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몽, 쥘 마리 Bermond, Jules Marie(1881 ~ 1967)

글자 크기
5
베르몽 신부.

베르몽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 속 한국 선교사. 세례 명은 율리오. 한국 이 름은 목세영(睦世榮) 1881년 2월 12일 알 프스의 고산 지대 벤 (Veynes)의 생 토반 도 즈(Saint-Auban d'Ose) 에서 태어나서 가프 (Gap) 소신학교를 마 친 뒤 1900년 9월 15 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으 며, 1905년 6월 29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8월 12일 시잘 레(P. Chizallet, 池士元) 신부와 함께 파리를 출발하였다. 그 해 10월 11일 한국에 도착한 후 서울의 주교관에서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중, 1906년 봄에 전북 완 주군 승치리의 되재(升時, 현 高山) 본당에 파견되어 약 6년 동안 사목하면서 20여 개 공소의 신자 2,000여 명 을 돌보았다. 그 후 베르몽 신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본국으 로 동원되는 선교사들이 늘어남에 따라, 1914년 6월 대 구교구의 카넬(M. Canelle, 簡弘模) 신부가 사목했던 마 산(馬山, 현 玩月洞)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부임 직 후부터 성당과 부속 건물의 건립에 주력한 베르몽 신부 는, 1931년 사제관과 수녀원을 완공하여 샬트르 성 바 오로 수녀회 수녀들을 초청했고, 1932년 6월에는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며, 본당 내에 청년회를 조직하였 다. 또 1935년에는 성지(聖旨)학교를 개축하고 성지 강 습소를 개설하는 등 교세 신장 및 본당 발전을 위해 다양 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의 재임 중에 마산 본당에 서 옥포(玉浦) 본당, 함안(咸安) 본당, 거제(巨濟) 본당 등이 분리되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에는 일제에 의해 연금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 나, 8 · 15 광복 후 다시 마산 본당에서 사목하다가 약 3 년 뒤인 1948년 6월에 서울 대목구에서 충청남도가 독 립 포교지로 분리되면서 논산의 강경(江景) 본당 주임으 로 전임되었다. 강경에 부임한 지 2년 만에 베르몽 신부는 한국 전쟁 을 겪어야만 하였는데, 당시 그는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 매는 처지였으나 동료 신부 및 교우들의 도움으로 위험 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황폐해진 본당 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여 1957년에 성 요셉 구호 의료 의원을, 1959년에는 사제관을, 그리고 1961년에는 성 당을 건립하는 등 본당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헌신하였 다. 또한 식물학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각종 식물로 영약 을 만들어 신자들과 외교인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이후 베르몽 신부는 고령으로 점 차 성사 집행 및 본당 사목 등의 격무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82세 때인 1963년 8월 현직 사목에서 은퇴하여 강 경 본당 사제관에서 지냈다. 그리고 86세 때인 1967년 9월 12일 노환으로 사망하여 본당 묘지에 묻혔다. 이처럼 한국 선교사로 입국한 후 약 62년 동안 한 번 도 한국을 떠난 적이 없을 만큼 남다른 애착과 관심을 가 지고 사목한 베르몽 신부는 사망하기 1년 전인 1966년 10월 11일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최 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Légion d'honner) 기사장을 수여받 았다. (→ 강경 본당 ; 완월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시보> 585호(1967. 9. 17), 3 면/ 김구정,《천주교 경남 발전사》, 天主教 釜山教區, 1967/ 한국교회 사연구소 · 대전교구 홍보국 역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 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5/ MEP., Compte Rendu 1967, nécrologie, Bermond.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