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팔렌 조약
條約
〔라〕Pax Westfaliensis · 〔영〕Peace of Westphalia · 〔독〕Westfälische Fri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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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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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1년 5월 마그데부르크에서 전투를 벌이는 독일 황제군의 사령관 틸리 백작.
독일을 파멸 상태로 이끈 삼십년 전쟁(1618~1648)을 종식시키기 위해 1648년에 체결한 조약. 〔30년 전쟁〕 발단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마티아스 (Matthias, 1612~1619)는 합스부르크 왕가(Hapsburgs)의 영 토 내에서 프로테스탄트를 최대한 제한하고 가톨릭의 부 활을 지원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에서 세운 교회를 폐 지하도록 명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 토지 소유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항의는 언제나 묵살하였다. 이에 1618년 5월 체코의 프라하(Praha)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그들은 황제의 관리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켜, 그 전해 인 1617년에 보헤미아의 왕이 된 가톨릭 신자 페르디난 트(Ferdinand) 대신 칼뱅파 신자인 프리드리히(Friedrich) 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하여 임시 귀족 정부를 설립하 였다. 한편 마티아스의 사망으로 1619년 8월 28일에 신 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Ⅱ , 1619~1637)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고 오 히려 스페인군과 바바리아군을 동원하여 가톨릭 동맹을 체결한 후, 틸리(Tilly) 백작(1559~1632)을 지휘관으로 임 명하여 프리드리히를 공격하였다. 1620년 11월 8일 프 라하 근처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페르디난트 2세 황제는, 반란자들을 재판에 회부 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예배를 금지시켰다. 전쟁의 패배로 프리드리히는 망명하고,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 아의 왕을 겸직하는 것으로 이 전쟁 은 끝이 났다. 덴마크의 개입 : 1621년 합스부르 크 왕가의 필립 4세(1621~1665)가 스 페인의 왕이 되면서, 그는 프로테스 탄트 지역인 네덜란드에 대한 재정복 을 시도하여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 두었는데, 이와 같은 가톨릭 세력의 신장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독일 북부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강하게 저항하였다. 이때 덴마크의 크리 스티안 4세(Christian Ⅳ, 1588~1648)는 야망이 많은 군주 였는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달가워 하지 않았다. 루터파인 그는 스웨덴에 빼앗긴 발트 해 연안 지방의 손 실을 상쇄시키고 점령 가치가 높은 독일의 영토를 차지 하고자 1625년에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원하며 독 일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자금 지원과 프로테스 탄트들의 군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승리에 도취한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한걸음 더 나아가 1629년에 '복구 칙령' (Edict ofResititu tion)을 공표하여, 파사우(Passau) 협정과 아우크스부르크 (Augsburg) 강화 조약에서 규정한 한계로 루터파의 소유 권을 축소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 칙령을 통하여 황제 는 1552년 이후 압수된 가톨릭 교회의 재산 반환을 요 구하였으며, 그로 인해 1631년 가을까지 2개의 대교구 와 5개의 교구, 2개의 제국 직할 수도원, 150개의 성당 과 수도원, 200여 개의 본당이 반환되었다. 스웨덴의 개입 : 1629년까지 독일 지역 내의 종교적 저항 운동은 대체로 칼뱅파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복구 칙령을 계기로 루터파 전체가 저항 운동에 가담하게 되 었으며, 이와 같은 배경에서 루터파인 스웨덴이 개입하 게 되었다. 당시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2세(Gustav II , 1611~1632)는 공개적인 선언문을 통해 위협받고 있는 프 로테스탄트의 보호자로서 자처하였지만, 사실은 발트 해 의 해상권을 확보하고 확장하여 통상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 증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프랑스의 총리 리슐리외 (AJ. du P. Richelieu, 1585~1642)와 연합하여 전쟁 자금과 군대를 지원받아 독일을 침공하였다. 그는 1631년 9월 에 황제의 군대를 패배시켰는데, 이때 황제군의 사령관 틸리 백작이 전사하자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된 발렌슈 타인(A. von Wallenstein, 1583~1634)이 스웨덴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격돌한 구스타프 2세 가 1632년 뤼첸(Lützen) 전투에서 전사하자 발렌슈타인 은 스페인과의 협상을 도모하였는데, 이것이 국민들의 비난을 받게 되자 황제의 묵인하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1634년 황제군은 뇌르들링겐(Nördlingen)에서 스웨덴 군 에 결정적으로 승리함으로써 남부 독일을 다시 장악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 격전은 막대한 황폐를 가져왔고, 쌍방의 휴전 요청으로 프라하(Prague) 조약이 1635년 5 월 30일에 체결되었다. 프랑스의 개입 : 프라하 조약에 만족하지 않은 리슐리 외는 오직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만이 프랑스의 국가적 발전을 위한 길이라고 믿고, 다른 나라를 배후에서 지원 하기보다는 프랑스가 직접 나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 다. 프랑스의 개입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1635년부터 1648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스페인 군, 네 덜란드 군, 벨기에 군, 이탈리아 군 등이 동원되어 유럽 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결과 독일은 거의 전 지역이 황폐해졌고 대부분의 주민이 살상되었다. 또한, 교회 · 도덕적 생활은 극심할 정도로 침해받고 낙후되었으며, 독일은 프랑스로부터의 정치 · 문화적 예속에서 오랫동 안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1642년 리슐리외의 사망을 계기로 1644년부터 베스트팔렌 지방의 도시인 민스터(Münster)와 오스나브뤼크(Osnabrück)에서 회담이 진행된 결과 1648년 10월 24일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 결되었다. 〔조약의 내용〕 정치적 측면 : 조약의 공식 문서인 오 스나브뤼크 평화 문서' (Instrumentum Pacis Osnabrugence) 를 통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헝 가리, 보헤미아 지역을 소유할 수 있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정치적 권력은 상실되었다. 그 밖의 조약 내 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각 영방의 제후는 자신 의 영내에서 주권을 행사한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간 섭을 받지 않고 전쟁과 평화를 주도할 수 있다. 둘째, 프 랑스 알사스(Alsace) 지방 및 메츠(Metz), 툴(Toul), 베르 댕(Verdun)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한다. 셋째, 스웨덴은 포메라니아(Pomeraina) 서부와 바스마르 항구, 브레멘 대 교구와 페르덴 교구를 소유한다. 넷째, 프랑스와 스웨덴 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영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제국 의회에서 표결권을 행사한다. 다섯째, 브란덴부르크 (Brandenburg)는 포메라니아 동부 지역과 몇몇 소규모 영 토를 소유한다. 여섯째, 바이에른은 오버팔츠(Oberpfalz) 를 소유하며, 라인팔츠(Rheinpfalz)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루드비히에게 되돌려 준다. 일곱째, 스 위스와 네덜란드는 공식적으로 독립된 자유 공화국으로 공인한다. 종교적인 측면 : 영토의 재분배라는 정치적인 조치보 다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더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문제 의 타결인데, 이 조약을 통해 결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 다. 첫째,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1555)의 결정을 추 인했으며, 루터교만이 아닌 칼뱅교도 종교로 인정한다. 둘째, 교회의 토지 소유권 등에 관한 재산은 1624년 1 월 1일을 기준으로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의 소유로 간주되며, 만일 어떤 군주가 개종할 경우에는 그의 소유 지는 몰수한다. 이로 인하여 더 이상 종교 개혁이나 반종 교 개혁이 진행되는 것을 막았으며 루터교는 대부분의 교회 재산을 계속 갖게 되었다. 셋째, 종교 개혁권(jus reformandi)은 존속하지만 한 종파가 공적 예배를 하는 곳 에는 그 종파가 그대로 지속되어야 하며, 다른 신앙보다 수위권을 갖는다. 넷째, 모든 종교 문제는 국회에서 다수 결의 원칙에 의해 해결하지 않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트 사이의 호의적 협정으로 단체적 평등권을 기초로 결 정한다. 다섯째, 신성 로마 제국의 법정은 가톨릭과 프로 테스탄트 동수(同數)의 재판관으로 구성한다. 〔역사적 의의〕 30년 전쟁은 근대 유럽 종교 전쟁의 최 악이자 최후의 전쟁이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 의 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주요 쟁점은 근대적인 국 민 국가 사이의 경제적 · 정치적 영역으로 바뀌었으며, 그 종말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Bourbon) 왕가 사 이의 전쟁이란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두 나라는 명목상 가톨릭 국가로서 같은 종교를 가졌지만 종교보다도 오히 려 국가 경영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가 톨릭이 때로는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하고, 때로는 프로테 스탄트가 가톨릭을 지원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30년 전쟁에 관해 특기할 것은 이 전쟁 과정에서 근대 적인 국가 체제가 탄생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에서의 관례 및 16~ 17세기 초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의 군주들 에 의해 관례화된 국제법의 기본 원칙과 국제적 외교 관 례가 30년 전쟁을 통해 비로소 공식화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오랜 동안 유럽 정치를 지배해 왔으나 이제 이 제 국의 위상은 약화되었고,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들의 발 언권은 강화되어 이후 유럽에는 진정한 근대적 국가 체 제가 출현하였다. 각 국가는 동등한 주권 국가로서 외교 사절을 교환하며 동등한 자격으로 국제 회의에 자국 대 표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끝으로 주목할 점은 30년 전쟁이 역설적으로 인도주 의와 국제주의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파 괴와 민간인의 살상이 국제 문제로 등장하였으며, 전시 (戰時)에서의 비전투원의 보호, 질병자와 부상자의 취 급, 무차별 파괴 약탈의 금지 등과 같은 인도주의적 고려 를 위한 국제적 합의 도출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보편적 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그로티우스 (Hugo Grotius, 1583~1645)가 국제법의 획기적인 저서 《전 쟁과 평화의 법》을 출판한 것도 30년 전쟁 중인 1625년 이었다. 정치적인 측면 외에도 교회적인 측면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은 반종교 개혁과 신앙 투쟁의 종식을 가져왔으며, 종교 개혁 이후 반목 상태에 있던 각 종파 사이에 동등권 이 부여되었다. 반면, 가톨릭 교회는 '복구 칙령' 을 통해 복원하려고 하였던 교회 재산의 대부분을 완전히 상실하 였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10세(1644~1655)는 1648년 에 교서 〈젤루스 도무스 데이>(Zelus Domus Dei)를 통해 이 조약을 반대하고 항의하면서 무효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의 조치는 조약 자체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심한 손실을 규정한 조약 내용에 반대한 것이었다. (⇦ 삼십 년 전쟁 ; → 종교 전쟁 ; 반종교 개 혁) ※ 참고문헌 C.J. Friedrich, The Age ofthe Baroque, 1610~1660, 1952/ P. Geyl, The Netherlands Divided, 1609~1648, 1936/ E.J. Hamilton, War and Prices in Spain, 1651~1800, 1947/ G.F. McMunn, Gustavus Adolphus, the Northem Hurricane, 1930/ C.V. Wedgwood, The Thirty Years' War, 1939/ 一, Richelieu and the French Monarchy, 1950/ K. Bihlmeyer · H. Tüchle, Kirchengeschichte, trans. by V.E. Mills · F.J. Muller, Newman Press, Westminster, 1966. 〔車河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