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론

辯神論

〔라〕theodicea · 〔영〕theodicy

글자 크기
5
하느님의 시험과 단련을 시키기 위한 고통이라는 변신론의 전형적인 예가 재난을 당한 욥이다.
1 / 2

하느님의 시험과 단련을 시키기 위한 고통이라는 변신론의 전형적인 예가 재난을 당한 욥이다.


현재의 악과 고통, 그리고 악의 존재와 유래에 대하여 논하면서, 이에 대한 하느님의 선함과 정의를 변호하는 설. '신정론' (神正論)이라고도 한다. 변신론은 ‘하느님’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테오스’ (Θεός)와 ‘의’(義) 또는 ‘정의’(正義)를 뜻하는 ‘디케’ (δίκη)의 합성어인 ‘테오스디케’ (θεοδίκη)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라이프니츠(G.W. von Leibniz, 1646~1716)가 1697년에 처음 사용하였는데, 자신의 저서 《변신론》(Theodizee, 1710)을 출판하면서 철학적·신학적 용어로 정착되었다. 변신론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닌 조로아스터교나 다신론적 세계관을 지닌 원시 사회에서는 제기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동양에서도 상대적으로 유일신 개념이 거의 없었던 까닭에 변신론이 성립할 이 유나 근거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전선(全善)하고 전능 한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는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이나 일원론적 세계관을 지닌 서양 사상계에서는 이 유일신의 선성(善性)과 악한 현실 사이에서 오는 문제는 중대한 문제였다. 〔고대 근동 종교에서의 변신론〕 고대 이집트에서는 《농부의 웅변적인 항변》(ANET 407~410), 《자살》(ANET 405~407), 《아멘엠헤트(Amenamhet)의 교훈》(ANET 418 ~419) 등 부당한 고난의 문제에 대해 논하는 문학 작품 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신의 대리자인 왕(파라오)이 통치하는 곳에 왜 혼란이 생기는가에 대한 작품들이었 다. 여기서 신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이와는 달 리 메소포타미아 작품들에서는 사회적 혼란과 고통의 책 임에 대해 신들을 정면 공격한다. 수메르인의 욥기라고 할 수 있는 《인간과 그의 신》(ANET 589~591)을 비롯하 여 신에 대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공격의 화살을 퍼붓 고 있는 좀더 후대의 작품인 《나는 지혜의 주님을 찬양 하리라》(ANET 434~437), 《염세주의의 대화》(ANET 600~ 601), 《바빌로니아 변신론》(ANET 601 ~604) 등이 대표적 이다.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경향에 영향을 받아 악의 문 제를 다른 변신론적 논쟁 문학들이 탄생되었다. 〔유대-그리스도교적 변신론〕 인류의 고대사 중에서도 악의 문제를 가장 진지하게 다룬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 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풀기 힘들었던 문제들 가운 데 하나는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예레 12, 1) 하는 악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러면서도 구약성서에서는 악의 현실 앞에서도 하느님의 행동을 정 당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왜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계에 고통과 악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 유대인들은 보통 세 가지 유형을 제기하였다. 첫 번째로 고통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최초 의 죄악을 이야기하는 창세기에 잘 나타난다. 이에 따르 면, 물리적이든 도덕적이든 인간의 악과 고통은 하느님 을 배반한 결과이다. "비참하여라, 악한 사람. 자신이 저 지른 일에 앙갚음을 받으리라"(이사 3, 11). 그러나 여기 서의 문제는 죄를 별로 짓지 않았는데도 큰 고통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야훼를 따르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보다 더 고통을 받는 이유에 대한 반성적 질문 속에서 고통이 반드시 죄의 결과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생겨났다. 이런 관점에서 두 번째 의미의 변신론인 하느님의 시 험과 단련을 시키기 위한 고통이라는 해석이 등장하였는 데, 욥기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욥은 의인(義人)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감당하기 힘든 재난이 닥친다. 이때 욥의 친구 엘리후는 하느님이 교육적인 차원에서 욥을 시험하 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단의 유대인들 사 이에 퍼져 있었던 견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이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범죄와 상관없이 일부러 고통 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욥기는 인간의 고통을 소재로 한 하느님의 전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권을 쥔 하느님 은 단지 인과 관계를 따르는 분이 아니라, 인과 관계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권능을 행사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능력은 이스라엘에게는 물론 이방인에게도 미 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계획과 반성에 따라 구원하 신다기보다는 때로는 멸망시키고 때로는 새로운 길로 인 도하시는 완전히 색다른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이사 55, 8). 이런 맥락에서 고통은 인간을 단 련시키는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 섭리의 표현이다. 이러 한 견해는 자연스럽게 유대교적 변신론의 세 번째 형태 로 이어진다. 그것은 악과 고통의 구원적인 측면이다. 특 별히 제2 이사야서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통하여 고난 이 당사자와 다른 이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일종의 대속적인 믿음을 전개한다. 이런 변신론은 그리스도교에 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 안에서 인류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 그리스 도교 신앙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함으 로써 신성 모독죄로 기소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이 최악의 상 황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독생자가 가장 처절한 고통의 현장에서 죽었지만, 하느 님께서 그를 다시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하느님 신앙의 빛에서 파악한 결과이다. 이에 따라 하느 님 신앙을 선포하였던 역사적 예수가 신앙의 그리스도로 선포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유대교적 변신론이 있다. 최악의 상황을 하느님 신앙과 관련 지으면서 그 안에서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보는 것이다. 몰트만 (J. Moltrman, 1926~ )은 예수가 죽을 때 하느님도 그 십 자가에 달려서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함께 죽었다는 신학 을 전개시켰다. 그는 하느님이 인간의 적나라한 현실 안 에 가장 적극적이고 첨예한 형태로 참여함으로써 종말에 있을 인류의 구원을 앞당겨 보여 주었다는 고통의 신학 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변 신론적 신학으로 여겨진다. 〔서양 철학과 신학에서의 변신론〕 중세 이전 : 서양에 서 악과 관련된 고대의 여러 사상들을 처음으로 논한 학 자는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일 것이다. 그는 일 원론(一元論)을 견지하면서 악은 비실재이며, 신이 아닌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입장을 폈다. 이런 물음은 아우구스티노(354~430)의 말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 따라서 내가 정의 내리려 하고 있는 이 악은 실체가 아니다"(《고백록》 VII , 18). 모든 만물의 선성(善性)을 인정하는 그의 입장은 신플라톤 사 상의 영향으로 여겨지지만 무엇보다도 창조 신학에 근거 한다(De Natura Boni, 18 ; Creation I).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 든 것의 창조주이며,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성상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은 존재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 이며, 본성으로부터의 타락이요 이탈이다. 그것은 비존 재로의 경향성이며, 존재의 결여이다(De Morbis Manichaeorum, II , 12 Contra Epistolam Fundamenti 39 ; De Natura Boni, 4). 이 악의 기원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불변의 선 (善)을 저버리고 변하는 선으로 향한 천사와 인간의 의 지에 있는 것이다(Enchindion, 23).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도 죄나 악이 어떻게, 그리고 왜 생겨났는지에 대한 근원적 인 질문에는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한 채, 악 역시 그것 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뜻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모호 하게 결론을 맺었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악에서 선을 이 끌어 내시기 위해 악도 선용하신다고 말한다. "심지어 우리의 악한 일들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선한 일을 행하신다" (De Musica, Ⅵ, 30). 이러한 입장은 아리스토텔 레스의 도움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게서 더 논리적이고 존재론적으로 발전되면서, "존재는 선하 다" , 하지만 "악은 선의 단순 부정이 아니라 사물이 반드 시 지녀야 할 선의 결핍 혹은 결함이다" (《신학 대전》 I , 48, 5 ad I)라는 입장이 중세 이후까지 유지되었다. 라이프니츠 : 변신론에 대한 논의는 라이프니츠에 의 해서 더욱 본격화되었는데, 그는 《변신론》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슷한 입장을 따랐다. 그는 악을 형이상학 적 악(유한성), 도덕적 악(죄), 자연적인 악(고통)으로 구 별하였다. 그에 따르면 고통과 질병, 불행과 악이 이 세 계 안에 존재하지만 이 세계는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선 의 세계이며, 의로우신 하느님은 악의 원인일 수 없다. 라이프니츠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마찬가지로 악을 선의 결여로 이해하였으며, 아우구스티노처럼 악의 기원은 인 간 안에 있다고 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신은 인간 을 유한한 존재로 만들었고, 인간은 이 유한성 때문에 악 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 악에서 인간의 신체적 고통이나 죽음도 생겨났다. 그렇지만 이 악은 세계 질서를 위해 없 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분적인 무질서는 더 큰 질서를 낳기 위해 필요하고, 악은 우주의 더 큰 계획에 따라 더 큰 선으로 바뀌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악은 세계의 완 전성과 선의 실현을 위한 가능 조건이며, 신의 창조 목적 을 위한 필연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신론의 입 장에서 보면 현재의 고통은 내세에서 받을 행복의 전조 (前兆)라는 변명도 가능해진다. 그리고 다수의 행복과 선이라는 명목하에 소수가 당하는 고통과 불행을 정당화 시켜 버리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칸트 (I. Kant, 1724~1804)는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을 비판하였 다. 칸트 : 칸트는 라이프니츠가 도덕적 악과 물리적 악을 혼동했다고 비판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물리적 악과 도 덕적 악 사이에는 필연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 인간의 죽 음과 질병과 같은 물리적 악은 자연 안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또 일어날 수 있는 자연적 사실이지 인간의 책 임이 아니다. 이것은 사변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 이 아니라, 의학과 자연 과학 같은 자연에 관한 지식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런 점에 서 물리적인 악을 두고서 변신론적인 논의를 하는 것은 무가치하다.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 적 악뿐이며, 도덕적 악은 신이 아닌, 인간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문제이다. 선이나 악은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질서가 바른가 그렇지 못한가 에 따라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칸트는 이런 식으로 악 이나 고통은 '존재' 가 아니라 '행위' 일 뿐이라고 주장한 다. 악, 특별히 도덕적 악은 인간 자신이 자유로운 행위 안에서 저지른 것이므로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악과 그 로 인해 타인이 겪게 된 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칸 트는 도덕 철학적 틀을 통해 악을 전적으로 행위의 차원 에서 해명하였다. 악이라는 현실에 대해 신을 변증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천 이성의 범주에서 신을 논외로 하는 변신론을 전개하는 셈이다. 그러나 신을 논외로 하는 한, 칸트식의 접근도 여전히 한계를 지닌다. 진정한 의미의 변신론이라면 신과 악의 문제를 정면 대결시켜야 한다. 더욱이 변신론이 그리스 도교 신학과 인간론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기에 변신론 에서 신에 대한 논의를 소외시킬 수는 없다. 아울러 칸트 의 변신론적 논의는 자연 과학이 발달하면 고통을 느끼 지 못하는 인간도 탄생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가정도 가 능하게 해준다. 이에 대한 대안이 영국 출신의 신학자이 자 종교 철학자인 희(John Hick, 1922 ~ )이 전개하는 변 신론이다. 힉 : 희은 지금까지의 변신론은 하느님의 창조가 애초 부터 완전한 것이었다고 전제한 까닭에 악이 끼어들 여 지를 두지 않았으며, 처음의 완전한 창조에 잘못이 생긴 다고 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이레네오적인 변신론을 전개하였다. 리용의 주교였던 이 레네오(Irenaeus, 120/140~200/203)에 의하면 첫 사람 아담 과 하와는 아이와 같이 미숙한 까닭에 아버지이신 하느 님의 목적에 맞는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성장기 를 필요로 한다. 인간이 실락원(失樂園)의 상태에 있는 것은 영적 · 도덕적 타락의 결과라기보다는 인간은 원래 완전하지 못하게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원죄란 원초적인 재앙의 결과가 아니라, 신의 창조적인 계획 중의 한 단계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 역시 원죄의 결과라기보다는 끝없는 성장 으로의 출발점이다. 현실적인 실패와 좌절이 없는 곳에 서는 도덕적 범주도 무의미해진다. 악을 거스르고 선을 추구하면서 인간은 영적으로 성장한다. 죄악이 죄악으로 폭로되는 곳에 인간의 구원도 있다. 구원은 세계가 악에 서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선에 의한 악의 극복을 뜻하는 데, 희에 따르면 이것이 신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전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예수의 삶과 죽 음이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지고(至高)의 선(善)에 봉사하도록 강요된 최고의 악이다. 그러나 지 고의 선은 이 최고의 악과 고통으로부터 초래된다. 그런 점에서 신은 악으로부터 선을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다. 희은 악의 책임이 결국 신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악이란 결국 지고의 선에 봉사하는 것이다. 악을 거스르 는 싸움 안에서 종말론적 구원이 앞당겨진다. 희에 의하 면 온 인류는 하느님의 나라로 상징되는 최종적 구원을 향하고 있다. 이레네오의 관점에 따른 희의 변신론은 악 의 문제를 하느님의 전능, 지혜, 선, 자비와 조화시켜야 한다는 선험적이고 형식적인 진술을 넘어서 죄악을 죄악 으로 폭로하고 현재의 악과 고통을 지고의 선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주는 종말론적 희망 안에서 극복할 수 있도 록 도와 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모든 것은 그 분에게서 비롯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그분을 위하 여 있다" (로마 11, 36)는 성서의 말씀을 변신론적 차원에 서 해석해 주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언제나 악이라는 실제적 상황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그러므로 악을 단순히 존재의 결핍이라고 무시 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서는 악을 통해 선을 이루신다 는 점만 강조하면서 고통스러운 악을 방조해서도 안된 다. 악은 인간의 선행(善行)으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다. 악이 제거되는 곳에 인간의 구원도 있다. 구원론적으 로 보면 고통스러운 현실은 인간의 구원을 참 구원이게 하는 전제와 같은 것이다. 악이 없는 곳에는 구원도 없 다. 죄로부터의 속량은 그 속량의 반대편인 고난과 죽음 으로써만 표현된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악의 현실이 구 원이라는 희망을 가져다 준다. 세상의 악이 새로운 구원 을 중재해 주는 성사적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 "죄가 많 아진 곳에 은총은 넘쳐흘렀습니다" (로마 5, 20). (->악 ; 자연 신학) ※ 참고문헌  J.L. Crenshaw, Supplementary/ W. Kern · J. Splett, 《SM》 6, pp. 213~218/ J.L. Crenshaw, 6, pp. 444~4471 R.M. Green, 《ER》 14, pp. 430~441/ J. Hick, Evil and the God ofLove, London, Macmillan, 1985/ -, The Second Christianity, London, SCM Press, 1983/ J. Bowker, Problems of Suffering in Religions of the World, Cambridge Univ. Press, 1970/ M.M. Adams · R.M. Adams eds., The Problem ofEvil, Oxford Univ. Press, 1990/ L.E. Loemker, Dictonary ofthe History of Idea, vol. 4,pp. 378~3841 W. Fulton, Theodicy, , pp. 289~291/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편, 《惡이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窓, 1992. 〔李贊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