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교회 학자. 추기경. 베네딕도회 수도원 원장. 11세기 개혁 운동의 초기 지도자. 축일은 2월 21일.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고아가 된 그는, 그의 누이 로셀린다와 형 다미아니의 도움으로 성장하였는데, 어린 시절의 어려움은 후에 그의 제자가 된 로디의 요한(John of Lodi)이 저술한 전기에 잘 나타나 있다(PL 144, 113-146). 라벤나의 사제였던 그의 형이 베드로에게 다미아노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라벤나, 파엔차(Faenza), 모데나(Modena) , 파르마(Parma) 등지에서 교육을 받은 다미아노는, 21세 때에 라벤나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교수 생활을 포기하고, 1035년 성 로무알도(St. Romualdus, 951~1027)에 의해 설립된 폰테 아벨라나(Fonte Avellana)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입회하여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성서와 교부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은수자로 생활하던 중 1043년에 수도원 원장이 된 그는, 성 베네딕도와 성 로무알도의 이상을 결합시킨 은수자적이면서 공동체적인 규칙에 따라 수도 생활을 개혁시켰으며, 다섯 개의 은둔소를 더 세웠다.
〔활동과 저술〕 다미아노의 수도자적이고 영성적인 면모는 1045년 이후 작성된 그의 수많은 소논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도자로서 자기 개혁적인 생활 기반을 토대로 한 다미아노는 하인리히 3세(1039~1056)의 신성 로마 제국 왕궁과 교황청과 접촉하면서 당시 교회의 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6세(1045~1046)와 글레멘스 2세(1046~1047)와 레오 9세(1049~1054)의 고문으로서 활동하면서 베드로 다미아노는 중요한 개혁 저술서인 《리베르 그라티시무스》(Liber gratis-simus)와 《리베르 고모리아누스》(Liber gomorrhianus)를 발표하였는데, 전자는 성직 매매를 반대한 것이었고, 후자는 성직자들의 도덕적인 패륜을 비판하며 성직자의 독신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는 실바 칸디다(Silva Candida)의 홈베르토(1000~1061)나 그레고리오 7세가 된 힐데브란트(Hildebrand, 1020~1185)와는 달리 개혁 운동은 교황청과 황제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의 개혁 활동은 먼저 교황청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되었다. 1057년 교황 스테파노 9세(1057~1058)에 의해 오스티아(Ostia)의 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서임된 후, 그레고리오 개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여러 번 대립 교황들에게 대항하였으며, 교회 회의 참석, 밀라노 · 독일 · 프랑스등에 대한 외교 활동, 개혁을 위한 저술 등으로 교회의 공적인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059~1060년에 밀라노로 가서 로마 교회가 밀라노 교회보다 우위임을 지적하면서 밀라노 교회의 문제를 안정시켰으며, 1059년에는 라테란 교회 회의에 참석하여 교황 선출 방법을 수정하는 데 참여하여 주교급 추 기경들에 의해서만 교황을 선출하고, 사제급 추기경과 성직자들 및 신자들에게 동의를 얻도록 하였다. 1061~1064년에는 알렉산데르 2세(1061~1073)의 대립 교황인 호노리오 2세(1061~1071/1072)의 이교에 대항하여 활동하였다. 1062년에는 《디셉타시오 시노달리스》(Discepta-tio synodalis)를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교회와 국가의 대표자들 사이의 가상 논쟁을 통하여 알렉산데르 2세 교황의 관심사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면서, 그의 선거 논쟁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1063년에는 《이테르 갈리쿰》(Iter Gallicum)을 통해 마콘(Mâcon)의 드로고(Bp.Drogo)와 논쟁을 한 클뤼니 수도원의 후고 원장을 지지하였고, 1069년에는 마인츠로 가서 젊은 왕 하인리히 4세가 그의 아내 베르타(Bertha)와 이혼하지 않도록 설득하기도 하였다. 1067년부터 폰테 아벨라나 수도원에 반쯤 은거하면서 개혁을 위해 활동한 다미아노는, 1071년에 훗날 빅토르 3세(1086~1087) 교황이 된 데시데리오(Desiderius) 아빠스의 초대를 받아 몬테 카시노에 있는 성 베네딕도 대성전의 봉헌식에 참여하였다. 1072년 고향 라벤나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다미아노는 라벤나의 주교와 그를 파문한 알렉산데르 2세의 화해를 주선한 다음 수도원으로 돌아오던 중, 파엔차에 있는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2월 22일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현재에도 그곳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1828년에 그에 대한 공경 예식이 승인되었으며, 교황 레오 12세는 1828년에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단테는 《신곡》(Divina Com-media)에서 베드로 다미아노가 제7 천국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240편의 시와 170편의 편지, 53편의 강론 원고와 성인전, 기도문 등을 남겼다.
〔평 가〕 다미아노는 교회의 정치가이자 개혁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굳건한 신학적인 체계를 남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 거론되던 모든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고 전통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는 또한 신적인 신비들은 결코 인간의 이성으로 해명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신학적이고 금욕적인 작품들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인 것이었으며, 그의 작품들은 그가 중세 시대에 위대한 라틴 문장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성서를 비롯하여 라틴 교부와 그리스 교부들의 작품들, 고대 라틴 문학과 로마법, 특히 교회법에 대한 그레고리오 전(前) 시대의 전집 등으로부터 풍부한 영감을 받은 것이어서, 당대 사람들에게 성 예로니모를 연상시키게 하였다. 다미아노는 또한 가난한 공동체 생활과 은수자적 생활이 모든 이를 위해 가장 좋은 삶이라는 수도자적인 이상에 기여하였고 성직자들의 교회법적 생활을 옹호하였다. 그래서 자발적인 청빈의 사도였던 그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선구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 다미아니)
※ 참고문헌 O.J. Blum, 《NCE》 11, pp. 214~215/ R. Grégoire, 《Cath》 11, pp. 354~355/ G. Lucchesi, 《LThK》 8, pp. 358~359/ Donald Attwater, The Penguin Dictionary of Saints, Great Britain, 1983, pp. 270~271/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1987, pp. 349~350/Enzo Lodi, Trans. by Jordan Auman, OP.,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New York, 1992, pp.56~57. 〔편찬실〕
베드로 다미아노 Petrus Damiani(1007~1072)
글자 크기
5권

베드로 다미아노 성인 서거 900주년 기념 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