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추기경. 영성학자. 프랑스 오라토리오(Orato-riens)회 설립자. 외교관. 정치가. 1575년 2월 4일 프랑스 트루아(Troyes) 근처의 세리이(Serilly)에서 열심한 신자인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 베륄은, 사촌이며 프랑스 가톨릭 신비주의자로 1791년에 '강생의 마리아' (Marie delTncarnaion)라는 이름으로 복자품을 받은 파리의 아카리(Acarie) 부인 저택에서 생활하면서 예수회 신부들이 운영하는 크레르몽(Cler-mont)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소르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는데, 이때 그는 아카리 부인의 저택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던, 당시 신심 운동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독신파(Parti des dévots)의 대표적인 인물들과 사귀게 되었다. 베륄은 예수회 신부들의 영성 지도를 받고 한때 수도 생활도 생각하였지만, 교구 신부가 되기로 결정하였다.
1599년 사제 서품을 받고 위그노파였던 당시 프랑스의 왕 앙리 4세의 개인 소성당 신부로 임명되어 왕의 자선품 분배원이 되었는데, 이 일은 그가 프랑스 왕을 위해 행한 많은 종교적 · 정치적 활동 중 최초의 일이었다. 그는 또 왕자를 교육시키는 직무를 맡았지만 사양한 이유는 평신도 수도자들의 영적인 성장과 프로테스탄트들의 주장에 반론을 펴려 하였기 때문이다. 1604년에는 아카리 부인의 부탁으로 프랑스에 맨발의 가르멜회를 진출시키기 위하여 스페인에 갔는데, 여러 가지 교회법적인 문제로 5개월이란 기간이 소요되었다. 그와 함께 돌아온,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St. Theresia ab Avila, 1515~1582)로부터 직접 영성 지도를 받은 일곱 명의 수녀들은 파리에 가르멜회를 설립하였고, 이 모원을 중심으로 한 가르멜회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베륄이 사망할 당시 프랑스의 가르멜 수녀회 총수는 43개나 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발표한 성직자들의 생활 개혁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베륄은 1605년 이후 그 당시 신학교가 거의 전무했던 프랑스에서 사제들의 교육과 개혁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611년에는 사제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1564년에 성 필립보 네리(St. Filippo Neri, 1515~1595)가 로마에서 창립한 오라토리오회와 성격이 비슷한 프랑스 오라토리오회를 설립하였다. 이 회는 의무 서약을 하지 않는 사제 공동체로서 신학교를 설립하고, 설교의 수준을 높이고, 신학 교육을 장려함으로써 프랑스 성직자들 사이에 폭 넓은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하였다. 그래서 20년 후 프랑스 내에는 7개의 신학교와 21개의 학교 및 50개의 회원들을 위한 숙소를 운영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또한 베륄은 황태후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édicis)의 고문인 동시에 루이 13세 국왕의 친구로서 왕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617년 왕의 측근들이 궁정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왕비와 왕을 화해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이때부터 그는 왕의 신임을 얻어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정치가로서 베륄의 활동 목표는 민족주의를 떠나 프로테스탄트의 확장을 막기 위하여 가톨릭 국가들 사이의 일치를 이루려는 것이었다. 영국이 가톨릭교회로 돌아올 것이라고 전망한 그는 1625년에 루이 13세의 여동생인 앙리에트(Henriette)와 찰스 1세(1625~1649)가 된 영국의 황태자 사이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때, 베륄은 결혼식 후 1년 동안 앙리에트의 지도 신부로서 영국에 머물러 있었다. 1626년 프랑스 대사로 스페인에 파견된 베륄은 스위스의 바텔리나(Vatellina) 지역에서 가톨릭 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몽송(monçon) 조약을 체결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는 교회와 국가를 위한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여 1627년에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하였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베륄은 루이 13세의 총리였던 리슐리외(A.J. du P. Richelieu, 1585~1642) 추기경의 반(反)스페인 정책에 반대하였으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였다. 그래서 1629년에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다른 가톨릭 국가와는 전쟁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스페인에 항거하기 위한 영국과 네덜란드 동맹 조약에 조인하기를 거절하였다. 이 사건으로 리슐리외 추기경과의 협력 관계가 단절된 후 그는 정치적인 활동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일부에서는 베륄이 유럽 전역에서 프로테스탄트를 말살시키자고 주장한 탓에 둘 사이의 관계가 깨졌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사망할 당시 황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베륄은 자신이 항상 원해 왔던 대로 1629년 10월 2일 미사를 봉헌하던 중 사망하였다. 1648년부터 그의 시복 조사가 시작되다가 얀센주의자들이 베륄을 얀센주의자라고 주장한 탓에 중단되고 말았다.
〔사 상〕 많은 영성 서적과 편지들을 남긴 베륄은, 작가로서의 소질이 뛰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가르침은 교회사학자들이 그를 프랑스 영성학파(Ecole de spiritualité française)의 대표자라고 할 만큼 중요성을 지닌다. 그의 영성은 교부들과 성 베르나르도, 루이스브뢰크(Jan van Ruysbroeck, 1293~1381) 등 플랑드르 출신의 신비가들과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St. Ignatius de Loyola)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지속적인 창조 활동으로 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베륄은 후에 얀센주의자들이 주장한 내용과는 정반대로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지은 죄로도 단절시킬 수 없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고 하였다. 1607년 이후 베륄의 설교는 예수그리스도 중심이었고, 신자들이 예수의 사랑에 대해 무관심할 때 가장 안타까워하였다. 그는 "사랑으로써 육화하시면서 성자가 자기 자신을 낮추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내려오시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한다" 고 하였다. 성자의 육화로 말미암아 인간은 예수 안에 머무르고 예수는 온 인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래서 베륄에게 모든 신심은 예수와의 관계에서만이 의미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베륄의 영성 서적 중 가장 잘 알려진 책은 《예수의 신분과 위대함》(Disours de l'état et de la grandeur de Jésus, 1623)이며, 그의 명상과 기도에 대한 관심은 교육 정책으로 확립되어 성직자 교육 및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
다.
영적 지도자로서의 베륄은 행위보다는 마음의 자세를 더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신자는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가 살았던 역사적인 현실과 예수의 마음 상태를 인식하면서 자기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은총의 요구를 알아듣고, 한 인격체로서 자기를 부르는 하느님께 대답한다고하였다. 이처럼 예수께 속한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과 인간의 활동은 여전히 구분된 상태로 점차 결합되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육화된 말씀이 자기 안에서 하려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그 협조 방식은 모든 이기적인 욕구를 넘어서 하느님의 활동을 승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평 가〕 베립은 성품이 엄격하였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일단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하면 집요하게 그 일이 관철되도록 추진하는 성격이었고 인간적으로 고집이 센 사람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열심한 기도 생활을 통하여 겸손함, 온유함, 가난함 등 복음적인 덕을 충실히 증거하였다. 또한 그는 영적 지도 신부로서 당시 프랑스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베륄은 성 프란치스코 드 살(St. Franciscus de Sales, 1567~1622)의 친구였고 성 빈천시오 아 바오로(Vincent de Paul, 1581~1660)가 자기 사명을 깨닫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었으며, 1636년 포르-루아알(Po-Royal) 수도원의 원장이 된 생-시랑 아빠스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베륄은 활동 속에서의 관상자라고 할 수 있다.
베륄은 오라토리오회의 설립자로서 17세기에 프랑스 가톨릭 교회가 부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성직자들의 양성 방법을 개선하였는데, 일례로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 신부들을 지도하면서 기도 생활과 매일 미사 봉헌을 주창하였다. 그는 늘 신약성서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매일 한 장씩 묵상하곤 하였다. 이 오라토리오회는 17세기 프랑스 종교사를 특징짓는 라자로회, 성 쉴피스회 같은 새로운 형태의 사제회들에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다. (-> 오라토리오회 ; 쉴피스회 ; 프랑스)
※ 참고문헌 H. Brémond, Histoire littéraire du sentiment religieux en France tom. 111, L'Ecole française, Paris, 1921 ; tom. vii, La Métaphrysi- que des saints, Paris, 1928/ C. Taveau, Le Cardinal de Bérulle, maitre de lavie spirituelle, Paris, 1933/ B. Kiesler, Die Struktur des Theozentrismus bei Bérulle und de Condren, Berlin, 1934/ L. Cognet, Les Origines de la spiritualité française au xviième siècle, Paris, 1949/ R. Bellemare, Le Sens de la créature dans la doctrine de Bérulle, Ottawa, 1959/J. Dagens, Bérulle et les origines de la restauration catlrlique(1575-161), Paris, 1963/ J.Moioli, Teologia della devozione B. al Verbo Incarmato, Varese, 1964/ M.Dupuy, Bérulle, une spiritualité de l'adoration, Paris, 1963 ; Bérulle et le sacerdoce. Etude historique et doctrinale : textes inédits, Paris, 1969. 〔Helène Lebrun〕
베륄, 피에르 드 (1575~1629)
Bérulle, Pierre 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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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베륄 추기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