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모렐, 조제프 (1860~1937)
Vermorel, 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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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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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모렐 신부(왼쪽)와 나바위 본당 관할의 안대 공소에서 이상화 신부와 함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대구 대목구 부주 교. 세례명은 요셉. 한국명은 장약슬(張若瑟) 1860년 3 월 28일 프랑스 리용(Lyon) 교구의 생 클레망 드 베르 (Saint-Clément de Vers)에서 1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슈브리에(P.Cheviner) 신부의 영향을 받아 사 제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알릭스(Alix) 신학교를 졸업한 다음 1885년 9월 16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 다. 그리고 1887년 9월 24일 사제로 서품된 직후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서 그 해 11월 2일 프랑스를 출발하 였다. 1888년 1월 14일 한국에 도착한 베르모렐 신부는 임 시로 서울의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중, 같은 해 6월 전라도 지방으로 파견되어 전교 활동을 하다가 전주(全州, 현 전동) 본당 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이때 그는 배경집(裴敬集, 베드로) 회장의 안내 로 전라도 지역의 각 공소를 순방하면서 부임지인 소양 면 대성동(현 完州郡 所陽面 大勝里)으로 갔는데, 도중에 고산 빼재(完州郡 雲洲面 九梯里, 일명 秀峙)에서 사목하다 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던 동료 라푸르카 드(Lafourcade, 羅亨默) 신부를 찾아가 그 해 7월 10일 병자성사를 주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 았다. 이에 베르모렐 신부는 라푸르카드 신부의 후임으 로 고산 빼재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곧 이어 전주 지방의 여러 공소 순방을 재개하였다. 당시 베르모렐 신부가 담 당한 지역은 부안 · 고부 · 정읍 · 장성 · 고창 · 담양 · 순 청 · 태인 · 임실 · 금구 등 산간 지대의 30여 개 공소였 는데, 그는 가을 판공 후 이곳들의 중앙에 위치한 금구 배재(完州郡 九耳面 安德里, 일명 梨峴)로 거처를 이전하고 배재 본당을 설립했다. 그 결과 베르모렐 신부는 전주 본 당에 부임한 보두네(F.X. Baudounet, 尹沙勿) 신부, 강원 도에서 사목하다가 1891년 1월 10일에 고산 차돌배기 (현 白石,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부임한 우도(P.Oudot, 吳 保祿) 신부와 함께 전라도 지역을 셋으로 분할하여 한 곳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1891년 봄 베르모렐 신부 는 보두네 신부와 피정차 상경하다가 화적 떼를 만나 상 해를 입고 물건을 약탈당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 였다. 1893년 4월 22일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였던 리우빌(A. Liouville, 柳達榮) 신부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 라 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약 3년 동안 신학생 교육에 주력했으며, 1896년 1월 10일에는 원산(元山)교안으로 곤란을 겪던 브레(A. Bret, 白類斯) 신부의 후임으로 원산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원산에 부임한 베르모렐 신 부는 그 해 5월 회령(會寧)에서 그를 찾아온 김영렬(金 英烈, 요한)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간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신자들의 재교육에도 관심 을 기울여 함경도 최초의 가톨릭 교리 학교를 설립하였 다. 이어 1897년 5월에 처음 부임지였던 전라도 지역으 로 전임되어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에 나바위(옛 華山) 본 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으나, 1899년 4월에 일어난 '강경포교안' 으로 6개월 동안 많은 고통 을 겪어야만 하였다. 1911년 4월 8일 조선교구에서 대구 대목구(代牧區) 가 분리 설정되어 경상도 및 전라도 지역을 관할하게 되 자 베르모렐 신부는 그 해 6월 29일 초대 부주교로 임명 되어 교구장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와 함께 교 구 행정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는데, 잠시 대구교구 주교 좌인 계산동(桂山洞) 본당에 거처하였을 뿐 그는 계속 나바위 본당에 거주하면서 사목하였다. 그러다가 1931 년 일반 사목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 녀회 대구 분원의 지도 신부로 활동하였고, 아울러 고아 원 사업에도 많은 관심으로 기울였다. 이처럼 베르모렐 신부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 땅에 입국한 이후 1937년 5월 31일 77세의 나이로 사 망할 때까지, 1918년에 맹장 수술차 중국 북경(北京)에 갔던 것을 제외하면 50년 동안 한 번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으며, 전교 · 교육 · 사회 사업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망 후 대구 남산동(南山洞) 성직자 묘지에 묻 혔다. (⇦ 장약슬 ; → 강경 본당 ; 강경포 사건 ; 나바위 본당 ; 대구대교구 ; 배재 본당 ; 전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경합잡지》 855호(1937. 6. 12)/《서울 대교구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 李元淳, <朝鮮末期社 會의 '敎案 研究>, 《韓國天主敎會史研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pp. 167~240/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 톨릭신문사, 1987/ 一, 《뮈텔 주교 일기》 I ~Ⅲ, 천주교 명동 교회, 1986, 1993/ 전동 성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 호남교회사연구소, 《전 동 성당 100년사》,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 교회, 1996/ 한국교회사연 구소, 《함경도 선교사 서한집》 I(원산 본당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전동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사업회 · 한국교회 사연구소 편, 《전동 본당 100년사 자료집》 1집, 천주교 전동 李文 교회, 1992/ 崔奭祐, 《韓國天主教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호 남교회사연구소, 《전주교구사 연표》, 1993/ 김진소, 《신바람 사는 보 람》,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한국교회사연구소, 《함경도 천주교회 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M.E.P. Compte Rendu 1937, nécrologie, Vermorel. [李裕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