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루트비히 판 (1770~1827)
Beethoven, Ludwig v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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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독일의 작곡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과도기적 인물. 1770년 12월 17일 본(Bonn)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의 출생일은 확실하지 않다. 플랑드르 출신인 그의 할 아버지 루이(Louis)는 본의 궁정 악장을 역임하였고, 아 버지 요한은 궁정 합창단의 테너 가수였는데, 이때 그의 가문은 처음으로 그곳에 정착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작곡가는 아니었지만, 베토벤은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음악을 배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도 스스로 교육시킬 능력도, 좋은 교사에게 위 탁할 충분한 경제력도 없었다. 베토벤은 아버지와 가까 운 사람들에게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고 10세 때 부터 본 궁정의 오르간 주자 네페(C.G. Neefe, 1748~1798) 에게서 체계적으로 오르간과 작곡을 배웠는데, 특히 바 흐(J.S. Bach, 1685~1750)의 <평균율>(Temperierte Stimmung) 을 소장하고 있던 그로부터 독일 음악의 전통을 익혔다. 그는 1782년부터 스승 네페의 오르간 연주자를 공적으 로 대행할 수 있었고, 1783년에는 궁정 악단의 반주자 로 임명되었다. 1787년 4월에는 스승의 추천과 쾰른 선 제후의 후원을 받아 빈(Wien)에서 모차르트(W.A.Mozat, 1756~1791)로부터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 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끝나 고 말았다. 이후 5년 동안 베토벤은 본에서 자신과 집안 의 생계를 위하여 일하며 작곡에 전념하였는데, 이 기간 중 그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 여 준 사람은 음악 애호가 발트슈타인(F. von Waldstein) 백작이었다. 1790년 하이든(F.J. Haydn, 1732~1809)을 만나 그의 제 의로 제자가 된 베토벤은 모차르트가 사망한 이듬해인 1792년에 빈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발트슈타인 공작은 베토벤을 떠나 보내며 "하이든의 손을 통해 모차르트의 정신을 배울 것"을 기원하였다. 베토벤은 하이든에게서 불규칙적인 작곡 레슨을 받았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 았다. 그리고 솅크(J. Schenk)와 알브레히츠베르거(J.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서 대위법을, 살리에리(A.Salieri, 1750~1825)로부터는 이탈리아 성악 작곡법을 배웠 다. 발트슈타인 백작은 베토벤을 리히노프스키, 에스테 르하지, 브룬스뷕 등 빈의 귀족들에게 추천하였고, 로브 코비치(Lobkowiz) , 킨스키(Kinsky) 그리고 1805년부터 7년 간 베토벤의 작곡 제자였던 루돌프 대공(Archduke Rudolph)은 1809년에 그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하였다. 1794년부터 베토벤은 독창적인 창작 생활을 시작하 였다. 이후 그는 여러 곳에서 피아노 순회 공연을 했으며, 공개 연주회에도 참석하여 즉흥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95년부터 시작된 청각 장애는 1808년경 점차 심화되어 1819년에는 청각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자신 이 귀머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방황하던 그 는, 사람을 피하고 피아니스트나 지휘자로서의 모든 공 식적인 활동을 포기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예술만 이 나를 자제시킨다. 아, 내가 해야 할 모든 일이 이루어 지기까지 죽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진다···나는 자연 의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가치 있는 예술가와 인간의 대열에 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였다"(<하일 리겐슈타트의 유서>, 1802. 10.6). 그러나 1819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400여 권에 달 하는 베토벤의 필담 공책은 그의 인간 승리를 보여 주는 것이며, 외적인 약점을 음악의 힘으로 극복하였음을 보 여 준다. 좌절과 고통은 그에게는 오직 극복의 대상이었 고, 극복은 그에게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였다. 예컨 대 밝고 사랑스럽고 친근감을 주는 <교향곡 2번>은 유서 를 작성한 1802년 10월부터 1803년 초 사이에 작곡되 었다. 또한 베토벤이 자신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오페 라 <피델리오>(Fdelio, 1804. 6. 14)의 초연이 3번이나 중단 되면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1805년 11월 20일, 초연 의 쓰라린 고통을 극복한 직후에 그에게 있어서 가장 왕 성한 창작의 해가 이어진다. 1810년에 음악 평론가 호프만(E.T.A. Hoffmann, 1776~ 1822)이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극찬한 후 그의 작품 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렸으며, 1812년에 완성된 <교향곡 7번>의 초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피델 리오> 또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1815년부터 베토벤 이 사망한 1827년까지 작곡된 그의 작품은 전체 작품의 양에 비해 소수에 불과하지만, 음악적으로 깊이가 있고 작곡가의 성숙한 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여행을 마치 고 빈으로 돌아오던 베토벤은 결핵에 걸려 회복되지 못 한 채, 1827년 3월 26일 빈에서 간경변증으로 사망하였 으며, 3일 후에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2만여 명의 조 문객이 참석하였다. 〔작품과 창작 방법] 베토벤의 작품들은 본에서 이루어 진 작품 번호 없는 50여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빈에서 작곡되었는데, 35년 동안의 빈 시대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시기로 구분된다. 초기(1792~1802년) :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삼 중주>, <현악 사중주>, <교향곡 1-2번> 등이 작곡된 이 시기는 거의 실내악에 국한되었는데, 대부분 피아노를 기초로 만들어졌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특히 선율의 균 형과 악곡 구조의 투명성에서 전통적인 작곡 규범을 따 르고 있으며,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유사한 특성을 보이 지만 당시의 양식을 사용하는 데 있어 거친 면이 있다. 중기(1802~1812/1814년) : 베토벤이 음악 외적인 내용을 음악에 수용하는 새로운 창작의 길을 모색하던 시기로,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는 그의 확신에서 비롯 되었다. 그는 멜로디, 리듬, 셈여림 관계, 분절법 등을 대립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전승된 작곡 규범들을 넘어 '고귀한 단순성과 조용한 위대성' 을 추구하던 고전적 음 악관을 확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규칙을 따르 는 학문이자 예술" (J. Mattheson, 1739)도, "귀에 유쾌하게 들 리는 방식으로 소리를 짜맞추는 예술" (J.J. Rousseau, 1768) 혹은 "귀에 유쾌한 소리" (W.A. Mozart, 1782)도 아니었다. 그에게 음악은 '느낌의 언어' 로 표현된 내용이었다. 교 향곡 3번인 <영웅>(1804)과 4번(op. 60), <피아노 협주곡 4번>(1806) , 오페라 〈피델리오〉, <라츠모프스키 현악 사 중주>(Razumovsky Quartet, op. 59), <바이올린 협주곡>, 피 아노 소나타 <열정>(Appassionata)과 <월광>(Mondschein) 등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19세기는 낭만 시대로 문학 곧 시(詩)와 형이상학적 요소들이 음악에 수용되어 표제 음악을 이상(理想)으로 삼던 시기였다. 베토벤 역시 교 향곡 3~5번에서 분명하게 이러한 입장을 보였으나, 그 는 자신을 절대 음악의 신봉자로 자처하였다. 따라서 베 토벤의 위대함은 그가 표제 음악을 시작하였다는 차원에 서가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려는 내용에서 형식과 작곡 규범을 자유롭게 넘어섬으로써 형식 면에서 독특한 개성 을 갖춘 데 있다 하겠다. 이 시기의 그의 음악은 즉흥 연 주풍 음재료의 사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후기(1814/1815~1827년) : 이 시기에는 <장엄 미 사>, <교향곡 9번>, 후기 <피아노 소나타>, <현악 사중 주), <디아벨리 변주곡>(1823) 등이 두드러진 작품들인 데, 이 후기 낭만적 작품들은 이상적 인간성을 위한 발 언, 시적 내용, 섬세한 악곡 구조 그리고 집중력 면에서 돋보인다. 키제베터(R.G. Kisewetter, 1773~1850)는 베토벤 의 이러한 음악과 롯시니(G. Rossini, 1792~1868)의 유희 적 · 인공적 · 복고적 음악이 공존하는 이 시기를 '베토벤 과 롯시니의 시대' 로 규정하였다. 창작 방법 : 베토벤의 창작 방법은 모차르트, 슈베르 트(F.P. Schubert, 1797~1828), 레거(M. Reger, 1873~1916)로 이어지는 '머리 속 작곡' 과 다르다. 그는 머리 속에서 창 작의 복잡한 작업을 마무리 짓기보다는 가능한 모든 주 제와 소재를 공책에 기록하고 이들을 하나씩 기록하며 발전시켰다. 이러한 스케치는 전문가만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데, 현대의 베토벤 스케치 연구는 그의 작 품들이 치열한 숙고와 수정의 산물임을 밝혀 주었다. 그 의 10개의 교향곡들-마지막 것은 영국인 베리 쿠퍼가 베토벤의 스케치들을 토대로 완성한 단악장의 미완성 교 향곡이다-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들은 29세부터 사 망하기 3년 전인 54세까지 작곡한 것들이다. 12년 만에 완성된 <교향곡 9번>을 제외하면 모두 2~4년 사이에 거의 동시에 두 곡씩을 작곡하였다. 이들은 완성 즉시 초 연되고, 1년 후에 출판되었다.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하 이든, 모차르트의 작품과 달리 조성의 와해가 시작되는 새로운 세기에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기본 조성을 기피하는 당시의 방법에 편승한다기보다 이 를 주도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의 현악 사중주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현악 사중주는 베토벤의 창작 의지를 표현하는 본질적인 수단으로, 그는 새로운 도약 을 시도하거나 완성할 때에 항상 이 장르를 선택하였다. 6개의 <현악 사중주>(op. 18, 1801)와 후기의 <현악 사중 주〉들은 한결같이 귀족적 취향과 사교 음악적 저속성을 탈피하여, 지성적이고 차원 높은 대화로 이끌었다. 하이 든과 모차르트가 이 길을 먼저 개척했다면 베토벤은 이 를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음악] 베토벤의 교회 음악은 양적으로 빈약하 다. 그는 에스터하지(N Esterhazy) 공을 위한 <다장조 미 사곡>(Mass in C, op. 86, 1807)과 루돌프 대공의 대주교 승 품을 축하하기 위한 라장조 <장엄 미사곡>(Missa solemnis, 1823) 두 곡을 작곡하였다. 이는 하이든의 미사곡 14곡 과 모차르트의 20곡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수이다. 그 외 다른 교회 음악도 <올리브 산의 그리스도>(Christus am Olberg, 1802)라는 오라토리오를 겨우 꼽을 정도이다. 사 실, 베토벤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란 바로 크 · 바흐적 신조를 넘어 "마음으로부터 나와서 마음으로 가기를 원한다" 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평론가 중 일 부는 그가 교회 음악에 열성을 쏟지 않았고, 심지어는 반 가톨릭적이고 비신앙적 삶을 살았다고도 평가하였다. 32곡의 피아노 소나타, 10개의 교향곡, <멀리 있는 연인 에게> 등 91곡의 예술 가곡, 현악 · 관악 앙상블 등 그의 작품들은 거의 다 세속 음악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이 다. 그러나 베토벤의 깊은 신앙심은 조카에게 보낸 편지 들과 그의 임종 전 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음악사 가들은 베토벤이 가톨릭 도시 빈에서 하이든, 모차르트 와 함께 신앙을 실천하며 생활하였고, 무엇보다 이 두 미 사곡이 베토벤의 가톨릭 신앙을 완벽하게 표현한다고 하 였는데, 사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가사 해석과 표현으로 가톨릭 교회 음악의 품위를 크게 드높였다. 베토벤이 선배들보다 교회 음악의 창작에 소홀한 것은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다. 첫째, 하이든이 가톨릭 신자인 에스터하지 가문의 궁정 악장으로, 모차르트가 잘츠부르 크(Salzburg) 대주교의 궁정 악장으로 재직하며 많은 교 회 음악 작품을 작곡할 수 있었던 반면에, 베토벤은 빈에 도착한 이후 자유 창작인의 독립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 다. 두 번째는,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 2세의 개혁 정책에 맞물린 1782년의 '사치 금지령' 때문이다. 빈의 교회 음 악 전통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킨 이 칙령 때문에 모차르 트는 교회의 공식적인 창작 주문을 받지 못하였고 하이 든도 마지막 14년 간 미사곡 작곡을 포기하였다. 하이든 과 슈베르트가 독일어 미사곡을 작곡하고, 베토벤이 그 의 <장엄 미사곡>을 독일어 가사로 바꾸려고 한 것도 이 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베토벤의 <장엄 미사곡>은 4명의 독창자와 혼성 합창 단, 오르간 그리고 대규모의 오케스트라로 편성되어 규 모 면에서 그의 <다장조 미사곡>을 크게 앞지른다. <장엄 미사곡〉은 1시간 20분이라는 긴 연주 시간과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편성 때문에 오랫동안 연주회장용의 비전례 음악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본래 대주교 승품식 미사를 위해 작곡을 계획하였고 실제로 전례 안에서 수없이 연 주되었다. 이 미사곡은 그의 <교향곡 9번>이 합창과 관 현악의 벽을 무너뜨린 것처럼 교회와 세속 사이의 장벽 을 허물며 이 둘을 엮어 준다. 베토벤의 작품 전집은 1862~1865년 라이프치히에 서 24권이, 새 전집은 1955년부터 킨스키와 할름에 의 하여 뮌헨에서 출판되었는데, 작품 번호는 베토벤 스스 로 출판 순서를 따라 정리한 것이다. 작곡가가 자신의 작 품들에 번호를 붙여 정리한 것은 베토벤이 처음이다. (->가톨릭 음악)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수, 《음악은이》 2, 세광음악출판사, 1991, pp. 400~403, 419 이하, 432 이하/ J. Schmidt-Gorg, (MGG) 1, pp. 1509~1565/ J. Kerman · A. Tyson · D. Johnson · W. Drabkin, 《NGDMM》 2, pp. 354~414/ W. Gurlitt ed., L. v. Beethoven, Riemann Musik Lexikon, Personenteil 1, Schott's Söhne, 1959, pp. 125~130. [趙善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