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 노르베르트 (1878~1956)

Weber, Norbert

글자 크기
5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
1 / 5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


신부.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Congregatio Ottiliensis Ordinis Sancti Benedicti) 초대 수석 아빠스. 세례 명은 요셉. 1870년 12월 20일 독일 오틸리엔에서 북쪽 으로 40km 떨어진 랑바이트(Langweid) 지방에서 하급 철도 고용원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본당 신 부의 권유로 형 막스(Max)와 함께 딜링겐(Dillingen) 수 도원의 소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어 대신학교에 진 학한 후, 1895년 7월 졸업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었 다. 그러나 신학교 재학 시절 상트 오틸리엔 소속의 수도 자들과 친숙하게 지내던 그는, 그들로부터 선교에 대한 많은 감화를 받아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할 것을 결심하였다. 서품된 지 한 달 만에 소속 교 구인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교구의 회출(Hötzl) 주교 의 허락을 얻어 입회한 베버 신부는, 그 해 11월부터 약 2년 동안의 수련기를 보낸 후 1897년 11월 1일 노르베 르트' 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도 서원을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선교 신학교에 파견되어 물리학과 자연 과학을 가르쳤으며, 1900년에는 보이론(Beuron) 수도원에서 파 견되어 임시 원장을 맡고 있던 쇼버(ldefons Schober) 아 빠스로부터 지도력을 인정받아 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02년 6월 28일 상트 오틸리엔이 대수도원으로 승격 된 후에는 가장 유력한 수석 아빠스 후보 물망에 올랐는 데, 그 해 12월 18일에 개최된 선거 회의에서 수석 아빠 스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빠스 취임 초기부터 베네딕도회의 규칙에 따라 보다 많은 수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는 한 편, 이들 수도자들이 지역 교회의 필요에 따라 교육 · 학 문 · 선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많은 지 원을 하였으며, 1905년 초에는 약 9개월 동안 동아프리 카(현 탄자니아) 각지를 순회한 후 1908년에 《온 세상으 로 가라》(Euntes in mundum universum)라는 작은 책자를 간행하였다. 이 책에는 베네딕도회의 오랜 선교 활동의 역사를 비롯하여 회원들의 복음 전파 및 그리스도교 문 명 전달 활동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이 제시되어 있어, 이 후 베네덕도회에서 선교 전략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주 었다. 한편 1908년 9월 15일 베버 수석 아빠스는 한국에 진 출할 수도회를 물색하기 위해 유럽 각지를 방문하고 있 던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를 만나 선교사 파견을 제의받았는데, 그는 당시 수도회가 한국 교회의 요청을 받아들일 만한 입장이 못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희망찬 장래에 대한 뮈텔 주교의 설명을 듣 고 이를 수락하였다. 이듬해 2월 25일 사우어(B. Sauer, 辛上院) 원장과 엔쇼프(D. Enschoff) 신부를 파견한 데 이 어, 베버 수석 아빠스는 같은 해 5월 14일자로 뮈텔 주 교에게 서한을 보내 두 신부를 돌보아 준 것에 감사하고, 자신도 곧 한국을 방문할 계획임을 알렸다. 수석 아빠스 로서 포교지에 파견된 회원들의 활동에 대해 많은 관심 을 가지고 있던 그는, 회원들의 포교지에서의 활동을 격 려하기 위해 직접 포교지를 방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문화의 전반적인 면모를 이해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1911년 2월 22일 상트 루드비히(St. Ludwig) 수도원 의 폴겔(P.Volgel) 원장과 함께 방한한 베버 수석 아빠스 는, 그 해 6월 24일까지 약 4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서울 의 백동(栢洞, 현 혜화동) 수도원과 명동 대성당을 비롯하 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하우현(下牛峴), 수원(水原), 안성(安城) 공주(公州), 해주(海州) 신천(信川), 평양 (平壤)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명소를 두루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풍습에 심취하여 전국의 유명 사찰이나 기타 관혼상제 예식이 거행되는 곳을 자 주 찾아 이를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진과 그림으로도 남겼다. 본국으로 돌아간 후 한국 여 행 중에 겪은 여러 가지 경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조용 한 아침의 나라(朝鮮)》(Im Lande der Morgenstile)라는 책 을 1915년에 간행했다. 이 책에서 그는 총 460여 면에 걸쳐 한국의 풍속 · 민속 · 민간 신앙과 한국에서의 베네 덕도회의 선교 활동 등을 소개하였다. 그 밖에 290여 장 의 흑백 및 컬러 사진을 수록함으로써, 1910년대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 및 그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 그리고 문화의 편린들을 보여 주었다. 또한 이 책은 일제 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점차 사라져 가던 한국의 순수한 전통 문화와 예술 및 민속,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의 실상 등을 처음으로 독일 및 유럽 각국에 알렸다는 점에서 매 우 큰 의의를 지닌다. 1925년 5월 14일에는 한국을 보다 더 자세히 소개하 기 위해 촬영 기사까지 대동하고 재입국하여 당시 베네 덕도회의 사목 담당 관할 구역이었던 함경도와 북간도, 그리고 금강산(金剛山)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 는데, 이때에는 한국의 특징적인 문화와 베네딕도회의 전교 활동상을 담은 기록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귀 국 후 이 자료들을 모아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국의 불교 와 예술을 소개한 《금강산》(In den Diamantenbergen Koreas) 을 저술하여 1927년에 간행하였다. 1931년 4월 수석 아빠스직을 사임한 그는, 그 해 6월 동아프리카에서 잠시 휴양하다가 리템보(Litembo)로 파 견되어 스와힐리(Swahili)족을 대상으로 사목하였다. 1952년에 그의 수석 아빠스 서임 금경축 기념식 참석차 독일을 한 차례 방문한 데 이어 남아프리카 추루란트 (Zululand)의 베네딕도회를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동아프리카를 떠나지 않고 약 25년 동안 그곳에서 사목함으로써, 동아프리카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던 그 는, 1956년 초 심장 질환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하여 결 국 회복하지 못하고 그 해 4월 3일 리템보에서 사망하였 다. 시신은 동아프리카의 페라미호(Peramiho) 수도원 묘 지에 묻혔으며, 그 후 베네딕도회에서는 초대 수석 아빠 스로서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페라미호 베네딕도 수도원 부속 성당에 그를 기념하는 조각을 남겼다. (-> 베네딕 도회 ; 《조선》) ※ 참고문헌  <가톨릭 시보>, 1151호(1979. 4. 22), 1면/ 《교회와 역 사》, 60호(1980. 8), 한국교회사연구소, p. 1/ 崔奭祐, 韓國國 芬道會의 初期修道生活과 教育事業〉, 《韓國敎會史의 探究》 Ⅱ, 한국교회사연 구소, 1991, pp. 391~392/ 《韓國教會史論文集》 I ,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 사 간행 사업회, 1995/ Godfrey Sieber, The Benedictine Congregation ofSt. Ottilien, Eos Verlag Erzabtei St. Ottilien, 1992.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