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도, 클레르보의 (1090~1153)

Bernardus de Clairv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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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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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 시토 수도회의 수도승. 클레르보 수도원 원장. 신학자. 교회 학자. 축일은 8월 20일. 1090년 프랑스 디 종(Dijon) 근처의 퐁텐(Fontaine) 성(城)에서 부르고뉴 귀 족 가문 출신의 아버지 테셀랭 소텔(Tescelin Sorrel)과 어 머니 알레(Aleth)의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샤티용 (Châtillon)의 생-보를(Saint-Vorles) 학교에서 중세 시기의 삼학(三學)인 문법 · 논리학 · 수사학을 포함한 교육을 받았다. 매력적이고 재치 있고 학식과 웅변력을 갖춘 젊 은이로 칭찬을 받은 베르나르도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어머니가 1107년에 사망하자, 스스로 언급하였 듯이 이때부터 '완전한 회심을 향한 먼 길' 을 내닫기 시 작하였다. 1112년 4월 형제들과 친척들 및 다른 귀족들 을 포함한 30명의 동료들과 함께 시토회(Cîteaux)에 입회 한 후, 3년 동안 당시 가장 엄격하였던 시토회의 규율에 따라 영적 · 신학적 교육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빈혈, 편 두통, 위염, 고혈압, 식욕 부진 등의 병을 얻어 평생 동 안 고통을 겪었다. 1115년에는 시토회 대수도원장 스테 파노 하르딩(St. Stephen Harding, +1134)의 지시에 따라 12 명의 동료들과 함께 부르고뉴와 상파뉴(Champagne)의 경계 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수도원을 세웠다. 수도회의 개혁 : 베르나르도는 1115년에 살롱-쉬르마른(Châlon-su-Marne)의 주교이자 학자인 상포(Champeaux)의 기음(Guillaume)에게서 사제 서품을 받고, 수도 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초기 의 저술들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베르나르도의 영향으로 시토회는 변화되어 갔다. 극도의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공동체를 엄격하게 이끌어 간 그는, 1125년에 자립 체제를 갖춘 클레르보 수도원 원장이 되어 프랑스 와 다른 나라에도 클레르보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병 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애정적이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성격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렇지 만 성직자들의 사치와 방종이나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 등을 비난할 때는 대단히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클뤼니 수도회와의 관계 : 그 당시 클레르보 수도원은 엄격한 수도 생활의 모델이었고, 클뤼니(Cluny) 수도회 역시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회로서 베네딕도 수도회 내에서 대단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1119년 에 베르나르도는 클뤼니 수도회가 규율적인 면에서 타락 하였음을 반박하였는데(1119~1120년 베르나르도가그의 사 촌 로베르에게 보낸 서간 ; 1124~1125년의 Apologia ad Guilelmum S. Theodorici abbatem ; S. Bernardi Poera, ed. Leclercq-Rochais, Rome 1963, 3. 81 ~ 108 ; 이후, opera),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 하고 그는 클뤼니 수도회의 대수도원장인 가경자(可敬 者) 베드로(Peter the Venerable)와 친분을 유지하였다. 그 들은 논쟁을 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으며, 애정과 상호 배려로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그는 복음적 인 완성을 추구하는 다른 모든 방식보다 시토회의 생활 방식이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더 높은 생활 방식 을 추구한다면 성 베네딕도 규칙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liber de Precepto et dispensatione, Opera3. 283~ 288). 교회 활동 : 교회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품은 베르나 르도는 교회 활동으로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의 생애 에서 가장 원숙하고 활동적인 시기였던 1130~1145년 에 그는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130년 교황 호노리오 2세(1124~1130)가 사망하자 인노 천시오 2세(1130~1143)와 아나클레토 2세(1130~1138)가 추기경 회의에서 교황 후보자로 선출되었는데, 교황청을 지지하고 나름대로 교도권 안에서 전통주의자라고 자부 하던 이들은 아나클레토 2세를 지지한 반면에 수도자들 은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였다. 이들 두 명 중 누가 교 황직에 적합한 능력을 갖추었는지에 대하여 발언한 에탐 프(Étampes) 교회 회의에서, 베르나르도는 인노첸시오 2 세가 더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교황으로 선 출하는 것이 더 옳다고 하였다. 결국 인노첸시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대관식을 가졌고, 아나클레토 2세는 대립 교황이 되었다. 그 후 시토회는 강력한 교황의 지지 를 받아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으며, 시토회의 영향력이 최고 절정에 이른 때는 베르나르도의 제자였던 에우제니 오 3세(1145~1153)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였다. 베르 나르도는 교황의 의무와 교황이 관심을 두어야 할 종교 적 신비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한 《에우제니오 3세에게 보낸 제5서에 대한 숙고》(De consideratione libri quinque ad Eugenium Ⅲ, Opera3, 393~493)를 작성하여 이를 교황에 게 보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이 직접 프랑스 왕 루이 7세 와 함께 제2차 십자군(1147~1149)을 일으켜야 할 당위성 을 설명하기 위해 순회 설교를 하도록 조언하였다. 이 십 자군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십자군의 마음속에 십자 군의 순수한 의미를 심어 주었다. 또 그는 알비파(Albigenses) 이단에 대항하여 설교하기도 하였다. 이단 논쟁과 반박 : 베르나르도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학자들인 베드로 아벨라르(Pierre Abélard)와 포레의 질베 르(Gilbert de la Porrée)의 견해를 반박하였다. 아벨라르는 합리주의적인 경향을 기초로 한 변증법적 스콜라주의적 인 주장을 하였는데, 베르나르도는 그의 주장이 하느님 의 신비를 무시하는 것이며 스콜라주의 자체가 하나의 기교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스콜라주의는 신앙 의 영역 안에 머무른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벗어나는 경 향이 있으며, 비판적인 호기심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비 의 학교에서 인생을 배움으로써 하느님을 추구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주교들과 교황들로 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1144~1145년에는 또 브레쉬아(Brescia)의 아르놀두 스(Amoldus)의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아르놀두 스가 교회의 부(富)와 사치를 반대하는 설교를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로마인들의 교회에 대한 반란 운동을 조장했 기 때문이다. 이에 베르나르도는 교황 루치오 2세(1144~ 1145)와 에우제니오 3세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려고 노력 하였으며, 또한 1148년의 랭스 교회 회의에서는 푸아티 에(Poitiers)의 주교로서 그리스도의 신성은 오직 인간적 인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한 질베르의 단죄에도 참여하였 다(Tractatus ad Innocentium I pontificem, contra quaedam capitula errorum Abaelardi,PL 182, 1053~ 1057 ; Epistolae 188~ 189, 191 ~193, 331 ~ 338). 시성과 공경 : 엄격한 생활과 병으로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베르나르도는,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사망하였으며, 20년 뒤인 1174년 1월 18일 교황 알렉 산델 3세(1159~1181)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830 년에는 교황 비오 8세(1829~1830)에 의하여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고,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성인의 서거 800주년을 기념하여 1953년 5월 24일에 '꿀처럼 단 박 사' 라는 의미의 회칙 <독토르 멜리풀루우스>(Doctor Mellifluus)를 발표하였다. 베르나르도에 대한 공경 예식 은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비공식적으로 거행되었었다. 〔신학 사상과 저술〕 베르나르도의 사상은, 현대 신학 자들이 일컫는 전형적인 '수도자적 신학' 의 경향을 지닌 다. 그의 신학은 진리에 대한 깨끗하고 정돈된 상술(詳 述)이며 영혼들이 기도와 명상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려 는 의지와 같은 것이었다. 또 그의 신학은 새로운 유형의 사유나 새로운 귀결을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내적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베르나르도 신학의 원 천 자료는 원칙적으로는 성서였으며, 그 다음이 교부들 의 수도자 생활 규칙에 관한 저서들 특히 《베네딕도의 규칙서》였고,마지막이 전례였다. 베르나르도 신학의 전 체적인 요점은 "하느님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 랑으로 창조하였으며, 구원된 자로서 창조하였다. 그 사 랑의 최상의 증거는 말씀의 강생이며 구원이다. 그 사랑 의 또 다른 증거는 성모의 출현이다. 성모는 또한 구원의 위대한 계획 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라고 할 수 있 다. 그는 가톨릭 교의 안에서, 특히 구원 사업 안에서 마 리아의 역할에 대한 깊은 신학적인 견해를 드러내었다. 마리아론과 성사론 : 베르나르도는 클레르보에서 생활 하던 기간 중에 마리아론에 대해 짧지만 완벽한 논문인 <성모 예찬>(Praises of the Virgin Mother)을 작성하였는데, 이 논문에는 그의 마리아론에 대한 입장이 크게 세 가지 주장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첫째로, 그는 '마리아 의 원죄 없으신 잉태' 에 대해서는 지지하지 않았다. 둘 째로 성모 승천 교의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 았다고 여겨져 왔으나 르클레르(J. Leclerc)에 의해 발행 된 논문에서는, 이 교의에 관한 그의 설명을 분명하게 언 급하였다(Études sur St. Bernard et le texte de ses écrits, in Analecta S. Ordinis Cisterciensis 9, 1953) 셋째, 마리아의 중재에 대해서 는 베르나르도가 분명하게 주장하였던 주제 가운데 하나 였다(Sermo de aquaeductu, PL 183, 437~448). 한편 호교론적 이고 논쟁적 목적으로 쓴 《세례론》(Tractataus de baptismo) 에서 성사 신학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수 세(水洗)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고 혈세(血洗) 나 화세(火洗)로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은 그들 부모의 신앙 덕분으로 의화(義 化)될 수 있다고 하였다. 수도 신비적인 사상 : 베르나르도의 신학은 하느님께 로의 인격적인 상승 체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의 교의적인 가르침과 수도적인 가르침은 서로 분리될 수가 없다. 그의 수도 생활과 관련된 작품으로는 첫째, 《은총과 자유 의지에 관하여》(De gratia et libero arbitrio, Opera 3. 165~203)와 《겸손과 교만의 등급》(De gradibus humilitatis et superbiae, Opera 3. 13~59), 그리고 서간 <하느 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De diligendo Deo, Opera 3. 119 ~154)가 있다. 그리스도교 수도 생활의 교의적이고 역 사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타락한 상태와 회개한 상태의 인간 본성에 관하여 서술한 《은총과 자유 의지에 관하 여》에서 베르나르도는 의지의 우선 순위를 주장하였는 데, 죄로부터 의지의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를 통해서 강화된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자유 의지 의 역할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 하느님에게서 받은 구원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그는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 하였으며, 아우구스티노의 반(反)펠라지우스파에 대한 견해와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겸손과 교만의 등급》에서 베르나르도는 겸손이 사랑 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하면서 그 기본적인 중요성 을 강조하였는데, 첫 장에는 겸손의 세 가지 등급이, 두 번째 장에는 교만의 12등급이 서술되어 있다. 베르나르 도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기초로 하여 저술한 이 저 서에는 인간 영혼을 꿰뚫는 그의 특별한 능력이 드러나 있다. 서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는 그의 수 도적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그의 신비 적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서간은 하느님을 사랑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 는 동기 유발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그는 "하느님의 사랑은 어디서 생기는가? 하느님에게서 생긴 다. 이 사랑의 기준은 무엇인가? 무한정 사랑하는 것이 다"라고 하였다. 또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최초의 동 기는 은총이라고 하였다. 즉 하느님은 일반적으로 인류 에게 은총을 주었으며(ch.2), 보다 특별한 은총을 그리스 도인들에게 주었다(ch. 3~4)는 것이다. 두 번째 동기는 인간의 선(善)이다.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 행복의 갈 망을 채울 수 있다고 하였다. 《아가에 관한 43개의 설 교》(Sermo 43 super cantica, Opera 2. 43)에서 베르나르도는 유일한 지혜요 구원인 예수의 생애와 수난의 신비를 설 명하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완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그 분을 알 길이 없다" 고 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힘 을 "나의 보다 근본적인 내적인 철학" (mea subtilior, interior philosophia)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표현은 그의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신심의 정감적인 성 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에우제니오 3세에게 보낸 제4서에 대한 숙고》에도 중요한 수도 사상이 기록되어 있다. 제1권에서는 신심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명상의 필요성을 설명하였고(ch. 7~ 8), 제2권에서는 명상을 위한 "너, 네 아래에 있는 것들, 네 주변에 있는 것들, 네 위에 있는 것들" (te, quae sub te, quae circa te, quae supra te sunt, ch. 3)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제안하였다. 제3권과 제4권은 교황의 의무에 대해서 서 술하면서, 신비적 명상 속에서 충만과 절정을 발견함에 대하여 설명한 후 명상을 위한 많은 주제들을 다루었다. 베르나르도는 체계적인 설명으로 신비 신학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아가에 관한 43개의 설교》와 그의 다른 많은 작품 속에는 신비 체험의 결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영향과 평가〕 사상과 영성 면에서 성 베르나르도는 교회 생활에 가장 깊은 영향을 주었던 성인들 중 하나였 다. 그중 그가 수도자 생활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 는 수도자들에게 관상 기도에 전념하도록 고무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시토회를 개혁과 확장의 대중 운동으로 발전시키면서 실제로 초기 시토회의 개념을 정착시켰다. 그는 클레르보에 중세기 최고의 수도자 도서관을 설립하 였으며, 상포의 기음, 성 빅톨의 후고(Hugh ofSt. Victor) , 베드로 롬바르두스(Peter Lombard) 등과 교제하였다. 베 르나르도 사망 당시 클레르보 수도회는 유럽 여러 나라 에 세워져 68개에 이르렀으며, 클레르보 본원의 수도자 만도 700명에 이르렀다. 한편 그는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여서 그의 신학 사상은 비체계적이고 비조직적이었다. 그는 당시에 출현 한 초기 스콜라 학파의 변증법적인 방법에 맞서 성서와 교부들의 영향으로 살아간 수도자였다. 그리고 직관적이 자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던 그의 사상은 금욕적이고 전 례적인 전통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생 모르(SaintMaur) 학파의 대표적 전기 작가 마비용(J. Mabillon, 1632~ 1707)은 그를 일컬어 "마지막 교부이지만 첫째 교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ulimus inter Patres, sed primis certe non impar)고 하였다. 베르나르도의 논문에 나타난 신심과 신 비학은 후대 서양 신비학의 기초가 되었다. 후에 프란치 스코 학파에서는 성 베르나르도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노 선을 수용하였고, 17세기의 프랑스 학파는 베르나르도 신학의 기본적인 노선과 연관성을 드러내었다. 그 밖에 후대의 신학자들과 설교가들과 금욕자들에게 미친 영향 도 대단한 것이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에크하르트 (Eckehart), 단테, 프랑크푸르트 학파, 루터,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 오, 오라토리오회, 16~19세기의 영성주의자들 등이 그 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 시토회 ; 스콜라학 ; 마리아 론) ※ 참고문헌  P. Zerbi, 2, pp. 335~338/ J. Leclercq, 《Cath》 1, pp. 1474~1481/ B. Opferman, 《LthK》 2, pp. 239~2421 Donald Attwater, The Penguin Dictionary of Saints, Great Britain, 1983, PP. 62~63/ Enzo Lodi, Trans. by Jordan Aumann, OP., Saints ofThe Roman Calendar, pp. 234~2361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 Oxford, 1987, Pp. 44~451 M. Pacaut · M.-M. Davy, 《EU》4, PP. 22~24.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