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롬바르두스 (1095~1160)

Petrus Lomb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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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집》을 집필하는 베드로 롬바르두스.

《명제집》을 집필하는 베드로 롬바르두스.

신학자. 파리의 주교. 1095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노바라(Novara) 근처에 있는 루멜로뇨(Lumellogno)에서 태어나 볼로냐(Bologna)에서 공부하였다. 1133년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St. Bernard von Clairvaux, 1090~1153)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랭스(Reims)에 잠시 체류하면서 연학한 다음 1136~1150년 파리 노트르담(Note-Dame) 주교좌 성당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는데, 이곳에서 1138년에 《시편 주석서》(Commentarius in Psalmos)를 출판하였고, 1139~1141년에는 《바오로 서간의 주석서》(Collectanea in Epistolas Pauli)를 주해하였다.
1143년경부터 '유명한 신학자' 로 알려지게 된 그는(Metamorph. Goliae Episc., 197), 1144~1145년에는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참사 의원을 역임하였으며, 이때부터 저술을 구상하기 시작하여 1157~1158년에 4권으로 된 《명제집》(Sententiarum Libri) 집필을 끝마쳤다. 1147년 4월 21일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Ⅲ ) 교황이 주재한 파리 회의에 참석한 데 이어 이듬해 3월 21일에는 랭스 교회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그는 이 두 회의에서 포레의 질베르(Gilbert de la Porée)의 저술과 교의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또한 부르군디오(Burgundio)가 번역한 요한 다마세노(Johannes Damascenus, 657~749)의 《정통 신앙》(De fide orthodoxa)을 1154년에 접하고 이에 대해 연구하였다. 1159년 6월 29일 파리의 주교로 서품되었으나, 이듬해 8월 21/22일 사망하여 현재 생 마르셀(St. Marcel) 주교좌 성당에 그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주저와 교의〕 설교와 주석서 : 베드로 롬바르두스의 설교는 약 30개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 대부분이 라바르딘의 힐데베르트(Hildebert de Lavardin)에 의하여 발행되었다(PL 171, pp. 339~964). 베드로 롬바르두스는 훗날 캔터베리의 대주교 베켓(St. Thomas Becket, 1118~1170)의 비서가 된 자신의 영국 제자인 보스함의 헤리베르트(Heribert de Bosham)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라온의 안셀모(Anselm de Laon, +1117)가 하였던 주석의 불명료함과 간결함을 더 분명하게 규명해 내려는 의도에서 성서 주석을 시작했다." 그는 또 질베르의 주석서도 이용했는데, 이러한 상호 의존성 때문에 스콜라 학자들은 안셀모의 작품을 '보통 주석' (Glossa ordinaria, Glos-satura media)이라 하고, 베드로 롬바르두스의 주석서를 '대(大)주석서' (Major Glossatura)라고 하였다.
《시편 주석서》는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용도로 쓰여진 것인데, 그는 오랫동안 이것을 학생 교육용으로 이용할 것인지에 대해 망설였다고 한다. 교수 활동 말년에는 학생들이 이를 이용하도록 하였지만, 파리의 주교로 임명되면서는 교재로 사용하는 것을 중지시켰다. 《바오로 서간의 주석서》는 파리에서 그의 교수 시절에 사용하였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질베르의 주석을 많이 차용하였으나 본래의 원천은 리용의 플로루스(Florus)에 의해 835~840년경에 작성된 《바오로 서간의 설명》(Expositio epistolarum Beati Pauli)에 두고 있다. 이 주석서는 로마서 1장 3절의 주석에서 강생의 특성을 설명하고있으며, 로마서 1장 20절에서 성령에 반대한 죄와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이 있고, 마지막으로 로마서 11장 36절에 해당하는 성자와 성령의 삼위 일체적인 관계에 대한 연구가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곧 두 번째 번역을 이끌어 내었다.
《명제집》 : 성서에 관해 저술 활동을 하였던 베드로 롬바르두스는 신학 교육에 새로운 방법과 교재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명제집》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는 교부들의 견해를 설명해 줄 수 있고 학생들과 교사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교과서로서 이 명제집을 저술하였었다. 역사적이고 논리적인 질서에 따라서 전개된 이 저서로 그는 확고한 명성과 '명제집의 대가 라는 칭호를 얻었다. 제1권은 하느님, 하느님의 인도, 악, 예정론 등을 논하였다. 특히 삼위 일체, 즉 세 위격과 신적인 본질과 인간의 삶과 세상 안에서의 하느님 현존에 대하여 다루었다. 삼위 일체 교의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방법이 예언서와 복음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데 필요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의 방법에 따라 인간의 지성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또 이성에 대한 연구는 오직 신앙의 필요에 의해서만 유용하며, 자연적으로 신학은 철학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제2권은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는데, 창조의 개념, 천사의 창조, 인간의 타락과 은총의 확증, 세상의 창조 6일과 그들의 타락과 그 결과, 그리고 은총과 자유의지와 현재 범할 수 있는 죄에 대하여 거론하였다.
제3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속죄, 덕목, 십계명을 설명하였다. 특히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는데, 그리스도는 정말로 신앙, 희망, 사랑인가? 하는 문제를 복음 삼덕에 대한 논의로 이끌면서 기본 덕행들과 성령 칠은과 십계명의 문제 등을 거론하였다. 그 밖에 '왜 성자는 강생하였는가? , '성자는 두 가지 다른 위격을 가질수 있는가?' , '성자는 여성의 형상을 취할 수 있는가?' 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이런 물음들은 반대자들의 입장에서는 무익한 질문으로 여겨졌다. 제4권에서는 성사에 관한 개론을 길게 다루었는데,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표지' 이며, '그것이 의미하는 은혜의 원인' 이라고 주장하였다. 성사에 관한 그의 교의는 일차적으로 인과 개념을 적용하였으며, 구약의 성사와 신약의 성사와의 차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의 차이를 이야기하였다. 이어서 견진성사와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사성사, 성품성사를 다루었다. 또한 도덕적인 문제에서 인간의 행위는, 성격상 악한 행위들을 제외하고, 그 원인과 동기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의 혼인 요건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죽음, 최후 심판, 지옥,천국, 상선 벌악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명제집》은 부분적으로는 신학 안에서 사용되는 '극단적인 변증법' 에 대응하면서, 부분적으로는 아벨라르(P. Abelard, 1079~1142) 이후 중세 교의의 경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서와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의 가르침을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한 논문으로 오랜 전통의 신학적 교육이 축적된 것이며 그리스도교의교의 전반을 포함한다.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아우구스티노(354~430)의 영향를 비롯하여 암브로시오(339~397) 힐라리오(Hilarius, +336) , 톨레도의 율리아노(Julian of Toledo), 《표준 주석서》와 베드로 롬바르두스 자신의 주석서, 생 빅토르 학파의 후고(Hugo, +1141), 《그라시아노 법령집)》(Decretum Gratiani) 등을 자료로 하였다. 그러나 내용과 성격에 있어서 가장 훌륭하다고 인정을 받았고 중세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이 《명제집》은, 로마 교황청의 역할이나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반면, 구원과 은총에 대한 교의가 보다 많은 분량을 차지 한다.
1222년에 헬즈의 알렉산델(Alexander Halensis, 1170~1245)이 소개한 후 대학교의 교재가 됨으로써 이 <명제집》은 전 유럽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고, 16세기까지 대학교의 공식적인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그로 인해 수많 은 주석서들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이 책은 베드로 롬바르두스 생존시와 사후에 많은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생존시에는 쉴리의 모리스(Maurice de Sully)와 멜랑의 로베르(Robert of Melun) 등에 의해 비난을 받았다. 특히 그의 소위 '그리스도 인성 부정설' (Christological Nihilism)의 수용은 교황 알렉산델 3세(1159~1181)의 비난을 받았고 이로 인해 그는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또 일부 교의들은 생 빅토르 학파의 왈터(Walter)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사후에는 그의 삼위 일체 교의가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daFiore)과 같은 질베르의 추종자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단자로 간주되지는 않았으며, 그의 저술을 단죄하려는 움직임은 수포로 돌아갔다. 삼위 일체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승인하고, 그의 주장을 거부하였던 요아킴을 파문한, 1215년의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우리는 베드로 롬바르두스와 함께 믿는다."라는 말로 신앙 고백문을 발표하였다(D804).
〔평 가〕 《명제집》은 중세까지 유럽의 모든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 대한 강의 때문에 성서에 대한 강의들이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이유에서 1267년경에 베이컨(Roger Bacon)이 《신학에 대한 넷째죄》(le quatrième péché contre la théologie)라는 저서를 출판할 정도로 이 책의 인기는 높았다. 철학과 변증법적 성향을 지닌 《명제집》은, 두세(V. Doucet)가 언급한 바와 같이 13세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영향을 받던 시기의 가장 훌륭한 결실로 평가된다. (-> 스콜라학 ; 신학사)
※ 참고문헌  I.C. Brady, 《NCE》11, pp. 221~2221 -, 《DSp》 XI-2, pp. 1604~1612/ -, 《LThK》 8, pp. 367~369/ 《ODCC》 3, p. 1073/ J.P.Maupas, Dictiomaire des Philosophes 2, Paris, 1984, pp. 2261~2262.〔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