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뇌, 시메온 프랑수아(1814~1866)

Berneux, Siméon Franç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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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뇌 주교(왼쪽)와 그가 사용하였던 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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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뇌 주교(왼쪽)와 그가 사용하였던 성합.


성인. 주교.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제4대 조선교구 장. 세례명은 시메온.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 축일은 9월 20일.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망(Mans) 교구의 샤토 뒤 르와르(Châeau-du-Loir)에서 태어나 프레시네 (Précigné)의 소신학교와 교구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37 년 5월 20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 직후 대신학교에 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해외 선교에 뜻을 두고 1839년 7 월 15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으며, 이듬해 1월 15일 통킹(Ton King, 현 북베트남) 지역을 선교하기 위해 마카오를 거쳐 1841년 1월 16일 통킹에 도착하였다. 한 편 베르뇌 신부는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 부에 머무르는 몇 주 동안 한국의 김대건(金大建), 최양 업(崔良業) 신학생에게 신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통킹에 도착하여 약 3개월 간 남딘(Nam-dinh)의 푹낙 (Phuc-nhac) 본당 근처에 숨어 있다가 1841년 4월 11일 에 체포된 베르뇌 신부는, 사형 선고를 받고 2년 동안 위 에(Hué)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1843년 3월 프랑스 군 함 에로인(Héroine)호의 레베크(Lévéque) 함장의 도움으 로 구출되었으며, 다음해 3월 15일 중국 선교를 위해 요 동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11년 간 베롤(Verolles) 주교 를 도와 활동하던 베르뇌 신부는 1849년에 만주 대목구 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오랫동안 이를 받아들이 지 않다가 1854년에 이르러 동료 신부들의 간청으로 그 해 12월 27일 주교 성성식을 갖게 되었는데, 본래 그는 '트레미타' (Trémita) 명의로 성성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éol, 高) 주교는 1845년 7월 15일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베르뇌 주교를 계승권을 가진 보좌 주교로 지명하였었다. 이에 따라 교황청에서는 1853년 2월 3일 페레올 주교가 사망 하자, 1854년 8월 5일자 교황 칙서를 통해 베르뇌 주교 를 갑사(Capsa) 명의의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조선으로 부임할 것을 명하였다. 이 교황 칙서는 성성식 3일 전에 베르뇌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조선 입국과 활동〕 베르뇌 주교는 1855년 9월 조선 입국을 위해 상해로 가 그곳에서 푸르티에(Pourthié, 申妖 案, 1830~1866) ,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 1866) 신부와 합류하였는데, 한편 조선에서는 그의 입국 을 돕기 위해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의 지시를 받은 홍봉주(洪鳳周, 토마스)가 1855년 3월 12일(음 2월 6일) 서울을 떠나 황해도 장연(長淵)을 거쳐 4월 21일(음 3월 17일) 강남에 도착해 있었다. 상해에서 홍봉주를 만난 베 르뇌 주교는 이듬해 1월 17일 상해를 떠나 요동, 장연, 해주(海州)를 거쳐 1856년 3월 29일 서울에 도착하였 다. 전동(典洞)에 있는 이군심(李君心)의 집에 머무르면 서 한국말을 배우는 등 활동 준비를 갖추었으나 위장 결 석(胃腸結石)이 재발되어 고생하다가, 3개월 후 어느 정 도 병세가 호전되자 서울 및 인근 60개의 마을을 중심으 로 활동을 시작한 베르뇌 주교는, 입국 이듬해인 1857 년 3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보좌 주교로 임 명하고, 주교 성성식 다음날인 3월 26일부터 3일 동안 에는 조선교구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베르 뇌 주교는 이 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을 <장 주교 윤시 제 우서>(張主敎示諸友書)란 사목 서한으로 같은 해 8월 2일 일반 신자들에게 반포하였고, 성직자들에게는 동일 한 내용을 1858년 4월에 라틴어로 발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교회가 점차 안정되고 체계화되어 갔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1856~1857년에는 신자 수가 15,206명에 이르렀고, 1858년에는 예비 신자가 3 배나 늘었으며, 1859년에는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전 포교지에서 성사가 집행되었다. 한편 교세가 증가하자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 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함과 동시에 교회 서적 간행에 도 노력하였다. 다블뤼 주교와 최양업 신부 등에게 기도 서와 교리 교육을 위한 책들을 저술하도록 하였고, 이 책 들을 교구 전 지역에 보급할 계획으로 1859년경에는 목 판 인쇄소를 서울에 설립하여 최형(崔炯, 베드로)에게 운영을 맡겼으며, 1864년 이전에 목판 인쇄소 한 곳을 더 증설하여 교리 문답, 기도서, 의식서(儀式書), 신심 생활 입문서(信心生活入門書) 등을 출간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이를 통해 신자들의 무지를 개선하고 성직자 부 족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현지인 사제 양 성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 조선의 사제 양성 기 관으로는 1855년 2월 4일 이전에 매스트르 신부가 설립 한 배론의 성 요셉 신학교가 있었지만 너무 궁벽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환경도 좋지 않아 1863년 이후 제 2의 신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시 약소(施藥所)를 설치하여 전교에 활용하였으며, 성영회 (聖嬰會) 사업도 전개하였다. <장 주교 윤시 제우서>에 '영해회의 규식' 을 수록한 데서도 성령회 사업에 대한 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1861년 3월 랑드르(Landre, 洪), 조안 노(Joanno, 吳), 리델(Ridel, 李福明), 칼레(Calais, 姜) 신 부가 조선에 부임하면서 베르뇌 주교는 새로운 힘을 얻 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같은 해 10월 조선교구를 동정 성 모에게 봉헌하면서 교구 전체를 8개 구역으로 나누는 동 시에 성 요셉 신학교를 제외한 7개 지역을 성모 축일들 가운데 하나로 명명하여 선교사들에게 맡겼고, 자신은 성모 무염 시태 지역인 서울 · 경기 지방을 담당하였다. 이 무렵 베르뇌 주교는 전동에서 태평동(太平洞)으로 거 처를 옮겨 홍봉주, 이선이(李先伊) 등과 함께 생활하였 으며, 1863년에는 황해도 · 평안도 지역으로 활동 범위 를 넓혀 1863~1865년 사이에 세 차례나 이 지역을 순 회하면서 성사를 베풀었다. 〔병인박해와 순교〕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의 노력으 로 1865년 조선의 신자수는 23,000명으로 증가하였는 데, 이것은 그가 입국할 당시와 비교할 때 8,000명이나 늘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교회는 곧 이어 일어난 병 인박해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한편 이에 앞서 러시아 는 1860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 일대를 차지한 뒤 자주 조선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강요하였다. 그러자 김면호 (金勉浩, 토마스),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이유일(李惟 一, 안토니오), 남종삼(南鐘三, 요한) 등은 이를 이용하 여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여러 차례 대원군 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서양 제국과 동맹을 맺음으 로써 러시아의 남진을 막자는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하 면서 대원군과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을 주선하였다. 당 시 황해도 · 평안도 지방을 순시하던 베르뇌 주교는 대원 군과의 면담 소식을 접하고 1866년 1월 29일 서둘러 귀 경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의 회동 이 지연된 상태였고, 러시아의 위협도 감소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의 박해 상황을 전한 동지사(冬至 使) 이흥민(李興敏)의 보고 등이 이어지면서 대원군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조두순(趙斗淳), 김 병학(金炳學) 등 대신들의 정치적 공세가 강하게 제기되 면서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통해 자신의 정치 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했 던 베르뇌 주교는 대원군과의 면담 약속을 기다리다가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1866년 2월 23일(음 1월 9일) 자신의 거처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베르뇌 주교는, 희생과 순교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 교우들을 사 랑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 으며, 신장 결석으로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른 선교 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보다 더 넓은 지역을 맡아 사 목하였고, 더 심한 희생도 감수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이 미 그가 동양 선교를 자원하면서부터 지녔던 것으로, 온 갖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에 나선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 에 동참한다는 각오와 이를 자신의 신앙 안에서 소화할 만한 영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1841년 통킹에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나 구사일생으 로 구출되었을 때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곳에 계속 남아 활동하기를 원하였던 사실, 또 주교로 임명되 었을 때 보여 준 겸손과 순명의 정신, 그리고 위에서 언 급한 희생 정신 등은 모두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뿐만 아 니라 그는 조선 교우들의 신앙 생활을 심화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으며, 조선 땅을 안토(安土)로 여기면서 본 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추관(推官)의 제의도 거절한 채 순교를 자청하였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 순교 정신이야말로 베르뇌 주교의 선교 생활을 단적으로 설명 해 주는 사상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체포된 후 먼저 우포도청으로 끌려간 베르뇌 주교는 이곳에서 2차례 문초를 받은 뒤, 3월 2일 의금부로 이송 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7일(음 1월 21일) 새남터에 서 브르트니에르(Bratenières, 白, 1838~1866), 도리(Dorie, 金, 1839~1866), 볼리외(Beaulieu, 徐沒禮, 1840~1866) 신 부 등과 함께 군문 효수형을 당했다. 그들의 시신은 형장 에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월 12일(음 3월 28 일)에 박순지(朴順之, 요한)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안장되었으며, 5월 27일(음 4월 14일)에는 다시 와서(瓦署, 용산구 한강로 3가의 왜고개)로 옮겨졌다. 그 후 1899년 10월 3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9월 5일에는 명동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가 시 복을 앞둔 1967년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오 늘에 이른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에서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 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남종삼 ; 병인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가톨릭 사전》 Adrien Launay, Mémorial de la Société des Missions-Érangéres 1658-1913/ 《捕盜廳謄錄》 《推 案及勒案入邪獄罪人鍾三鳳周等職案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장 주교 윤시 제우서>, 1857/ 최석우 편저, 《丙寅迫害資料研究》, 한국 교회사연구소, 1968/ 《병 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 소, 1987/ 배세영, <한국 파리 외방전교회와 그 선교 방침>, 《한국 교 회사 논문집》 I ,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이병호, <프랑스 선교사 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교회사 연구》 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최석우,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진출의 의미>, 《교회사 연 구》 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