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3세기경 로마의 동정 순교자. 축일은 5월 31일. 베드로닐라에 관한 순교 행전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 어떻게 순교하였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베드로 행전>, <필립보 행전>, 6세기에 작성된 행전, 그리고 기타 그노시스주의적인 작품에 따르면, 베드로닐라는 사도 베드로의 딸이라고 한다. 《로마 순교록》에는 성녀가 자연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네레오와 아킬레오의 수난기》(Pasio SS. Nerei et Achillei)의 기록 때문인 듯하다. 이 수난기에는 성녀가 로마 귀족 플라쿠스(Flaccus)의 청혼을 거절한 후 3일 동안 단식하고 기도하던 중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임종 전에 성체를 영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그녀의 무덤은 도미틸라(Domitilla) 지하 묘지에 있는 성 네레오와 아킬레오의 무덤 곁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7세기경의 작품인 《여행기》(Itineraria)에 의하면, 비아 아르데아티나(Via Ardeatina)에 있는 성 도미틸라의 지하 묘지에 390~395년경에 세워진 대성당이 있었는데, 4세기경 성당 벽에 그린 벽화에는 한 여인이 죽은 자를 천국으로 안내해 들어가는 장면과 '순교자 베드로닐라'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증언은 발굴 작업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교황 시리치오(384~399)의 재임 기간에 성녀의 무덤 위에 대성당이 세워졌으며, 525~526년에는 교황 요한 1세(523~526)의 지시로 성 도미틸라의 지하 묘지에 있는 대성당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8세기경 로마를 침공한 롬바르드족의 왕 아인스툴프(Ainstulf)가 함락을 위협할 때,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의 요청을 받아 교황청을 롬바르드족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이 점령한 영토를 되찾아 준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741~768)는 성녀 베드로닐라가 사도 베드로의 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성녀의 유해를 사도 베드로의 무덤 곁으로 이전하라고 요구했고, 이 요구를 받아들인 바오로 1세 교황(757~767)은 757년에 베드로닐라의 석관과 유해를 베드로 대성당의 지하 묘지로 옮겼다. 현재 성녀 베드로닐라의 제대는 사도 성 베드로 좌(座) 오른편의 둥근 천장 아래에 있다. 성녀의 유해가 옮겨진 후 프랑스의 왕들은 이곳을 자신들의 경당(Capella regum Francomum)으로 여겼으며, 피핀으로 인해 적어도 16세기까지는 베드로닐라가 프랑스의 수호 성녀로 공경을 받았다. 특히 피핀의 두 아들인 카알 대제와 카를로만(Carloman)은 사도 베드로의 양자로 간주되었으며, 베드로닐라가 그들의 수호 성녀였다. 이 경당은 역대 프랑스왕들에 의해 아름답게 꾸며졌으며, 후대 교황들은 미켈란젤로와 브라만테에게 경당 장식을 의뢰하였다. 순교사실은 의문시되지만(G.B. de Rossi),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었다는 견해는 널리 인정받고 있는 베드로닐라 성녀에 대한 공경 예식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시에나와 독일 등에서도 거행되고 있다. 베드로닐라는 영국 중세 후기 유리화와 그림 등에 종종 사도 성 베드로로부터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열쇠 꾸러미를 든 모습으로 등장하며, 상본에는 종려나무 가지와 책을 들고 서 있는 작은 소녀로 묘사되어 있다.
※ 참고문헌 E. Day, 《NCE》 11, pp. 245~246/ G. Mathon, 《Cath》 11, p. 97/ U.M. Fasola, 《LThK》 8, pp. 327~328/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1987, p. 352. 〔편찬실〕
베드로닐라 Petronilla(?~251?)
글자 크기
5권

도미틸라 지하 묘지에 그려진 베드로닐라 성녀의 프레스코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