. 1944년까지 각 본당과 공소에 설립된 해성학교의 학생수는 총 3,000명에 달하였다. 1946년 4월 11일 연길 대목구는 교구로 승격되어 중국 교회에 속하게 되었으나 공산당 치하에 들어가 즉시 선교 활동의 제한을 받았다. 1946년 5월 선교사들은 체포 투옥되었으며 14개의 본당 가운데 몇 개의 본당만 한국인 교구 신부에 의해 명맥을 이어 갔다. 1949년까지 두만강 근처 남평 수용소에 수용 되었던 독일인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먼저 석방되었던 브레허 아빠스 주교는 1949년 12월 12일 본국 수도원으로 귀환한 후 이듬해 11월 2일 사망하였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마지막 그룹은 1952년 8월에 만주를 떠났고,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에 속한 2명의 한국인 신부와 수사는 후에 만주에서 도망하여 간신히 남한에 당도하였다. 그들은 남한으로 피난하여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을 계속한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한국인 수도자들과 합류하였다. 1954년 비테를리(T. Bitterli, 李聖道) 신부가 연길교구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어 1983 년까지 이 직무를 맡았다. 현재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는 옛 선교 지역에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접촉을 가지고, 가능한 한 그들을 지원하고자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 ④ 왜관 성 마오로 플라치도 수도원(1952~현재) : 1951년 미국을 방문 중이던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그리 소스토모(Chrysostomus) 대아빠스는 당시 미국에 체류하 고 있던 전(前) 덕원 수도원 소속으로 스위스 출신인 비 테를리 신부에게 한국에 다시 진출하여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그를 한국 베네딕도회의 장상(superior marior)으로 임명하였다. 비테를리 신부는 일본을 거쳐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남쪽으 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테를리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崔德弘)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 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왜관 지역이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 리 신부가 감목 대리로 임명되었으며, 1955년에는 왜관 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은 로마로 부터 정식 수도원(prioratus)으로 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 대구교구 서정길(徐正吉) 주교로부터 이미 1953년에 위 임받은 3개의 군(郡) 외에 또다시 3개 군의 사목 권한을 위임받았으며, 1955년 4월 1일 왜관의 순심(純心)중 · 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마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 교육에도 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 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1960년 왜관에서도 분도출판사와 인쇄소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하여 한국 교회의 문서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철공소, 목공소와 같은 작업장을 건설하고 특히 현대식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이것은 왜관 수도 원의 자급 자족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 다도 농장 경영의 현대화를 통해 지역 사회에도 크게 이 바지하였다. 1964년 왜관에 세워진 피정의 집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한국 교회에 큰 자극을 주어 그 후 많은 피정의 집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베네딕도회에서는 그 후 1971년 부산과 1979년 서울에서도 각각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는데 서울 피정의 집은 동시에 신학원 구실도 하였다. 본당 사목에 있어서도 큰 성과 를 거두어 1956년 6개 군에 8개의 본당에 불과하던 것 이 1964년까지 10개의 본당이 더 증설되었다. 본당 증 설과 더불어 교회 건축도 크게 발전하였는데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종래의 단순한 벽돌 건물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된 성당과 사제관을 현대식으로 건축함으로써 교회 건축 발전에도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본당과 신자 수의 급속한 증가와 더불어 수도원 가족도 크게 늘어나 왜관 수도원은 명실공히 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 1964년 2월 17일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어 하스(O.Hass)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왜관 수도원은 완전한 자립 수도원이 되었고, 한 국에서 확고한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1971년 4월에는 이동호(李東鎬, 플라치도) 신부가 제2대 아빠스로 선출 됨에 따라 베네딕도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85년 5월 이덕근(李德根, 마르티노) 신부가 제3대 아빠스로 선출되었고, 1987년 3월 19일에는 서 울 근교의 불암산 기슭에 단순한 노동으로 기도 생활에 전념하며 베네딕도회적 삶을 지향하는 성 요셉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1995년 7월 11일 이덕근 아빠스가 수도원 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1995년 8월 10일 김구인(金求 仁) 신부가 3년 간 '관리원장' (prior administrator)으로 선출되어 왜관 수도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덕원과 함흥교구에서 활약하던 투칭의 포교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과 연길교구에서 활약하던 스위스 캄 의 올리베타노 수녀회 수녀들도 다시 한국에 진출하여 각기 대구와 부산에 수도 공동체를 신설함으로써 베네딕도회 여자 수도회도 남한에서 완전히 그 기반을 굳혔다. 회원 현황과 활동 : 1996년 3월 1일 현재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의 인원은 종신 서원자 96명(이 중 신부는 외국인 11명을 포함하여 47명이고 수사는 외국인 4명을 포 함하여 49명), 유기 서원자 14명, 수련자 8명, 청 · 지원 자 13명 등 총 131명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현재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나름대로 교회와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먼저 대명동, 왜관, 석전, 약목, 신동, 낙산 등 대구대교구 내 6개 본당을 맡아 사목하고 있으며, 서울(1979), 부산 (1971), 왜관(1964)에서의 피정의 집 운영, 1969년 10월 30일 시작한 대구 대명동의 가톨릭 신학원, 1986년 1월 1일부터 맡은 서울의 가톨릭 교리 통신 교육회, 1955년 4월 1일 인수한 왜관의 순심중고등학교 등을 운영함으로써 영성 및 교육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또 1960년에 시작한 분도출판사와 인쇄소, 시청각 종교 교육 연구회 (1967), 유리화 공예실(1984), , 금속 공예실(1987.11), 목 공소(1952), 가톨릭 조형 예술 연구소(1991.1 등을 통 해 교회 문화 예술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 사업으로는 왜관 근교의 금남리에서 1992년 7월 10일 준공식을 가진 분도 노인 마을에 85명의 노인들이 수용되어 있고, 1973년 9월부터는 구미 가톨릭 근로자 센터를 운영하며 노동 사목에도 종사하고 있다. 한편 최근 공산 국가의 개방 정책에 고무되어 과거 선교지였던 북한과 만주 등 북방 선교에도 많은 관심과 사명감을 갖고 노력하고 있다. (⇦ 분도회 ;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 성 베네딕도 수도회 ; → 덕원 면속구 ;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 덕원 신학교 ; 몬테 카시노 ; 베네덕도 ; 《베네딕도 규칙서》 ;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 시토회 ; 연길교구 ; 클뤼니 개혁 ; 트라피스트회 ;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 참고문헌  J. Leclercq, O.S.B. Benedictine Sprituality, pp. 285~288/ Terrence G. Kardong, O.S.B. Benedictine Sprituality, 《NDCS》, Collegeville Minnesota, 1993/T. Merton, The Monastic Journey, Cistercian Studies 133, Kalamazoo, Michigan, 1992/ Hwan Gab 60 Jahre(還甲), Miunsterscharzach, 1973/ Matias Auge, Storia della vita religiosa, 1988 (《영성 생활》 11호, 제9장) SS. Patriarchae Benedicti Familiae Confoederatio, Catalogus Monasteriorum O.S.B. Romae, 1995/ Godfrey Sieber, O.S.B. The Benedictine Congregation of St. Ortilien, St. Ottilien : EOS Verl., 1992/ Leodegar Hunkeler, O.S.B. It Began with Benedict, Oregon, 197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1/ 최석우, <한국 분도회의 초기 수도 생활과 교육 사업>, 《사학 연구》 36집, 한국사학회, 1983/ 《가톨릭 사전》 왜관 수도원, (옛 등걸에 새순이》, 분도출판사, 1984/ P.H. Walter, 정학근 역,《승리의 십자가》, 분도출판사, 1978. 〔許成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