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아

〔그〕Βηθανία · 〔라〕Bethania · 〔영〕Beth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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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의 무덤 내부(왼쪽)와 성 라자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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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의 무덤 내부(왼쪽)와 성 라자로 성당.


신약성서 중 복음서에서만 언급된 지명. 서로 다른 두 장소를 가리키는 이 지명은, 예루살렘 부근에 위치한 마을(마르 11, 1)과 요르단 강 건너편에 위치한 세례자 요한의 활동 장소이다(요한 1, 28) 〔예루살렘 부근〕 베다니아는 그리스어식 지명이다. 어원으로 볼 때, 이 지명은 히브리어 ‘베트 아니’(בית עני, 가난한 자의 집) 또는 ‘베트 아니야’(בית עניה, 아니야의 집)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자의 어원은 나병 환자들이 격리되어 예루살렘 동편 마을에 함께 살았다는 굴간 문헌의 모든 내용(11QMidg 46, 16-18)으로 보아 타당성이 있고, 후자의 어원 역시 유배 이후 베니야 지파들이 ‘아니야’에서 살았다는 언급(느헤미야 11, 32)에 상응하는 편이다. 요한 복음사는 베다니아가 예루살렘에서부터 대략 15스타디온(2.7km) 떨어진 곳이라고 하였고(요한복음 11, 18), 공관 복음사가들은 올리브 산 기슭에 위치한 ‘벳파게’(Βηθφαγη)와 인접한 마을이라고 언급하였다(마태복음 11, 1; 누가복음 19, 29). 이곳은 현재 아랍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엘 아자리예’(el-azariye)와 같은 곳인 것 같다. 사실상 '엘 아자리예' 란 마을 이름은 라자로의 고장을 가리키는 비잔틴 시대의 지명(그리스어로는 '라자리온' , 라틴어로는 '라자리움' )을 간직하고 있다. 이 마을은 라자로의 무덤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에서 그 명칭이 계속 유지되어 온 듯하다. 이곳은 마치 헤브론이 3대 족장들(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의 묘를 중심으로 오늘의 도시를 이루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고고학자들의 발굴 및 연구 결과에 따르 면, 이곳에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이미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지금의 라자로 무덤에서 북서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곳에는 신약성서 시대까지 공동 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복음서의 내용에 따르면, 베다니아는 우선 예수와 절친하게 지냈던 마리아와 마르타 그리고 라자로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요한 11, 1),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그들을 방문하여 정담을 나누곤 하였다(루가 10, 38-42). 또한 예수가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린 곳이기도 하고(요한 11, 1-44 : 12, 1. 17), 예수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음식을 나눌 때 한 여자가 그에게 향유를 바른 곳(마태 26, 6-13 : 마르 14, 3-9 요한 12, 1-8 ; 루가 7. 36-50)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공생활 말기 곧 유대 지도자들과의 충돌이 격화된 시기에 은신한 곳이기도 하다(마르 11, 11 : 마태 21, 17 ; 루가 21, 37). 특히 루가 복음사가에 따르면 베다니아는 예수의 승천이 이루어진 장소이다(루가 24, 50 사도 1, 12). 그러나 베다니아의 기념 성당은 전통적으로 라자로와 더 관련이 있다. 즉 라자로의 부활을 기리는 비잔틴 시대의 성당 터에 지금의 기념 성당이 1953년에 완공되어 1954년에 축성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기념 성당은 라자로가 묻혔던 무덤을 중심으로 세워졌었는데, 4세기 말엽 지진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그 당시의 성당 유물들로는 오늘날 기념 성당의 앞마당에 비치해 둔 모자이크와 조각난 기둥들이 있다. 5세기경 다시 성당이 건축되어 십자군 시대에 더욱 확장되었고, 라자로의 무덤 위에는 작은 경당이 세워졌다. 하지만 1187년 사라센(Saracen)에 의해 모두 파괴되고, 14세기경에는 이슬람 사원이 대신 들어섰다. 따라서 라자로 무덤을 찾아 순례를 온 그리스 도인들은 이슬람교 신자들과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념 성당을 관장하고 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이슬람교와 합의하여 16세기경 라자로의 무덤으로 통하는 입구를 새로 만들었는데, 그 문이 바로 오늘날 순례객들이 드나들 수 있는 길가에 위치한 출입구이다. 베다니아에는 오늘날 라자로의 무덤을 중심으로 하여 위쪽 에는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기념 성당이, 아래쪽에는 이슬람교 사원과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관장하는 기념 성당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 복음사가만이 세례자 요한의 활동 장소를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라고 전해 준 다(1, 28). 이곳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와 사명을 밝히면서 그리스도에 관해 증언하였다(요한 1, 19-28). 예수도 이곳에서 세 례자 요한의 추종자들 중에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선택하 였고(요한 1, 35-51 : 사도 1, 21-22) 활동까지 하였다(요한 3, 22-23. 26 : 4, 1-2). 또 수난 전에는 다시 이곳으로 피신하여 잠시 머물렀고,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를 믿고 따랐다(요한 10, 40-42 ; 마태 19, 1)고 한다. 그러나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가 과연 어느 곳을 가리키는 지명인지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 장소를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는 유대 광야(마태 3, 1 : 마르 1, 4)로, 루가 복음사가는 요르단 강 주변으로 막연하게 전한다(3, 3). 또 요한 복음사가는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 외에도 "살렘에서 가까운 애논"이라고 보도한다(3, 23). 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 로서 팔레스티나에서는 가장 오래된 '마다바 지도' 가 1884년에 발견되었는데, 이 지도에 보면 사해 북쪽 요 르단 강 서편 '베타바라' (Βηθαβαρά)에 세례자 요한의 기념 경당이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요르단강 건너편' 이란 말은 요르단 강 동편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르단 강 서편에 위치한 예루살렘과 그 인근에 살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찾아 요르단 강을 건너왔기 때문이다. 장소도 지명도 이와 같이 서로 엇갈린다. 사실상 필사본에 따라 지명도 달리 언급되었지만 베타바라는 '베다니아' 에 비해서 훨씬 후대에 쓰여진 필사본에, 그것도 극소수에 달하는 필사본에서만 언급되었기 때문에 '베다니아' 란 지명이 원전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베 타바라' 는 ‘베트 아바라’ (בֵּית עֲבָרָה, 강나루 또는 건널목의 집)에서, ‘베다니아’는 ‘베토 아니야’ (בֵּית עַנְיָה, 보트의 집)에서 파생된 명칭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두 가지 지명은 한 장소에 대해서 발음상 와전된 차이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서로 다른 두 장소를 가리켰는지 문헌상으로 밝혀 내기는 어렵다. 또 다른 가설은 ‘바타내아’ (Βατανᾶια)를 요르단 강 건너편 북쪽에 위치한 ‘바산’ (בָּשָׁן, 민수 32, 32-33; 신명 3, 8; 4, 47)**과 동일한 곳 으로 간주하고, 베다니아는 발음상 '바타내아' 의 와전된 표기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에세네파와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이 살았다는 증거를 내세워 세례자 요한 의 활동 장소였다고도 한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세례자 요한의 기념 경당들(로마 교회,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시리아, 롭트,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의 흔적들은 1967년의 6일 전쟁으로 모두 파괴되었지만, '마다바 지도' 에 표기된 것처럼 사해 북쪽 7km, 요르단 강으로부터 서쪽으로 7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지역은 예리고로부터 남동쪽으 로 8km 가량 떨어진 곳으로서 아랍 사람들은 '엘 마그흐 타스 (el-maghtas, 세례 장소)라고 부른다. 또한 그리스 정 교회 소속 수도원이 자리한 곳이라 하여 '데르 마르 유 한나' (der marjuhanna, 세례자 요한의 수도원), 이집트를 탈 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요르단 강을 건너 잠시 머무른 곳 (여호 3-4장)이라 하여 '카시르 엘 예후드' (qasr el-jehud, 유대인들의 성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지역은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지로 묶여 있다가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 협정으로 인해 1994년부터 자유로이 방 문할 수 있게 되었다. 요르단 강 동편에도 세례자 요한의 기념 경당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아타나시우스 황제(491~ 518)가 요르단 강 동편 '와디 엘 카라르' (wadi el-charrar)의 입구쪽 즉 이른바 '엘리야의 난' (츠에벨 마르 엘리야스) 근처에 세웠었다. 고고학자들은 그 주변에서 비잔틴 시대의 건물 흔적들을 찾아냈으나 바로 그 장소가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 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이곳에서 엘리야가 불 수레를 타고 하늘 로 올라갔다(2열왕 2, 5-14)고 한다. 이런 전통과 함께 세례자 요한을 종말 예언자 곧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한 초대 그리스도인들(마태 11, 14 ; 17, 11-13 ; 마르 9, 12-13 ; 루가 1, 17)은 이곳을 세례자 요한의 활동 장소로 여기 고 기념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까지 베다니아에 관한 확실한 정설은 없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 장소가 예루살렘 부근에 위치한 '베다니아와 발음상 거의 동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어 요한 복음사가는 '요르단 강 건너편' 이란 단서를 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기념 경당이 요르단 강 동편보다 서편에 더 많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유지되어 온 것은 전례상의 이유일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의 공현 축일에 예수의 성탄과 세례를 동시에 기념했었 다고 한다. 먼저 베들레헴에서 예수의 성탄을 기념하고 이어서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 로 가서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들레헴과 베다니아는 거리상 너무 멀어서 하루에 다 거행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350년경 예루살렘의 주교 치릴로가 예수의 세례 기념 장소를 요르단 강 서편 곧 카시르 엘 예후드로 옮겼다는 것이다. (-> 팔레스티나) ※ 참고문헌  정양모 · 이영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 활성서사, 1989, pp. 59~62, 86~90/ C. Kopp, Die heiligen Stätten der Evangelien, 1964, pp. 332~338/ G. Kroll, Aufden Spuren Jesu, Innsbruck, 1987, pp. 278~2871 J. Murphy-O'Connor, Das Heilige Land, Miinchen, 1981, pp. 128~131/ 0. Keel · M. Kiichler, Orte und Landschaften der Bibel, Bd. 2, Ziirich, 1982, pp. 527~5321 J.H. Charlesworth, John and Qumran, London, 1972, pp. 167~173/ E. Testa, Les Dossiers d'Archeologie 10, 1975, pp. 98~106. 〔李永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