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댜예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1874~1948)

Berdyajev, Nikolai Aleksandrowit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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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베르댜예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베르댜예프.


러시아의 종교 철학자. 러시아적 사고의 정통을 기초 로 한 실존적 인격주의와 자유주의 철학자. 1874년 3월 6일 키예프(Kiev)에서 군인 귀족 가문의 둘째로 태어나 비교적 진보적이었으나 종교적인 분위기가 아닌 환경에 서 성장하였다. 1894년 키예프 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체스토프(L. Chestov)를 만나 마르크스주의 모임에 참여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으로 1898년에 체포 되어 1900년부터 북부 러시아의 볼로그다(Vologda)에서 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석방된 뒤 독일 전역을 여 행하다가 1904년 러시아로 돌아왔다. 신비주의와 니체의 사상에 심취한 베르댜예프는 마르크스주의에서 관념론으로 돌아선 불가코프(S. Bulgakov, 1871~1944)와 함께 1904년에 사회-종교적인 정기 간행 물 《새로운 길》(Novy Put)과 《삶의 제 문제들》(Voprosy Zhizni)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베르댜예프에게 사상적으 로 영향을 준 사람들은 슬라브주의자인 차다예프(P. Ya.Chaadajev), 코미아코프(Khomiakv), 헤르젠(A.I. Herzen) , 그리고 서유럽주의자인 벨린스키(V.G. Belinskii), , 바쿠닌 (M.A. Bakunin), 체르니세프스키(N.G. Chernyshevskii) 등 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 그 후에는 그것의 칸트적인 수정이라는 오직 한 가지 사상 적 방향으로 모아진다. 정치적 급진주의에 빠졌지만 정 통 마르크스주의에 만족하지 않았던 그는, 윤리적인 것 과 개인 인격의 존엄성과 가치에 최고의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의 결정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칸트의 윤리학에서 그 답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 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형태의 관념론을 인정하지 않 았기에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였는데, 이러한 마르 크스주의와의 결별은 베르댜예프에게 관념에서 종교 철 학, 특히 동방 교회의 수용으로 나타났다. 그의 주요 사 상적 주제는 자유 · 창조성 · 종말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 러한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로는 뵈메(J. Böhme), 도스 토예프스키(F.M. Dostoevsky), 솔로비요프(V.S. Solovyov), 페도로프(N. Fedorov), 메레즈코프스키(D.S. Merezhkovsky) 등이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으로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1907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 지고 있던 그는 한 논설을 통해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 였다. 그로 인해 1914년에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유배 형이 선고되었지만 1917년 10월 혁명으로 가까스로 처 벌을 면하였다. 그 후 소비에트 공산 정권하에서 1920년부터 모스크 바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2년 간 봉직하면서 '정신 문화 를 위한 자유 아카데미' 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정통 마 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몇 차례의 감금과 투옥을 반복한 끝에 1922년 다른 러시아 사상가, 학자 그리고 작가들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잠시 베를린에 머무르면서 세웠던 '종교 철학회' 를 1924년에 파리 클라마르(Clamart)로 옮긴 그는, 이후 대표적인 러 시아 망명인 대변인이자 공산주의의 비판가로 활동하면 서 종교적 · 철학적 평론지인 《길》(Put)을 창간 · 편집하 였으며(1925~1940), , 대부분의 작품을 이때 저술하였다. 그 자신은 러시아 정교회의 급진파적인 경향을 지녔지 만, 동방 교회, 프로테스탄트, 가톨릭 인사들과 접촉하며 신앙적 모임을 조직하였다. 또한, 무니(E. Mounier)와 그 가 발간하는 잡지 《에스프리》(Ésprit)를 통해 프랑스의 인 격주의자(personalist)들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47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 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서유 럽 세계에 깊이 뿌리박힌 러시아인의 망명에 대한 적의 적인 태도에 실망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와 그 후에 온갖 고생을 감수하더라도 귀환하려는 희망을 지녔다. 그러나 자신의 저서 발행 때문에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8년 3월 24일 프랑스 클라마르에서 사망하였다. 〔저 서〕 베르댜예프의 세계적인 명성은 《새로운 중세》 (Das neue Miitelalter, 1924)라는 작품으로 얻게 되었지만, 이 저서는 극단적인 시대 비판적인 인물들로부터 비모범 적인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회 철학에서의 주체 주의와 개별주의)(Subjecktivismus und Individualismus in der Gesellschalfsphilosophie, 1901)에서는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이면서도 관념주의적인 사상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리고 《새로운 종교적 인식과 사회》(Neues religiöses Bewußtsein und Gesellschaft, 1907)의 개요에서는 그의 그리스도교적·종교적 전향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 책은 1927년의 《자유 정신의 철학》(Philosophie des freien Geistes)과 1954년에 간행된 《진리와 계시》(Wahrheit und Offenbarung)와 함께 종교 철학적인 3부작을 이룬다. 또 1931년에 발간된 《진리와 공산주의의 허위》(Wahrheit und Liige des Kommunismus)에는 그의 그리스도교 정신과 마르크스주의 비 판이 수록되어 있으며, 《러시아의 이념》(Die Russische Idee, 1946)에는 러시아적인 전통과 배경이 담겨져 있다. 또한 《창조의 의미 : 인간의 의화의 시도》(Der Sinn des Schaffens-Versuch einer Rechifertigung des Menschen, 1916)에 서 그는 대담한 사유 형식으로 18세기 독일 문학 사조의 하나인 '질풍 노도' (Stum und Drang)로 돌진하는 면모를 보였다. 《자유의 철학》(Die Philosophie der Freiheit, 1911)에 서는 그의 실존적인 사상이 드러나 있는데, 베르댜예프 는 이 저서를 《자아와 객체 세계》(Das Ich und die Welt der Objekte, 1934)에서 서유럽적인 맥락으로 재구성하였다. 그의 본래적 체계학인 역설적 윤리학을 담은 《인간 결정 에 관하여》(Von der Bestimmung der Menschen, 1931), 인격 주의적 철학인 《인간의 노예 근성과 자유에 관하여》(Von der Knechtschaft und Freiheit des Menschen, 1939), 그의 의미 (Sinn)의 추구에 대한 자서전적인 증언록인 《자기 인식》 (Selbsterkenntnis, 1949)은 모두 그의 후기 작품들이다. 《종 말론적 형이상학의 시도》(Versuch einer eschatologischen Metaphysik, 1947)는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배경과 사상〕 사상적 배경 : 베르댜예프의 철학은 고 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와 2~3세기의 신학자 오리제네스(185-254)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알렉산드 리아 학파와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335?~395?)를 중심으 로 하는 가빠도기아 사상을 기초로 러시아의 종교적 사 상과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노시스주의 (Gnosticism), 중세적 모범주의(exemplarism), 라인란트의 신비주의, 독일 관념론의 모습을 보이는 실존적이며 종 말론적인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교 창 조관 안에서 '최후 변모' (transfiguration)에 대한 약속에 의해 드러난 인간 실존의 최고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다. 주어져 있는 세계에 대한 불만족과 그것을 쇄신하려는 희망이 베르다예프로 하여금 예언적이고 신비적인 언어 로 논리를 전개하도록 촉구하였다. 인격을 유일하고 보 편적인 신인(神人) 양성의 상(像)으로 창조하는 것이 인 간의 몫이라고 생각한 그에게 있어서 창조란, 최종적으 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인간 공동체(Sobomost, 함 께함, 친교, 화해)를 준비하는 '실존적인 시간' 안에서 실 현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베르다예프의 사상은 많은 철학자의 사상을 따 르는 동시에 그것을 비판하면서 독특하게 발전되어 왔 다. 그는 칸트의 사상을 따르지만 동시에 그의 사상을 비 판하여 '보다 실존에서 먼' (existenzfremder) 세계와 '보다 실존에서 가까운' (existenznäher) 세계 사이의 명백한 이 원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마르크스를 따르는 동시에 객 체 세계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으며, 니체를 따르지만 창조자에 대한 상반된 사상을 전개하였다. 도스토예프스 키는 그의 자유에 대한 사상에 동기를 부여하였는데, 이 러한 그의 사상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과 함께 종교 재 판장으로부터 반박을 받았다. 뵈메의 '심연' (Ungrund)에 관한 직관은 베르댜예프로 하여금 선(先) 존재하거나 창 조되지 않은 자유의 개념과 신에 대하여 언급하게 하였 다. 그런데 그는 톨스토이와 같이 신을 무능하거나 무력 한 신으로 이해하였으며, 그것은 해방적인 상호 관계를 여는 인간과 관계된 신성과 신과 관계된 인간성을 그리 스도의 신인성(神人性)에서 찾게 하였다. 여기에 그는 동방 교회의 인간-그리스도론' 의 귀결과 공동체 안에서 구원에 대한 공동 책임성을 결합시켰다. 그 외에도 그에 게는 칸트, 베르그송, 쉴러 그리고 야스퍼스 등과 다소 유사한 사상적 배경을 볼 수 있으며, 헤겔, 세스토브 등 의 사상과 대립적인 관계에서 그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사상적 전개 : 베르다예프는 정신이 인격적인 실존이 라고 생각하였으나, 존재적으로가 아니라 역동적 창조적 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에게서 이 정신은 사회화되고, 밖으로 드러나고, 소외되고 비인격화됨으로써 객관화되 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자유는 본질적으로 창조되 지 않은 자유, 즉 신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심연으로서 무(無) 안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세계 는 무로부터 창조되었는데, 무는 텅 빈 것이 아니라 아리 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물질화된 순수 가능태와 유사한 '심연' 이다. 이 순수 가능태로서의 심연은 비합리적이고 자유로워, 여기에서 신 · 정신 · 초자연적인 것이 생겨난 다. 즉 모든 정신적인 것이 생겨난다. 신은 모든 창조적 행위에 실제로 현존하며 자신의 모든 창조에 대하여 힘 을 미친다. 신은 자신의 사랑의 대상을 원했기 때문에, 세상과 인간을 무로부터 창조해 냈다. 그러므로 세상은 무, 즉 비합리적 자유와 창조주로서의 신의 조합이다. 그 런데 신은 비합리적인 자유를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이에 대해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하고 책임지지도 않는다. 악을 낳은 것은 비합리적인 자유이다. 비합리적 인 자유는 세상이 신에 대하여 스스로를 주장할 때 세계 의 고유한 위계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악을 산출하였다. 신은 악을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창조주로서가 아 니라,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내려와 세상을 계몽하고 영 적 창조물인 세계의 영적 요소를 다시 일깨움으로써 비 합리적인 자유로부터 태어난 악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 므로 강생(incarmatio)에서 신은 사랑을 통하여 인간을 자 연으로부터 구별한다. 이러한 신의 행위에 의해서 신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사랑이 생겨난다. 이러한 자유는 창조적이고 영적이며, 따라서 인간과 세계의 구원의 근 원이기도 하다. 베르댜예프의 이런 사상은 모순적이고 복잡하며 다차원적인 실존에 대한 그의 경험에서 유래한다. 그의 경험 과 사유의 성향은, 존재에 대한 자유의 우위, 일반에 대 한 인격의 우위, 법칙에 대한 사랑의 우위라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위로 상승하는 자유와 아래로 하강하는 사 랑 사이의 긴장을 지니며, 자기 파괴적인 주체와 타자 지 배적인 객체 사이의 틈을 극복하려 시도한다. 그에게 종 교는 자유 위에 기초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협동적 · 쌍무적 관계를 의미한다. 하느님은 인간 안에서 태어나 고, 인간도 역시 하느님 안에서 태어난다. 세상은 미완성 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으로부터 자유, 창조적 응답 그리고 세상의 지속적인 창조에 인간의 참여를 기다린 다. 그러나 하느님과 정반대로 인간은 자신의 창조적 노 력에 대해 물질을 요구한다. 창조적 행위의 비극은 객관 화로 연결되는데, 새로운 존재 대신 인간은 그림, 조각, 책, 기계, 사회 조직들을 생산한다. 따라서 베르댜예프는 새로운 존재의 모습으로서 인간을 이야기한다. 인간에게는 신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 인간이 창조적 인 존재이고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한, 그는 아직도 영혼 이다. 창조적인 행위 속에서 인간은 영적 영역의 시민이 다. 인간은 사실과 대조되는 가치와 의미를 지닌 영적인 실재임을 본능적으로 안다. 왜냐하면 창조적인 행위란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데 사 용한 에너지이며 은총의 힘이다. 사랑은 융합시키는 인 격으로 머물게 하는 권능을 지닌다. 사랑에서 관계는 그 것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당신의 관계이다. 이것이 가능한 한 인간은 이제 구원된 하나의 영혼이다. 하느님 의 나라는 영혼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 모두를 위 한 것이다. 이같이 인간학적으로 그는,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객체에게 인격이 되어지는 것과, 관계 충만한 실존적인 중심을 이루는 것과 연속과 변화의 단일체를 이루는 것 등의 과제를 제시하였다. 사회 철학적으로 그는, 객관적 인 사회에서부터 실존적인 공동체로 이전하는 계기를 마 련하고 있다. 윤리학적인 영역에서 그는, 규범적 법칙 윤 리학에서부터 반복될 수 없는 개체의 창조적인 윤리학으 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그는 사유의 그리스도론적인 중 심 안에 자유와 사랑의 일치를 기초 짓고 있으며, 그것은 소외된 세계에서는 혁명적이고 비연속적인 태도로, 소외 되지 않은 세계에서는 생산적이고 연속적인 태도로 나타 나는 것이다. 그와 상응하여서 그는, 계시적인 결정이 아 닌 예언적인 선동으로 종말론적인 입장을 나타낸다. 또 한 함께 고통당하고, 해방하는 신의 육화적인 관계를 계 시하는 신학적 입장을 강조한다. 〔평 가〕 베르다예프는 러시아의 그리스도교적 정신을 중재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시대의 '사랑의 사람'(philo)으로서 그리스도교적 언어를 많이 사용한 사람이 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 종교 철학의 가장 잘 알려진 대 표자로서 비판적인 대화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드러난 영역을 제시할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실 존 사유의 유형을 각인시켰고, 여기에 사회성의 차원을 첨부시켰다. 그러나 공식적인 실존주의로 강조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신비가, 그노시스주의자, 계시 전달자 로 여겨지며, 마니교도로도 여겨진다. 또 그의 반토마스 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서유럽 그리스도교 철학의 반대자 로서 평가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에 대한 판단 들은, 그에게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인격의 긍정으로, 또 그의 세계 변화의 의지와 예언자적인 성향을 통하여 정정될 수 있다. 베르다예프는 자유, 창조와 완전한 정신에 대한 입장 으로써 사상가로서 나타난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교 철학자로서 남아 있고,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주요 개념 을 그 자체로 보존하려는 결단으로써 하나의 전형적인 형태를 지닌다. 그 안에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일깨움이 엿보이는데, 그것은 깊은 공동체 의식과 결합되어 있는 진정한 자유이다. 또한 그의 자유 창조적인 해석은 보편 신학을 위해 간과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베르댜예 프는 학파를 형성하지도 않았으므로 철학자와 신학자, 사회와 역사 사상가들에 대한 그의 영향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는 스스로를 하나의 주의(主義)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생각하지 않았다. (→ 종교 철학 ; 러시아) ※ 참고문헌  D.A. Drennen, 2, pp. 319~320/ Wolfgang Dietrich, 《TRE》, pp. 595~5971 막스 물러 · 알로이스 할더, 강성위 역, 《철학 소사전》, 이문출판사, pp. 108~109/ 김규영, <시간론의 명맥>, 《철학과 신학의 만남》, 정의채 신부 회갑 기념 논문집, 정의채 신부 회갑 기념 사업회, 1985, pp. 33~39/ 김규영, 《시간론》, 서강 학술 총 서 ,서강대학교 출판부, pp. 274~2931 제임스 이디 외 엮음, 정해창 역, 《러시아 철학》 Ⅲ, 고려 원, 1992, pp. 165~250/ J. Wicczynski, The Modern Encyclopedia of Russian and Soviet History, Academic International Press, 1977, pp. 5~241 C.S. Calian, 《ER》2, pp. 111~112. 〔郭承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