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 〔히〕בֵּית לֶחֶם 〔그〕Βηθλέεμ 〔라· 영〕Bethle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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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위)와 지금의 베들레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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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위)와 지금의 베들레헴 전경.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쯤 떨어진 해발 790m 언덕 위에 위치한 작은 읍.
〔성서상의 언급〕 '떡의집' 이라는 의미를 지닌 베들레헴이 구약성서에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야곱이 부인 라헬을 이곳으로 가는 길가에 묻었다는 창세기 35장 19절에서이다. 그 외에도 베들레헴은 여러 번 언급되지만(판관 17, 8 ; 19장 ; 2사무 2, 32 ; 23, 14-16 ; 2역대 11, 16 ; 느헤 7, 26 ; 에즈 2, 21), 그렇게 중요한 지역으로 부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 다윗(기원전 1010~970경)이 태어나서 목동으로 자라난 곳이라는 사실,그리고 사무엘이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선정했다는 전설(1사무 16, 1-13) 말고는 온 구약 시대에 걸쳐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빈촌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을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군주로 여겼기 때문에 다윗의 고향이라는 사실은 큰 자랑거리였다. 그래서 장차 태평 성대를 이룩할 이상적인 왕, 곧 메시아도 당연히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메시아의 탄생지에 대한 기대는 미가서 5장 1절에 분명히 드러난다.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대의 영지들 가운데서 아주 작지만, 네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이 나오리라···." 예수 시대를 전후해서 쓰여진 아람어역 성서(Targum)에는 '다스릴 분' 을 분명히 밝혀 '메시아' 라고 단정하였다. 또한 마태오 복음 2장 4-6절을 보면, 대제관들과 율사들이 미가서 5장 1절을 근거로해서 메시아의 탄생지로 베들레헴을 언급한다. 그리고 요한 복음 7장 41-42절에는, 메시아는 다윗 후손으로서 유대 지방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이 있으니, 갈릴래아 출신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군중이 있었다고 전해 준다. "갈릴래아에서 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성경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그리고 다윗이 살고 (있었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와 베들레헴〕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다는 신약성서의 언급(마태 2, 1 ; 루가 2, 4-7)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예수의 신앙적 탄생지라는 설 : 예수 부활 이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다. 그런데 예수를 메시아로 믿은 이상,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나자렛에서 탄생하였다고 하면,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루가 복음사가는 마리아도 본래 나자렛에 거처하였고(1, 26) 요셉도 나자렛에 거처하였다고 하면서도(2, 4), 마리아의 해산일이 임박하자 그 둘을 300리 남쪽 베들레헴으로 이동시킨다. 무리를 해서라도 베들레헴을 예수의 탄생지로 만드려는 것이다. 결국 베들레헴은 예수가 실제로 탄생한 곳이라기보다는, 예수를 메시아로 섬긴 믿음에서 비롯된 탄생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예수의 역사적 탄생지라는 설 : 베들레헴을 예수의 역사적 탄생지로 여기는 주장에는 두 가지 중요한 근거가 있다. 첫째로, 루가 복음사가와 마태오 복음사가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베들레헴을 예수 탄생지로 꼽았다(루가 2, 7 ; 마태 2, 5). 그렇기 때문에 베들레헴 탄생설은 두 복음사가가 제각기 복음서를 집필하기 이전의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다. 둘째, 팔레스티나에서 태어난 교부 유스티노(100?~167)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였는데, 그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150년경에 집필한 《트리폰과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n the Jew)에서 "예수 아기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요셉은 마을
어디에서도 방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마을 근방 동굴에 거처를 정하였다" (78, 2)라고 하였다. 한편 150년경에 쓰여진 《야고보의 원 복음서》라는 위경에도, 베들레헴 가까이 와서 마리아가 산기를 느끼자 "요셉은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마리아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요셉은 전처의 아들들로 하여금 마리아 곁에 지켜 서 있게 하고 자신은 베들레헴 근방으로 산파를 찾으러 나갔다···"고 하였다(17-20장) .
〔유 적〕 예수 탄생 성당 :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는 324년에 베들레헴으로 순례 와서 예수의 탄생지로 전해 오는 동굴을 참배한 후 아들에게 청해서 바로 그 동굴 위에다 성당을 짓게 하였다. 공사는 정성을 다했기 때문에 오래 걸려 339년 5월 31일에 축성되었는데, 이 성당을 '콘스탄틴 성당' 이라고 한다. 그 후 이 성당은 불탔는데 그 시기와 화재 원인에 관해서는 설이 많다. 짐작하건대 510년 대지진 때 화재가 났거나, 아니면 529년 사마리아인들의 폭동 때 불타 버렸을 것이다. 다행히 콘스탄틴 성당 바닥을 장식했던 모자이크 일부가 지금의 예수 탄생 성당 중앙 통로 중간 지점에 보존되어있다. 나무판자를 들추면 아름다운 십자가 모자이크가 보이는데 곡선이여러 겹 교차해 있는 것이 우리 나라의 매듭 기법을 연상하게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가 531년에 완공한 지금의 예수 탄생 성당은, 그 후 지붕과 바닥과 내부 장식 정도만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성당이 1,470여 년 동안이나 보존된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모든 성당을 허물었지만 베들레헴의 성당만은 그대로 두었는데 그 이유는, 성당 정면 박공에 있는 모자이크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찾아온 동방 박사들(마태 2, 1)이 페르시아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군인들은 이 모자이크를 보고는 너무나 감동하여 성당을 허물지 않고 참배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638년 이스라엘을 점령한 이슬람교 군주 오마르(Omar) 역시 이 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코란》에 동정녀 마리아가 하느님의 종이며 예언자인 예수를 종려나무 아래에서 낳았다고 하는데(19, 16-33), 이 종려나무가 바로 베들레헴에 있었다는 이슬람교의 전설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 이슬람교 사원들과 헤브론 성조 사원을 순례하는 무슬림들이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성당도 참배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오른쪽으로 아르메니아 정교회 수도원이 있는 예수 탄생 성당의 내부는 붉은 색 돌기둥이 오른편과 왼편에 각각 두 줄씩 있는데, 줄 하나에 기둥은 열 개이다. 중앙통로 양쪽 높은 벽면에는 대형 모자이크가 일부 남아 있는데, 이것은 1165~1169년 사이에 십자군이 이 성당을 수리하면서 덧붙인 것이다. 오른쪽 벽 가까이에 있는 8각 석조 세례대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는 중앙 제대 가까이 있었던 것으로, "주님이 알아보신 이름을 기념하여, 그들 영혼의 안식을 위하여, 그들 죄과의 용서를 위하여" 라는 글이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다.
그리스 정교회는 성당 후진 중앙과 후진 오른쪽에 제대를 하나씩 설치하여 전례를 거행한다. 후진 왼쪽에는 아르메니아 정교회에서 별도로 제대 두 개를 설치하였는데 자신들이 사용하지 않을 경우 시리아 정교회와 콥트 정교회에 빌려 주기도 한다. 성당 후진의 중앙 제대 오른편 또는 왼편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중앙 제대 바로 아래 '예수 탄생 동굴' 이 있다. 그리스 정교회가 소유하고 있지만, 동굴 바닥의 은색 별, 소위 베들레헴 별은 가톨릭에서 설치한 것이다. 예수 탄생 동굴에서 3~4m 물러서서 두 계단을 내려가면 소위 '구유 동굴 이 있다. 이 동굴은 가톨릭 소유로, 아기 예수를 구유에 눕힌 곳이라고 한다.
가타리나 성당 : 예수 탄생 성당 왼편의 근대식 성당이 1881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자들이 세운 가타리나 성당이다. 이곳에서는 예루살렘 주재 가톨릭 총대주교가 매년 12월 25일 성탄 자정 미사를 집전하는데, 성당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면 예수 탄생 동굴과 구유 동굴 비슷한 동굴들이 많이 있다. 그중 하나가 예로니모 성인의 거처였다. 386년부터 34년 동안 이곳에 은거한 예로니모(347~420)는 이곳에서 집필을 하면서 수도 생활을 하였다. 그의 집필 활동 중 가장 돋보이는 일은 신구약성서를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 원전에서 라틴어로 완역한 것인데, 이 번역이 교회의 공인을 받아 사용되고 있는 '불가타 역본' 이다. 또한 남녀 수도원을 창립하여 지도했는데 여기에는 로마 귀족인 성녀 바울라(Paula, 347~404)와 바울라의 딸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성녀(368~420)의 도움이 매우 컸다. 이들 모녀는 386년부터 예로니모와 함께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사망할 때까지 그에게 물심 양면으로 헌신하였다. 예로니모는 모녀가 사망하자 자신의 거처 부근 동굴에 모녀를 안장하였는데 어느 동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로니모 자신은 420년에 사망하였는데 생존시에 자신의 거처 부근 동굴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는 유언대로 거처 옆 동굴에 묻혔고, 시신이 담겼던 석관 앞면에는 직접 작성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내가 영원히 쉴 자리, 여기 거처하는 것이 내 소원이로다" (Haec est requies mea in sempiternum. Hic habitabo quoniam optavi eam). 하지만 13세기에 예로니모의 시신은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Santa Maria Maggiore)으로 이장되어 현재 베들레헴 동굴에는 빈 석관만 남아 있다. (→ 예수 성탄 대축일)
※ 참고문헌  정양모 · 이영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 1988, pp. 103~106/ Jerome Murphy O'Conner, Guide Archéo-logique de la Terre Sainte, Paris, Denöel, 1980, pp. 188~195/ H. Cazelles, 《ABD》 1, pp. 712~715. 〔鄭良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