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종 (1895~1977)
卞基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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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변기종.
연극 배우. 본명은 창규(昌圭). 세례명은 마르코.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초계(草溪). 1895년 7월 29일 서울 에서 태어나 1911년 계성학교(啓星學校)를 졸업하고, 이듬해 연흥사(演興社)에서 혁신단(革新團)이 공연한 신파극 <진중설>(陣中雪)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아 연극 계에 입문하기로 결심하였다. 같은 해 11월 천주교 신자 인 박창한(朴昌漢)의 후원으로 극단 청년파일단(青年派 一團)을 결성하여 지방 순회 공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 동을 벌였으나, 얼마 안 가서 재정난으로 이 단체가 해산 됨에 따라 유일단(唯 一團)에 새로 입단하 여 연극 배우로서의 기량을 닦았다. 1914 년 말에 유일단 역시 해산되자 예성좌(藝 星座)에서 활동하다 가 1919년 7월에 조 선 문예단(朝鮮文藝 團)에 잠시 참여 한 뒤, 1920년 4월부터 는 김도산(金陶山)의 신극좌(新劇座)로 옮 겨 연쇄극에 출연하였 는데,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연기자로서뿐만 아니라 연극계의 지도 자로서 극단 경영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5년 12월에는 민립극단(民立劇團)을 창단하였고, 이듬해 10월에는 신파극 배우들을 결집하여 다시 조선 극우회(朝鮮劇友會)를 창단하였다. 그 후 이 극단은 호 남 및 서울 · 원산 등지의 공연을 끝내고 북만주로 진출 하기 위해 함경남도 단천(端川)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탄 압으로 강제 해산당하였다. 1929년 12월에는 지두한 (池斗漢)과 함께 신파극단 조선 연극사(朝鮮硏劇舍)를 창단하여 10여 년 동안 만주 일대의 동포들을 찾아 순회 공연을 하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는데, 이로 인해 일 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35년 11월 동양극장(東洋劇場)이 설립되자 그 전속 극단인 청춘좌 (青春座)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직후에는 극단 자유극장 自由由劇場)을 조직하였으며, 1951년 상록극회(常綠劇 會)에 이어 1953년 5월 자유극회(自由劇會), 1955년 8 월 민극(民劇) 등의 창립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1956년 4월에 예술원(藝術院) 회원으로 피선된 변기종 은, 1957년 서울시 문화 위원, 국립극단(國立劇團) 단 장, 1958년 10월 한국 무대 예술원 부원장, 1961년 12 월 개편된 국립극단 단원 및 연극 협회 고문, 1972년 1 월 국립극단 명예 단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리고 서울시 문화상 . 예술원상 · 연예 공로상 등을 수상하였 으며, 문화 훈장 · 국민 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여받았다. 이처럼 변기종은 초창기 신파극 시대부터 줄곧 연극의 길을 걸어온 훌륭한 연기자였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 자로서 본당 사목 및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 였다. 1923~1930년대에는 명동(明洞) 본당에서 청년 활동을 하였고, 1964년부터는 돈암동(敦岩洞) 본당 제3 대 총회장을 맡아 레지오 마리애, 연령회(煉靈會) 등을 활성화시키는 한편, 각종 후원회에 가입하여 많은 지원 을 하였다. 이어 가톨릭 연예인 협회의 고문으로 추대되 어 회원 상호간의 협력 및 대외 활동에 크게 공헌하다가 83세 때인 1977년 5월 17일 노환으로 사망하여 영복산 묘지에 묻혔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敦岩本堂三十年史》, 천주교 돈암 동 교회, 1985/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9, 한국정신문화연구 원, 1989, pp. 658~659. [李裕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