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문
邊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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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변문 전경(왼쪽)과 1842년 12월 29일 이곳을 통하여 조선으로 입국하는 김대건 신부(탁희성 작) .
만주에서 흥기한 청나라가 조선의 침입을 방비하고자 장책(長柵)을 쌓고, 장책의 각 요소에 설치하였던 관문 (關門). 본래 청나라에서 설치한 장책은 만주 북쪽에서 요동 남쪽 해안까지 2,000여 리에 모두 72개소가 있었 고, 여기에 모두 6개의 변문이 설치되었는데, 그중에서 북경으로 가는 조선의 사행로(使行路) 도중에 있던 것이 바로 봉황성(鳳凰城) 변문 즉 봉황문이었다. 이 봉황문 을 청나라에서는 변문이라 하였고, 조선에서는 책문(柵 門) 또는 고려문(高麗門), 현지인들은 가자문(架子門)이 라고 불렀다. 또한 조선에서는 의주(義州) 성문을 따로 변문이라고도 불렀다. 〔변문의 위치와 책문 후시〕 봉황성 변문은 청나라의 입관(入關) 이전인 1636년(崇德 원년)에 봉황성 동쪽 5 리 지점에 개설되었으며, 압록강에서는 130리 떨어져 있 었다. 압록강과 변문 사이는 사람이 살지 않는 구탈(甌脫, 변경의 황무지)이었다. 또 변문은 봉황산 끝 자락과 남쪽 해변 봉우리의 10여 리 중간 지점에 설치된 책(柵)으로 설치되었는데, '책' 이란 것은 한 길 반이 되는 나무를 세 우고 그 사이에 나무를 엮어서 말이나 사람이 드나들 수 없도록 만든 것에 불과하였다. 그 후 성조 강희제(康熙 帝) 때인 17세기 말에 이르러 봉황성 내의 인구가 증가 하게 되자 청나라에서는 이곳의 목축과 농경지를 확대할 요량으로 변문을 더 남쪽으로 이설함으로써 조선 의주 (義州)와의 거리가 120리로 좁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까지 변문 안의 인가는 30~40호 정도에 불과 하였고, 그 대부분이 시사(市肆)였다. 조선에서 청나라에 보내는 사행원들은 언제나 이 변문 을 통과해야만 하였다. 이때 사신 일행이 봉황성장(鳳凰, 城長)에게 도착을 통보하면 심양 낭사(瀋陽郎使)가 약간 의 통과세를 받았을 뿐 심하게 검색하지 않았으며, 회환 시에는 미리 뇌물을 주고 한두 종류의 복물( 卜物)만을 보여 주면 되었다. 봉황성장은 오히려 고거(雇車)와 장 시(場市)에서의 징세를 통해 이득을 보고 있었으므로 조 선 상인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였다. 당시 이곳에서 행해진 장시는 공무역인 개시(開市)가 아니라 주로 밀무역인 후시(後市)였다. 특히 변문에서 이루어지는 밀무역을 조선에서는 책문 후시(柵門後市) 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17세기 중반부터 사신의 왕래를 계기로 변문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1593년(선조 26)과 1646년(인조 24)에 압록강 대안인 중강(中江, 즉 馬子臺)에서 개설되었던 중강 개시(中江開市)는 점차 의 주 잠상(潛商)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밀무역인 중강 후시(中江後市)로 바뀌게 되었으며, 1700년(숙종 26)에 는 이 중강 후시마저 금지되자 책문 후시가 더욱 성행하 게 되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1795년(정조 19)에 이르러 사행원들의 경비를 보충한다는 명목 아래 매년 4만 냥의 세금을 받고 책문 후시를 허락하게 되었다. 〔변문과 한국 천주교회) 변문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 된 직후부터 북경 교회와의 연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하였다. 훗날 조선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이 조선 교회 의 밀사를 만난 곳도 바로 변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통 과하기 위해서는 사신 행렬에 들어가거나 장시가 열리는 기회를 이용해야만 하였다. 이에 천주교회의 밀사들은 어렵게 사신의 마부나 장사꾼 자리를 얻어서, 그리고 훗 날 조선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은 장시가 열리는 틈을 타 서 변문을 통과하였다. 천주교회의 밀사로 변문을 통과하여 북경을 다녀온 최 초의 신자는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었다. 그에 앞서 1784년 초에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李承 薰, 베드로)이 있었지만, 그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 된 부친을 따라갔으므로 변문을 통과하는 데는 전혀 어 려움이 없었다. 윤유일은 1889년에는 혼자서, 1890년 에는 오(吳) 요한과 함께 장사꾼으로 변장을 하고 북경 을 다녀왔으며, 이어 1794년에는 지황(池璜, 사바)이 밀 사로 선발되어 북경을 다녀오게 되었다. 같은 해 2월 지 황은 귀국 도중 변문에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 를 만났고, 12월에는 윤유일, 황심(黃沁, 토마스) 등과 함께 다시 변문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조선으로 영입 하였다. 이 밖에도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밀사로 선발되 어 변문과 북경을 왕래한 신자들로는 김유산(金有山, 토 마스), 옥천희(玉千禧, 요한) 등이 있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북경 교회와의 연락 이 두절된 채 생활하던 조선 교회의 신자들은 1811년 무렵부터 다시 북경을 왕래하기 시작하였으며, 1834년 초에는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등이 중국인 유방제(劉 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1836년 초에는 다시 프랑스인 모방(Maubant, 羅) 신부를 변문에서 만나 조선에 영입할 수 있었다. 또 1836년 말에는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 건(金大建, 안드레아),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 (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등이 정하상, 조신철(趙 信喆, 가롤로), 이광열(李光烈, 요한) 등의 안내를 받아 변문에서 샤스탕(Chastan, 鄭) 신부를 만난 뒤 마카오로 갔다. 그중에서 김대건은 1842년 말에 변문에서 밀사 김(金) 프란치스코를 만난 뒤 의주를 거쳐 잠시 귀국한 적이 있었고, 1845년 초에는 부제로서 변문에서 교회 밀사를 만나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더욱 심해지면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프랑스 성직자들은 변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가 없게 되자 해로(海路)를 찾아야만 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에 이 해로 탐색에 나섰다가 체포되어 순 교하였고, 최양업 신부도 해로를 탐색하다가 1849년 말 에 가까스로 변문에서 밀사를 만나 귀국할 수 있었다. 이 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 어날 때까지, 그리고 다시 신앙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주 로 해로를 이용하여 조선에 입국하였지만, 그 동안에도 조선 교회의 밀사들은 변문을 통해 중국에 있는 선교사 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 책문 ; → 성직자 영입 운동)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朴趾源, 《燕岩集》 《通文館志》 《萬 機要覽》 《燕行錄選集》 全海宗, 《清代 韓中朝貢關係考》, 일조각, 1970/ 金聖七, 〈燕行小攷一 韓中 交涉史의 日誌>, 《歷史學報》 12집, 역사학회, 1960/ 李元淳, <赴燕使行의 經濟的 一考一私貿 易活動을 中心으로>, 《歷史教育》 7집, 역사교육연구회, 1963/ 金鍾圓, 〈朝清交 涉史研究〉,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1983/ 徐惠源, 〈朝鮮 後期 柵門貿易 變遷에 관한 연구>, 《弘益史學》 6집, 1996. 大學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