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르미노, 로베르토 프란체스코 로물로 (1542~1621)

Bellarminus, Robertus Francescus Romu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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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프란체스코 로물로 르미노

로베르토 프란체스코 로물로 르미노


성인. 교회 학자. 추기경. 종교 개혁에 대한 프로테스 탄트의 입장을 비판한 대표적인 예수회 신학자. 축일은 9월 17일. 1542년 10월 4일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의 몬테플차(Montepulciano)에서에서 빈천트(Vincent Bellarmine)와 마르첼리노 2세(1555) 교황의 누이인 친치 아 체르비니(Cinzia Cervini) 사이에서 태어나 1560년 10 월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1563년까지 로마 학원(Roman College)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1563~1564년 에는 피렌체에서 문학과 수사학을, 1564~1567년에는 몬도비(Mondovin) 대학에서 수사학을 공부하였다. 교사와 신부로서의 활동 : 1569년 예수회 교수로는 최초로 벨기에 루뱅 대학에 파견된 벨라르미노는 그곳에 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주일마다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강의하였다. 1570년 3월 25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에는 예수회 기숙사에서 《신학 대전》을 교재로 신학을 가르쳤 다. 당시 루뱅 대학은 종교 개혁자들에 대항해 가톨릭 교 회를 방어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교의의 이성적 전개나 정적인 사유보다는 실천적이었으며, 가톨릭 교회사와 교 부학 연구가 다소 경시되었으므로 벨라르미노는 종교 개 혁자들의 비난을 막고 교회의 교의를 체계화하기 위해 성서와 교회사, 교부학을 연구하였다. 이 시기에 히브리 어 문법책과 교부학 저서인 《교회의 저술가들》(De Scriptoribus ecclesiasticis)을 편찬한 그는,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 기 위해 바이우스(M. Baius, 1513~1589)와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에 의하여 로마 대학의 논쟁 신학 교수로 임명된 그는 이곳에서 교 수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세 권으로 된 《이단 반박론》(Disputationes de Controversiis Christianae Fidei adversus huius temporis Haereticos, 1586~1593)을 발간하 였다. 1590년 로마 학원의 영성 지도 신부에 이어 1592 년에는 원장이 되었으며, 1594년 말부터 1597년까지는 예수회 나폴리 관구의 관구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599년 3월 3일 교황 글레멘스 8세(1592~1605)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고, 그 후 내사원(Sacra Poenitentiaria)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추기경 시기 : 이 시기에 그는 바네스(D. Báñez)와 예 수회의 몰리나(L. de Molina, 1535~1600)가 벌인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논쟁에 관여하였다. 1602년에는 카푸아 (Capua)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그 해 5월 4일부터 카푸아 에서 사목자로서 활동하다가 1605년 9월 17일 교황 바 오로 5세(1605~1621)에 의해 로마로 소환되어 바티칸 도 서관 관장 겸 교황청 여러 성(省)의 위원으로 임명되었 기 때문에 그곳에서 사목 활동을 한 것은 3년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 후 그는 여러 가지 논쟁에 참여하였는데, 1606~1607년에는 성직의 면제를 주장하는 베니스 공 화국과, 1607~1609년에는 충성 서약과 왕의 신권을 주장하는 영국의 제임스 1세와 논쟁하였다. 1610년에는 바클리(W. Barclay)와 위드링톤(R. Widdrington)의 갈리아 주의(Gallicanism)에 대항하여 논쟁했는데, 그는 이를 계 기로 《세속사에서 갖는 교황의 속권(俗權)에 대한 논고》 (Tractatus de potestate Summi Pontificis in rebus temporalibus adversus Gulielmum Barclaeum)를 저술하였다. 또한 코페르 니쿠스의 지동설이 성서에 반대된다는 교회 내 학자들의 주장과 그 주장을 지지하는 갈릴레이(G. Galilei, 1564~ 1642) 사이의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 문제 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갈등으로 번지자 갈릴 레이의 견해에 다소 공감을 느끼면서도 그 주장을 이단 으로 규정하는 1616년의 교령 반포에 참여하였다. 벨라 르미노는 성서와 과학의 조화를 다루는 데에 다소 주저 하였던 것이다. 또 그는 불가타 성서의 글레멘스판(1591 ~1592)의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1621년에 은퇴하여 귀리날레(Quirinale) 근처의 예수 회 성 안드레아 수련소에 거처하던 벨라르미노는 그 해 9월 17일 사망하였다. 그의 시성에 대한 준비는 1627년 부터 시작되었으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계속 지연되다 가 1923년 5월 13일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1930년 6월 29일 시성되었다. 그리고 1931년에 교황 비오 11세 (1922~1939)에 의해 '교회 학자' 로 선포되었다. 〔신학 사상과 저서〕 교회론 :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단 반박론》은 당시 종교 개혁자들과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서 반복되던 비난과 변호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중지시키기 위해 쓰여졌는데,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약점만 비판한 것이 아니라 강점 역시 지적하였 기 때문에 매우 정당하고 공평한 저서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은 성서와 교부들의 신학과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쓰여졌지만, 그 당시에는 배 척을 받았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이 저서를 금서로 정 하였으며, 반(反)벨라르미노 교수 모임(cathedrae antiBellarminianae)이 조직되었고, 영국 역시 이 책을 금서로 정하였다. 벨라르미노는 이 저서에서 당시 논쟁의 주제 가 된 교의들을 다루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주제 는 '교회' 였다. 벨라르미노는, 교회는 성서의 원천과 기 원을 보증할 수 있는 증거이며, 교회의 가르침은 무류적 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결정짓는다고 하였다. 또한 교회 의 역할은 성서 자체와 교부들의 권위와 이성에 의해서 증명되지만, 교회는 성서의 진리를 심판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로 인해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도 성서의 권위 위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교황의 수위권 : 교의 논쟁에서 무류적인 최고의 심판 관은 교황이며, 교황은 교회 전체에 신앙과 관련된 가르 침을 준다는 것이 벨라르미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얀 센주의자들은 벨라르미노가 교의적인 문제에 대한 교황 의 무류성을 거부했다고 주장하였다. 페넬롱(Fénelon)의 이러한 비난에 대해 벨라르미노는 자신을 변호하였다 (Instructions pastorales sur le cas de conscience, 3ᵉ Instruction, ch. XXXVIL du cardinal Bellarmin, Oeuvres, Paris,t. Ⅳ, 1850, pp. 191~198). 그는 교황이 세속사에서 갖는 권한에 대해 두 가지 견해를 피 력하였다. 즉 교황은 신적인 의무에 의해 교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 모두 수위권을 갖지만, 이 세상 안 에서만 권한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벨라르미노의 입장은 중도적인 것이었다. 그는 교황이 이 세상 안에서 직접적으로 권한을 갖지만 오직 영성적인 일에 한정된다 고 하였다. 그렇지만 교황의 영성적인 권한 때문에, 경우 에 따라서는 간접적으로 세속사에서도 수위권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는 토마스주의의 정치 철학을 사용하여 순수하게 영 적인 교회의 권한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영 적인 권한이 일차적이고 세속사에서 갖는 권한은 이차적 이기 때문에, 교황은 영적인 것들에 영향을 주는 세속사 에 대해서 관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교황의 세속사에 대 해 갖는 이러한 간접적인 권한은 오늘날에도 인정되고 있지만, 벨라르미노 시대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특히 프 랑스 국회에서는 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비난하였으 며, 교황 식스토 5세(1585~1590)는 교황이 세속사에서 갖는 권한이 간접적인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이단 반 박론》 제1권을 금서 목록에 포함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교서가 발표되기 전에 교황 식스토 5세가 사망함으로써 그의 후임인 교황 우르바노 7세(1590)에 의해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은총론 : 은총론은 당시에 매우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주제였다. 은총의 효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질문에, 두 가지 상반되는 주장이 있었다. 하나는 몰리나의 의견 에 따르는 것으로 은총의 효험은 인간의 동의나 협력 안 에서 나타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총의 효험은 하 느님의 물리적인 행위라는 바네스의 주장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사람의 의지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벨라르미노 는 이 두 가지 견해를 모두 거부하고, 은총의 효험은 그 사람의 의향과 일치할 때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 하면 인간의 자유 의지는 은총을 거절할 수 있지만 은총 의 효험은 무류적이고, 이 무류적인 은총은 무시될 수 없 다는 것이다(De gratia et libero arbitrio, 12, éd. Pédne-lauriel,t. Ⅳ,pp. 293~294). 이러한 그의 은총론은 아우구스티노의 무조 건적인 하느님의 예정설에 기초하였다. 그래서 그는 항 상 바네스의 의견을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바네스 이론에서 자유 의지의 예정설을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영성 신학 : 22세 때 벨라르미노는 장상들의 명령으로 동료 수사들에게 종교에 대한 설교를 했었는데, 이 설교 들이 모아져 1899년에 발간된 것이 《훈계》(Exhortationes domesticae venerabilis servi Dei card. Rob. Bellarmini)라는 책 이다. 이 작품은 1599년부터 쓰여지기 시작해서 12년 후에 완성된 것으로, 여기에 수록된 시편 주석은 뛰어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영성에서 복음은 매우 중요한 것 이었으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을 해설한 책(Les sept paroles du Christ en croix)을 저술하기 도 하였다. 그의 영성 생활에 대해서는 《피조물의 등급 을 거쳐 하느님을 향해 가는 영혼의 상승》(La montée de I'âme vers Dieu par I'échelle des créatures)에 잘 나타나 있는 데 이 책에서 그는, 상승은 고통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 주장하고, 세 권으로 된 《비둘기의 탄식 또는 눈물의 대가》(Le gémisssement de la colombe ou le prix des larmes)에서 이러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켰다. 그리고 《맹목적인 순 명》(I' obéissance aveugle)에서 예수회의 순명 정신을 옹호 하였다. 교리 교육 : 벨라르미노의 작품 중에서 교리서는 매우 널리 확산되었으며, 교황의 승인을 받아 추천되기도 하 였다. 그가 로마 학원에서 신학을 가르칠 때, 평수사들과 학생들에게 실시한 교리 교육 강의는 학부 과정의 필수 과목이 되었으며, 수많은 청중들이 그의 강의에 참석하 였다. 타루지(Tarugi 추기경은 이 강의 내용을 책으로 발행하도록 요청하였고, 교황 글레멘스 8세가 이러한 계 획을 지지함으로써, 《어린이를 위한 교리서》(Dottrina cristana breve)와 《교사들을 위한 교리서》(Dichiarazione più copiosa della dottrina cristiana)가 1598년에 로마에서 발행 되었다. 글레멘스 8세의 교서를 통해 승인된 이 교리서 는,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의 교서를 통해서 추 천되었을 뿐만 아니라, 베네딕도 14세 교황(1740~1758) 의 교황 헌장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국어로 번역되어,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널리 사용되었 다. 〔비판과 의의〕 벨라르미노의 위대함은 세속사에서 갖 는 교황의 간접적인 권한론을 주장한 데에 있지 않다. 사 실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교황의 세속적인 권한과 영 성적인 권한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 지으면서, 교회와 국 가의 관계사(關係史)에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 다. 벨라르미노는 가톨릭 교의의 한 부분으로 권한의 종 속 관계와 구별성을 변호하였지만, 반면에 교회의 실제 적인 권한 행사에 있어서 지속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 사 이에서 혼돈을 하였다. 이러한 혼돈은 국가는 교회로부 터 독립된 존재를 갖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교회와 하나 의 사회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던 점에 기인한다. 더욱이 그는 교회가, 행위에 있어서 신적인 권한을 갖기 때문에 혹은 정치적 사회가 어떠한 행위에 실패하면 이로써 남 은 공백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에 세속사를 조정할 수 있 다는 내용을 서술하려다가 실패한 것으로 여겨진다. 의 심할 여지없이 벨라르미노의 역사 이해에는 한계가 있 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교회는 수많은 성인들이 요청하 였던 개혁의 진행 속에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벨라르미 노는 루뱅에서 바이우스를 대항해 신앙을 옹호하였으며, 《이단 반박론》은 그 당시 대단히 의의 있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의 교리서들은 일반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 쓰 여진 것으로, 교회의 신앙에 대한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작품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전반적인 작 품들은 특히 성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 데, 그는 벨라르미노를 "지칠 줄 모르는 교의의 샘"이라 고 평가하였다. (→ 몰리나주의 ; 무류성 ; 은총론 ; 신학 사) ※ 참고문헌  J. Friske, 《NCE》 2, PP. 250~252/ J. Lebreton, 《Cath》 1, pp. 1379~1384 S. Tromp, 《LThK》 2, Pp. 160~162/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 Oxford, 1987, p. 38/ Enzo. Lodi, trans. by Jordan Aumann, OP.,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pp. 269~270/ G. Galeota, 《DSp》 13, pp. 713~720. 〔梁惠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