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단론
闢異端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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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유교 전통에서 옛 성현의 도리를 정통(正統)으로 삼아 옹호 · 실현하기 위하여 이에 어긋나는 견해나 행위를 이 단(異端)으로 규정하고 비판 · 배척하는 입장. 따라서 벽 이단의 의식은 정당한 도리를 수호한다는 정통론과 표리 관계를 이루며, 한편으로는 존주(尊周) · 존왕(尊王)의 의미도 포함한다. 아울러 벽이단론에는 이단을 깨우쳐 정통으로 이끌어 주거나 이단 세계 속에 들어가 정통의 길을 열어 준다는 뜻도 들어 있으며, 훗날 조선에서는 화 이론(華夷論)과 결부되어 위정 척사론(衛正斥邪論)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용어의 의미와 기원〕 '이단' 의 '단' 은 구체적 사건의 시작인 단초(端初)와 실마리인 단서(端緒)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실제로 한 사건의 해결은 실 뭉 치를 풀듯이 어떤 끝(端)에서 시작하는가에 따라 전체를 순조롭게 해결해 주기도 하고, 점점 더 엉클어지게 하기 도 한다. 이때 전체를 질서 있게 풀어 주는 단을 올바른 도리 곧 정통이라 한다면, 더욱 엉클어지게 하는 단은 그 릇된 도리 곧 이단이라고 하게 된다. 아울러 '벽이단' (闢 異端)에서 '벽' 은 원래 '물리치다' 또는 '피하다' 는 뜻 과 아울러 '열다' 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벽이단의 벽 은 사면에서 공격해 오는 이단을 물리치고 자신을 방어하는 배척의 개념인 동시에, 이단의 세계 속에 정통 의 길을 열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벽이단 정신에 는 밖으로 이단에 대립하는 자세와 더불어 안으로 정통 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병존한다. 따라서 밖으로 이단에 대한 배척의 근원은 안으로 정통에 대한 신념의 진지성 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춘추 시대의 공자(孔子)는 《춘추》를 편찬하여 대의(大 義)를 기준으로 정립하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사필 (史筆)로 죽이고,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한 언급을 회 피함으로써 그의 벽이단 정신을 제시하였다. 공자는 "이 단을 전공하는 것은 해로울 따름이다"(攻乎異端 斯害也 已)라 하여 이단을 경계하는 정도의 온건한 입장을 밝혔 다. 이에 비해 전국 시대의 맹자(孟子)는 여러 학파의 학 설이 공자의 정도(正道)에 어긋나는 상황을 개탄하고, 그 시대에 유행하던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이단 사 상을 강경하게 비판 · 배척함으로써 유교 사상사에서 벽 이단론의 이론적 선구자가 되었다. 〔중국의 벽이단론〕 후한(後漢) 초에 불교가 전래된 이 후 당(唐)대에는 불교 및 도교 · 도가 사상이 극도로 융 성하였는데, 이때 유학자로서 한유(韓愈)는 불교와 도가 를 신랄하게 변척하였다. 특히 〈불골표〉(佛骨表)에서는 불타가 이적(夷狄)이요 그 가르침이 옛 선왕(先王)의 가 르침에 어긋나며, 군신 · 부자의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라 비판하고, 불교를 신봉할수록 나라가 빨리 망할 것이라 고 역설하였다. 이어 송대에는 정통 의식이 철저하게 확인된 도학(道 學)이 성립되었고, 아울러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을 기초 로 삼으면서 벽이단론이 더욱 강화되었다. 또 불교와 노 장 사상에 대해 그 논리는 근사하지만 근원적인 작은 오 류가 더욱 위태로운 이단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강조되었 다. 이때 도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는 여조겸(呂祖謙) 과 함께 편찬한 《근사록》(近思錄) 제13권에 벽이단류 (闢異端類)를 수록하였으며, 이후 도학의 벽이단적 전통 은 주희의 성리설에 대립되는 송대의 육구연(陸九淵)과 명대의 왕수인(王守仁)의 심학(心學)을 이단으로 비판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도학의 전통은 후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 결과 명말 청초(明末淸初)에 이르러 서학(西學) 곧 천주교와 서양 과학이 전래되면서 다시 벽이단론이 강하게 일어나 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한 초기의 예수회 선교사 들은 전통 유교 사상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적응주의적 선교 방법을 취하였으나, 그 후 이를 거부하는 선교 단체 와 선교사들이 등장하면서 유교 지식인들은 천주교를 이 단으로 규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유 교사는 시대마다 새로운 이단과 부딪히면서 자신의 정통 성을 확립해 가는 벽이단론의 전개 과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려와 조선의 벽이단론〕 우리 나라도 고려 후기 충 렬왕(忠烈王) 때 안향(安珦)이 주자학을 수입한 이후, 이를 받아들인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는 도학의 입장에서 타락한 불교 사원과 쇠퇴한 불교 교리를 비판 하는 벽이단론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불교의 교리와 역사에 대한 비판 이론 을 체계화시켜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함으로써 조선 벽불론(闢佛論)의 이론적 선구자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심기리편》(心氣篇)을 통해 근본 개념으로서의 불교의 심(心)을 노장 사상 및 도교의 기(氣)와 대립시 켜 그릇됨을 밝혔고, 유교의 근본 개념으로서의 이(理) 를 내세워 심과 기를 지양해야 함을 제시하였다. 중종 때 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도 도교(道敎) 기관인 소 격서(昭格署)를 폐지할 것을 역설하여 유교의 정통성을 밝히고, 도학의 순수성을 확립하려는 벽이단론을 구현하 였다. 이후 조선의 유학자들은 도학의 정통성을 순수하게 수 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나 사상 체계를 배척하는 것 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유교 사상 내부의 비정통적 사유를 비판하거나 견제하는 데 힘썼던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 성리학의 이론에서도 노장 사상과 불교 사상을 비판하면서 정통성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주희의 성리학에 어긋난 모든 사상 체계를 이단으로 규 정하여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 하나는 도학 · 성리학의 입장에서 심학 · 양명학(陽明學)을 비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성리학에서도 주리파에 대해 비판하거나 주 리파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는 성리설에 대해 비판한 것 이다. 먼저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16세기 조선 사회에 소개된 왕수인의 저술인 《전습록》(傳習錄)을 주자학의 입장에서 조목별로 날카롭게 비판한 《전습록논변》(傳習 錄論辯)을 저술하였다. 그는 양명학의 지행 합일설(知行 合一說)이 형기(形氣)에서는 가능하지만, 의리(義理)에 서는 배우고 힘쓰지 않으면 일치할 수 없음을 주장하여 양명학과 주자학을 분별하는 기준으로서 '의리' 에 큰 비 중을 두었다. 다음으로 이단으로서의 타사상과 구별되는 도학의 정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철학적 입장 곧 성리설 을 엄격하게 구명해 가면서, 그 성리설의 근본 입장에 나 타나는 미세한 차이에 따라 정 · 사(正邪)를 분별하는 파 사현정(破邪顯正)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곧 같은 성리학 의 범위 안에서도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의 주리론 (主理論)이 정통으로 인정되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 德)의 주기론(主氣論)이 이단시되면서 경계의 대상이 되 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道說)이 대립 관계로 이해되면서 이황 계열의 영남학파와 이이 계열의 기호학파 사이에는 서로의 이론을 이단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후 주자학의 성리학 체계가 도학의 정통으로 확립되 면서 주희의 학문적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주희 의 학설과 어긋나는 이론을 제시하면 사문난적(斯文亂 賊)으로 단정되어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 결과 효종 · 숙종 때 유학계에 군림하던 우암(尤菴) 송시 열(宋時烈)은 백호(白湖) 윤휴(尹籍)가 경전 주해에서 주희의 주석과 어긋나는 독자적 해석을 제시하자 이를 사문난적이라 단죄하고 이단으로 배척하였으며, 윤휴를 변호하는 윤선거(尹宣擧)까지 춘추 정신을 들어 비판하 였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도 《사변록》(思辨錄)의 경전 주석에서 주자학의 체계에 구속되지 않는 기풍을 보였으며, 이로 인하여 송시열의 문인들에 의해 사문난 적으로 단죄되고 끝내 유배까지 당하였다. 이처럼 정통 을 옹호하기 위한 비판 정신은 정치적인 당쟁과 결부되 어 극심한 대립을 일으키고, 상대방에 대한 공격 수단으 로서 이단의 논변을 이끌어 내는 학문적 분쟁 양상으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벽이단론〕 18~19세기에 천주교가 조선 사회에 전파되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벽이 단의 전통은 반서학(反西學) 이론인 척사론(斥邪論)으 로 변모하게 되었다. 특히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 煥) 이벽(李檗), 정약용(丁若鏞) 형제 등 당대의 청년 유교 지식인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인식되 면서 이들의 주장을 사설(邪說) · 사학(邪學) · 이단으로 규정하는 비판과 공격이 계속되었다. 이어 봉건 질서 속 에서 억압을 받아 오던 하층민들 속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나가자 전통적인 유교 질서가 위협을 받게 되 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특히 제사를 거부하고 가족 질 서와 국가 법제를 거부하는 천주교는 이단으로 배척되었 으며, 혹독한 금압 정책으로 인해 천주교도들은 여러 차 례의 사옥(邪獄) 과정에서 무수히 처형되었다. 이에 앞서 이미 천주교 신앙은 이를 학문적인 관심에 서 연구하던 유학자들에 의하여 비판받아 오고 있었다. 성호(星湖) 이익(李潔)은 《천주실의발》(天主實義鈸)에 서 천주교가 환적(幻迹)을 통해 우매한 민중들을 미혹시 킨다고 경계하였고, 하빈(河濱) 신후담(愼後聃)도 《서학 변》(西學辨)을 지어 천주교 교리서에 대해 체계적인 비 판을 가하면서 양주 · 묵적 등의 이단들과 마찬가지로 천 주교도 의(義)를 저버리고 이(利)를 추구하는 이단이라 고 변척하였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의 《천학문 답》(天學問答)이나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의 《천학 문답》에서도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다. 또 사옥을 전후하여 조정에서는 척사(斥邪) 상소가 폭주 하였고, 순조 원년(1801)에는 <토역 반교문>(討逆頒敎 文)이, 헌종 5년(1839)에는 <척사윤음>(斥邪音)이 반 포되었다. 이기경(李基慶)과 이만채(李晩采)가 편찬한 《벽위편》(闢衛編)은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벽이단론적 자료들을 수집하여 집성해 놓은 것이다. 아울러 조선 후기에 잇달아 외침을 당하게 되자 중화 (中華)와 오랑캐(夷狄)의 분별 의식은 마침내 존명 양이 (尊明攘夷) 사상이나 배청(排淸) 의식을 낳게 되었으며, 문화와 야만성의 분별 기준을 넘어서 우리를 중화로 인 식하고 외국을 오랑캐로 규정하여 배척하게 되었고, 결 국에는 침략적인 외국에 대한 저항 의지로 나타났다. 이 러한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 의식은 문화적 화이론(華夷 論)이 벽이단론과 결부되고, 더 나아가 대외 관계에서의 배척론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서 외국의 침략 세력을 오랑캐 로 규정하고, 그들과의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게 된 화이론의 논리는 민족 정통성의 수호를 위한 배척 태도 로서 벽이단론을 역사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이어 영 · 정조(英 · 正朝) 때부터 서양 문물과 천주교 신앙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양 이(洋夷)라는 새로운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 세기 후반의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를 통해 프랑스와 미국의 침입을 받았을 때 나타난 척양 (斥洋)의 논리는 바로 서양의 천주교를 사도(邪道)로 규 정하는 벽이단론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된 것이다. 또한 1876년의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이후 일본의 침 략 야욕에 대해 척왜(斥倭)를 주창하게 되고, 일제의 식 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항일 저항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벽이단론은 외국의 침략 세력을 오랑캐로 규정하 고 배척하는 과정에서 17세기 이후에는 존화 양이(尊華 洋夷)의 논리로 나타나게 되었고, 19세기 이후에는 위정 척사(衛正斥邪)의 논리로 계승되었다. 〔반성과 그 의미〕 도학의 순수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는 때때로 폐쇄적이고 편협한 데 빠져서 외부의 공격에는 과감한 반면에 스스로 진실함을 유지하는 데는 취약한 면을 보였다. 이러한 과오에 대하여 유교 안에서도 반성 과 경고가 있었고, 때로는 개방의 자세를 취하여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자고 요구하는 주장 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이는 "우리 나라 학자들이 육 왕(陸王)에 물들지 않은 것은 인심이 순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속습에만 힘써 학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니, 자기 의 욕망에 따르는 것은 곧 이단이다"라고 하여, 양명학 을 비판하는 주자학파에게 자신의 학문적 진실성을 반성 하도록 촉구하였다. 또 양명학에 기울어졌던 장유(張維) 는 "우리 나라에서 정주학(程朱學)만 칭송하고 다른 학 설을 모르는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심하게 구속을 받아 지기(志氣)가 없는 까닭이다" 라고 하여 도학의 벽이단론이 지닌 학문적 폐쇄성과 기개의 상실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은 이단의 개념을 정 의하여 "한 구절의 말에만 집착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성인(聖人)의 도(道)는 구속되고 막힌 것이 아 니라 시중(時中)의 도리라고 강조하였고, 양주 · 묵적의 입장도 일면적에서는 취할 것이 있음을 인정하는 관용과 진지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 조선 시대 도학 · 성리학의 벽이단론은 비판적 · 배타 적 정신을 통해 주자학의 정통성을 관철함으로써, 사상 적 통일과 더불어 사회적 안정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 다. 그러나 벽이단론의 강경한 배척 자세는 사상의 자율 성을 억압하고, 권력 체제의 그늘 아래서 보수적 안정을 누리면서 스스로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 후 기에 형성된 실학(實學) 사조에서는 이러한 벽이단론의 폐단에 대한 성찰과 개혁을 위한 시도가 있게 되었지만, 이미 폐쇄적인 견고한 관습 안에 안주해 왔던 유교 사상 과 사회는 한말 외세의 침략을 당하면서 그 체제가 전반 적으로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위정 척 사론) ※ 참고문헌 주희 · 여조겸, 《近思錄》 이만채, 《闢衛編》 송병직, 《尊華錄》 /허식 · 곽한일, 《大東正路》/금장태, 《유교와 한국 사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0. 〔琴章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