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丙寅迫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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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 기념화(정창섭 작,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 으로 지속되어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박해. 일반 적으로는 1866년(고종 3년, 병인년) 초에 시작되어 1873 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 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실제로 포도청에서 천주교 신자를 체포한 것도 1873년에 마지막으로 나온 다. 이를 다시 세분해 보면, 박해 초기인 1866년 봄의 박해,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인 1866년 가을부터 이 듬해까지 계속된 박해, 덕산 굴총 사건(德山掘塚事件)으 로 인한 1868년의 박해,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인한 1871년 이후의 박해 등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에서 1868년의 박해를 특별히 '무진박해' (戊辰迫害)라 고 지칭하기도 한다. 다만 이전의 박해와는 달리 이때에 는 1873년 이후에도 박해를 마감하는 어떤 윤음이나 명 령이 반포되지는 않았으며, 따라서 1877~1879년 사이 에 다시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 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 되고 있는데, 그중 대부분이 무명(無名) 순교자이고, 이 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훗날 성인품에 올랐다. 또 이 박해와 관련되어 있는 순교 사적지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으며, 현재에도 각 교구별로 이들의 순 교 행적을 조사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I . 원인과 발단 병인박해의 원인(遠因)으로는 일반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벽이단(闢異端)의 전통과 척사(斥邪) 의식, 천주교 교리와 유교 사회 윤리와의 갈등, 천주교 신자들의 대외 의식과 이에 대한 위정자들의 반응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문제는 서양 세력의 위협이 있을 때마 다 천주교 세력이 그 앞잡이로 이해되면서 위정자들에 의해 배외(排外) 사상을 부추기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 으며, 병인박해의 발생과도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특히 1860년 10월 영 · 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 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크 게 당황하였고, 프랑스 함대나 다른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한 위기 의식까지 갖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의식은 북경 함락 이후에 체결된 북경조 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를 차지하고 남하 정책을 펴 오 던 러시아〔俄羅斯〕가 1864년 2월(음) 두만강 근처에 나 타나 서한으로 통상을 요구한 이래 자주 북변을 침입하 면서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어 1865년 11월에는 러시아인 수십 명이 다시 경흥(慶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한 일로 인해 경흥 부사를 문책한 일까지 있었다. 당 시 인도차이나 주재 프랑스 함대 사령관 게랭(Guérin) 소 장도 1856년 7월 16일 이후 약 2개월 동안 조선 해안을 정탐하고 귀국하여 남하 정책을 펴는 러시아의 행동을 보고하였다. 당시 고종의 친부로 정권을 잡고 있던 흥선 대원군 이 하응(李是應)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측과 교섭 을 맺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려 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미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1864년 8월에는 사람을 중간에 내세워 제4대 조선교구 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프랑스가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막아 준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고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베르뇌 주교 또한 러시아의 남 진을 우려하고 프랑스와 조선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러 시아 세력을 저지한다는 방아책(防俄策)까지 수립해 놓 고 있었으나, 그로서는 프랑스 함대를 동원할 처지가 아 니었으며, 한편으로는 대원군의 제안에 의혹을 품고 있 었으므로 즉시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때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홍봉주(洪鳳周, 토마스)는 남종삼 (南鍾三, 요한)을 찾아가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과 방아 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해 주도록 하였으나, 남종삼은 이 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원군이 다시 베르뇌 주교와의 접촉을 시도한 것은 1865년 11월 말(음)이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러시아인 들이 경흥에 나타난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때 천주교 신 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와 왕의 유모인 박(朴) 마르타, 그리고 홍봉주를 비롯하여 김면호(金冕浩, 토마스), 이유일(李 惟一, 안토니오) 등은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의 만남을 주선했으며, 대원군에게 방아책을 건의하기로 했다. 그 러자 남종삼도 청원서를 작성하여 대원군을 만나게 되었 고, 김면호는 베르뇌 주교에게, 이유일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이에 따라 다블 뤼 주교는 1866년 1월 25일(음 1865년 12월 9일)에 충청 도에서, 베르뇌 주교는 1월 29일에 황해도에서 상경하 게 되었다. 또 남종삼도 재차 대원군을 만났으며, 이어 홍봉주의 집에 와있던 베르뇌 주교를 만나 "러시아의 남 진을 막기 위해서는 북경에 있는 프랑스 영사관에 연락 하는 것이 좋겠다" 고 건의한 뒤 부친이 있던 제천 땅 묘 재〔山尺〕로 낙향하였다. 남종삼이 낙향한 이유는 베르뇌 주교의 상경을 알리기 위해 두 번째로 대원군을 만났을 때, 그가 낙향을 권유하 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이미 대원군의 마음 이 변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때는 방아책까지 받아들일 생각을 하였던 대원군의 마음이 변하게 된 데 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프랑스 선교사들과 의 조속한 회동을 기다리던 대원군이 초조해졌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세력에 대한 의혹이 일게 되었고, 둘째로 러시아의 월경 행위가 잠잠해지면서 위험이 사라졌으며, 셋째로 반대파 대신들인 조두순(趙斗淳), 정원용(鄭元 容), 김병학(金炳學) 등이 정치적 공세를 늦추지 않고 천 주교와의 접근을 비난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넷째로 북 경으로 간 사신으로부터 1862년 이래 중국에서 자행된 천주교 신자와 서양인 살육에 대한 내용이 서한으로 전 달된 때문이었다. 이 소식은 특히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 는 조정의 대신들을 자극하였고, 마침내는 대원군을 압 박하여 박해령에 서명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병 인박해의 시작이다. 그에 앞서 내포 출신으로 경상도 곤악이(현 문경군 동로 면 鳴田里의 건학이)에서 생활하던 전(全) 프란치스코 사 베리오, 내포 출신으로 예목이(문경군 문경읍 中坪里) 회장 의 아들인 이(李) 요한이 경상도에서 체포된 후 공주로 옮겨져 1866년 1월 26일(음 1865년 12월 10일)에 순교 하였다. 이어 평양 논재(평남 대동군 栗里面 沓峴里)에서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이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 방되었는데, 이것은 공식 박해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II 박해의 전개 과정 〔박해 초기의 양상〕 대원군과의 만남을 기다리던 베르 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는 조정으로부터 소식이 없자 다 시 지방 순회에 나섰다. 이때 베르뇌 주교는 서울 인근의 교우촌을 둘러보고는 다시 상경하였는데, 1866년 2월 23일(음 1월 9일) 포졸들이 몰려와 베르뇌 주교, 홍봉주, 그리고 하인 이선이(李先伊)를 체포하였다. 이어 2월 25일에서 3월 1일 사이에는 브르트니에르(Bretenières, 白)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와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전장운(全長雲, 요 한), 최형(崔炯, 베드로) 등이 잇달아 체포되었고, 배교 하고 석방되었던 우세영이 다시 마음을 고쳐 상경한 후 에 자수하였다. 이들은 곧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여기에서 이선이가 남종삼을 밀고하자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한 뒤 함께 국문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3월 1일 남종삼이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체포된 이튿날 국청(鞫 廳)이 개설되었다. 의금부에서는 여러 차례 신문과 형벌이 계속되었다. 그런 다음 판결이 내려져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 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등 4명은 3월 7일(음 1월 21 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으며, 남종삼과 홍봉주는 같은 날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순교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이날부터 천주교 신자들과 서적을 색출해 내도록 전국에 명하는 동시에 남종삼 · 홍봉주의 가족에 대하여는 노륙 지전(戮之典)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3월 9일에 는 최형과 전장운을 서소문 밖에서 처형하였고, 3월 11 일에는 정의배, 우세영과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배론 신 학교의 푸르티에(Pouthie, 申) 신부, 프티니콜라(Petinicolas, 朴) 신부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충청도에서는 3월 11일에 거더리(지금의 예산군 고덕면 上宮里)의 손(孫) 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 가 체포되었고, 이어서 위앵(Huin, 闕) 신부, 오매트르 (Aumaître, 吳) 신부, 황석두(黃錫斗, 루가) 등이 체포되 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여기에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배론 성 요셉 신학교의 집주인 장주기(張周基, 요셉)가 추가되었다. 이들 5명은 3월 30일(음 2월 14일)에 보령 의 갈매못(지금의 충남 보령군 오천면 永保里의 水營 백사장) 에서 순교하였다. 같은 무렵에 거더리에서는 손자선(孫, 토마스)이 체포되어 공주로 이송되었고,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고백한 뒤 3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았 다. 한편 공주 진밭(현 공주군 사곡면 新永里)에 거처를 두고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는 박 해 소식을 듣고 3월 6일에 경상도를 떠나 진밭, 버시니 (공주군 신풍면 仙鶴里) 등지에서 피신 생활을 하다가 5월 18일 페롱(Féron, 權) 신부를 만났다. 당시 칼래(Calais, 姜) 신부는 박해 소식을 듣고는 공소 순방을 중단하고 경상도 문경의 한실, 진천의 삼박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을 거쳐 목천 소학골(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로 피신해 있다가 후에 페롱 · 리델 신부와 상봉하였다. 이 어 리델 신부는 장상인 페롱 신부의 지시에 따라 7월 1 일에 장치선(張致善), 최선일(崔善一, 요한, 일명 智嚇) 등의 안내로 용당리(龍塘里, 아산군 선장면 佳山里)에서 배 를 타고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그 후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도 10월 11일경에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병인양요와 박해의 확대〕 이후 박해는 서울뿐만 아니 라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특히 10월에는 서울을 비롯 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지의 감영이나 진영이 있는 곳에서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포졸들이 배교 자를 앞세우고 각처의 교우촌을 약탈하거나 유린하였다. 이처럼 박해가 확대된 데에는 서양 선박의 내침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1866년 4월과 8월에 유 대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Emest J. Oppert, 載拔)가 영국 상선을 타고 두 차례나 아산만에 나타나 상륙을 시도하 려다가 좌절된 일이었다. 특히 오페르트는 두 번째 내침 시에 아산만 상륙이 좌절되자 강화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6월에는 미국 상선 서프라이스(Surprise)호가 평안도 해안에 접근한 적 이 있었고, 이어 9월 2일(음 7월 24일)에는 미국 상선 제 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 하구에 닻을 내 리고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감사 박규수(朴珪壽)가 이 끄는 관군에 의해 소각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9월 12 일(음 8월 3일)자로 예문관 제학 신석희(申錫禧)가 지은 <병인 척사 윤음>(丙寅斥邪綸音)을 조야에 반포하였다. 세 번째 사건은 바로 프랑스 함대가 두 번에 걸쳐 조선 원정에 나선 '병인양요' 였다. 이 중에서도 병인양요는 프랑스 함대가 직접 조선 해 안을 위협하고 군인들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 한 사건으로, 위정자의 적대감과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 켜 박해를 부추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에 앞서 중국으로 피신한 리델 신부는 그곳에 있던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Roze)에게 선교사 학살 소식을 전하여 보복을 결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의 조선 출정은 로즈가 인도차이나 원정에서 돌아온 뒤에야 이루 어지게 되었다. 로즈는 조선에 원정하기 위해 9월 18일(음 8월 10일) 리델 신부를 통역으로, 최선일 · 최인서(崔仁瑞) · 심순 여(沈順汝) 등 세 명의 조선 신자를 안내인으로 삼아 세 척의 군함으로 체푸(芝罘)를 출발하였으며, 9월 26일에 는 한강 입구를 거쳐 양화진(楊花津)과 서강(西江)까지 올라갔다가 체푸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제1차 병인양 요인데, 이는 조선을 정찰할 목적에서 감행된 것이었다. 제2차 병인양요는 10월 11일(음 9월 3일) 로즈가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10월 14일에 강화도 갑곶진(甲串 津)을 거쳐 이튿날 강화읍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 프랑스 병사들은 강화도에 있던 은괴와 많은 서적 · 물품들을 노획하였으며, 로즈는 선교사 처벌에 대한 문 책과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다가 10월 26일과 11월 9 일에 문수산성(文殊山城)과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조 선군에게 패하고 11월 21일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이처럼 병인양요가 프랑스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어 1867년과 1868년 초 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조정에서는 우선 11월 21일에 천주교 신자들을 남김없 이 색출해 내도록 전국에 명하였으며, 이틀 뒤인 11월 23일에는 성연순(成連順)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 수형에 처하고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영을 내렸다. 이에 앞서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구실 아래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총융진(總戎陣)에 새 형장을 만들어 무수한 신자들을 이 곳에서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후 양화진은 많은 순교자 들의 피로 적셔진 곳이라 하여 신자들 사이에서는 절두 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0월 22일(음 9월 14일)에 효수된 이의송(李義 松, 프란치스코) · 김이쁜(金靛盆) 부부와 아들 이붕익 (李鵬翼), 그리고 10월 25일에 효수된 황해도 출신의 회 장 박영래(朴永來, 요한) 등이었다. 박해가 확대되면서 전라도에서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원서(요셉), 이명서(베드로), 조 화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등이 체포되어 형벌과 문 초를 받은 뒤 1866년 12월 13일(음 11월 7일)에 서문 밖 장대(즉 숲정이)에서 순교하였고, 조화서의 아들 조윤호 (요셉)는 12월 18일(혹은 28일) 전주 서천교 장터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또 대구 관덕당에서는 1867년 1 월 21일에 이윤일(요한)이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으 며, 수원에서는 1867년 3월에 박의서(사바) 회장과 두 아우가 순교하였고, 충남 공주에서는 배문호(베드로) · 최종여(라자로)가 1866년 12월 24일(음 11월 18일)에, 서정직(요한)이 1867년 1월에 순교하는 등 1868년까지 공주 · 해미 · 홍주 등지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 다. 특히 서산 강당리(서산군 운산면 龍峴里)에서는 김선양 (요셉) 등 17명이 홍주로 끌려가 12월 27일에 교수형을 당하였고, 공주의 국실(공주군 반포면 菊谷里)에서는 회장 김화숙(베드로)과 한 마을 신자 27명 가량이 함께 공주 로 끌려가 1867년 4월에 두 차례에 걸쳐 교수형으로 순 교하였다. 〔덕산 사건의 발생〕 이러한 상황 아래서 1868년 5월 에는 충청도 덕산에서 굴총 사건 즉 일명 '남연군 묘 도 굴 사건' (南延君墓盜掘事件) 또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라 불리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다시 한번 박 해가 확대되었다. 1866년 조선 원정에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간 오페르트는 이후에도 계속 조선 원정을 노리던 중, 중국에 있던 페롱 신부와 조선 신자들로부터 "덕산 가야동(현 예산군 덕산면 上伽里)에 있는 흥선 대원군의 부 친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여 그 부장품을 가지고 협상을 하면 통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 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오페르트는 독일인 러(Möller) 를 선장으로 삼아 세 번째로 조선 원정에 나섰다. 이때 그 일행에는 페롱 신부, 상해 영사관 통역관 출신이자 후 원자인 미국인 젠킨스(F.B. Jenkins), 안내를 맡은 최선일 등 조선 신자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 일행은 1868년 5월 9일(음 4월 17일)에 아산만과 구만포(九萬浦)를 거쳐 덕산 관아를 습격한 뒤, 군기를 탈취하여 남연군 묘가 있던 덕산군 현내면 가야동(伽倻 洞, 현 上伽里의 가야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묘광이 견 고한 탓에 도굴에는 실패하고, 5월 11일에는 아산만을 출발하여 이튿날 인천 영종도 부근에 머무르며 프랑스 제독 알르마뉴(Alemagne, 亞里莽)의 명의로 된 통상 교 섭 서한을 영종 첨사 신효철(申孝哲)에게 전하였다. 이 때 대원군은 경기 감사 이의익(李宜翼)을 통해 통상을 거부하고 오페르트 일행을 퇴각시키도록 하였다. 그 결 과 오페르트 일행이 3차 원정 9일 만인 5월 18일에 상 해로 물러감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젠킨스는 한 미국인에 의해 고발되었고, 페롱 신부는 프랑스로 소환 되었다가 1870년에 인도의 풍디세리로 파견되었다. 특 히 대원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이미 체포되어 있던 신자들은 역률 (逆律)을 적용하여 처단하였고, 배교한 경우도 유배형에 처하였다. 이때 먼저 오페르트에게 협력한 손경노(孫敬 老, 요한, 일명 치양), 이영중(李永中) 등이 체포되어 보 령 갈매못에서 효수형을 받았다. 이어 서울의 포도청과 각 도의 감영에 신자들을 수색 · 체포하도록 하는 영이 내려졌다. 그 결과 우선 중국 을 왕래했던 교회 밀사 장치선 · 최인서 · 김계교(金季 釗)가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였고, 굴총 사건이 일어난 충청도 덕산과 해미 일대는 물론 서울의 포도청과 절두 산, 경기도의 수원 · 남한산성 · 죽산 · 남양, 충청도의 공 주 · 홍주 · 충주 · 청주, 전라도의 전주 · 나주 · 여산, 경 상도의 대구 · 울산 · 진주, 황해도의 해주 · 황주, 함경도 의 영흥 등지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당시 조 정에서 내려진 명령은 주로 참수형이었지만, 지방에서는 주로 교수형이나 장살, 생매장 등 남형(濫刑)을 적용하 였다. 특히 생매장의 예는 충청도 순교자들에게서 나타 나고 있는데, 수부인 공주에서는 행해지지 않고 지방인 홍주나 해미 진영에서만 적용되었다. 〔신미양요와 박해의 종식〕 무진년의 박해는 1869년에 이어 1870년 말까지 계속되다가 잠잠해지게 되었으나, 1871년에 미국 함대가 내침하는 '신미양요' 로 인해 다 시 재개되었다. 이때 대원군은 5월 26일에 북경 주재 미 국 공사 로오(Low)와 사령관 로저스(Rodgers)가 이끄는 4척의 미국 함대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 하자 이를 물리쳤으며, 미국 함대가 강화도 광성진(廣城 鎭)에서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등을 살해하자 군사 를 동원하여 함대를 격퇴시켰다. 그런 다음 6월 12일(음 4월 25일)자로 명을 내려 서울의 종로와 8도 각 지역에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하도록 하였고, 여기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오면 싸우거 나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 다)이라는 글자를 새기도록 하여 척화(斥和) 사상을 고 취시켰다. 이로 인해 1871년과 1872년 사이에만 52명의 신자 가 다시 포도청에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그러나 이전과 같이 지방에서는 신자들이 체포되지 않았 으며, 조야의 상소에 따라 1873년 12월 24일(음 11월 5 일)에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 러나고 말았다. 이로써 오랫동안 계속된 병인박해는 끝 을 맺었다. 한편 중국에 있던 칼래 신부와 리델 신부는 1867~ 1868년 사이에 다시 조선에 잠입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리델 신부는 칼래 신부, 새로 조선 선 교사로 임명된 블랑(Blanc, 白圭三) 신부와 함께 1868년 말부터 만주 태장하(太莊河) 인근에 있는 차쿠(岔溝, Notre Dame de Neiges)에 머물면서 조선 입국을 계획하던 중 1869년에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 다음 1876년 5월 8일에는 블랑 신부와 드게트(Deguette, 崔東鎮) 신부를 황해도로 입국시켰으며, 이어 리델 주교 자신도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한 끝에 1877년 9월 23일 에는 두세(Douct, 丁加彌) 신부,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와 함께 황해도로 입국하였다. 그러나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 18일에 체포되어 6월 24일 중국으로 추방 되었고, 1879년 5월 16일(음 윤 3월 26일)에는 드게트 신부도 체포되어 9월 7일에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Ⅲ . 시복 · 시성과 박해의 의미 〔시복 · 시성 과정〕 1873년 이후에도 정식으로 박해령 이 철회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박해가 일어날 소지 는 충분하였다. 실제로 1877~1879년 사이에는 다시 신자들이 포도청에 체포된 기록이 나타나며, 그중에서 오랫동안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던 최선일(요한)은 1878 년에 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고, 이듬해에는 공주 출신인 김덕빈(金德彬, 바오로), 이용헌(李容憲, 이시도 로), 이병교(李秉敎, 레오) 등 세 명이 포도청에서 역시 아사로 순교하였다. 이들은 모두 리델 주교나 드게트 신 부의 체포 사건과 연관된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병인박해의 순교자로 보기는 어렵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신자수는 기록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박해 직전의 총 신자수가 23,000명이었으므로 이 보다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는 기록들은 모두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 또 교회측 기록에는 1870년 무렵까지 전국에서 8,000명의 신자가 죽음을 당한 것으로 나타나 며, 포도청의 기록에는 모두 403명(남 297, 여 106)을 체 포하여 절반 이상을 처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정 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기록을 종합해 본다면 병인박해의 순교자수는 대략 1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876년부터 이미 병인박해 순 교자들에 관한 예비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입국하기 전이었고, 아 직 박해가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본격적인 조사는 1880 년 뮈텔(Mutel, 閔德孝) 신부가 입국한 뒤에야 이루어지 게 되었다. 이어 제7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블랑 신부 가 1882년에 보령 순교자들의 유해를 홍산(洪山) 남포 의 서들골에서 발굴하였고,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 된 뮈텔 주교는 1895년에 시복 수속 담당자 르 장드르 (Le Gendre, 崔昌根) 신부로 하여금 그 동안 수집된 자료 를 바탕으로 하여 《치명일기》(致命日記)를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 책에는 모두 877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에서 29명만이 1차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어 1899~ 1900년에 교구 재판이 개정되었으며, 이후 증거가 불충 분한 이성욱(필립보) · 이성천(베드로) · 송성보(아우구 스티노)를 제외한 26명을 대상으로 1921~1926년에 교황청 수속이 시작되었다. 아울러 1923년에는 그 동안 의 증언 자료들을 다시 정리한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 록》이, 1925년에는 《병인박해 치명 사적》이 편찬되었다. 이후 26위 순교자 중에서 푸르티에 신부가 1964년에 탈락되고, 1967년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제외되면서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 브르트니에르 · 도리 · 볼리 외 · 위앵 · 오매트르 신부, 남종삼 · 전장운 · 최형 · 정의 배 · 우세영 · 황석두 · 손자선 등과 정문호 · 조화서 · 손 선지 · 이명서 · 한원서 · 정원지 · 조윤호, 그리고 이윤일 등 24위가 시복 대상자로 확정되었다. 그 결과 24위 순 교자는 1968년 7월 4일의 어전 회의에서 기적 면제를 받고,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식을 거 쳐 복자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서울 여 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의 미〕 이처럼 병인박해는 대내외적인 사건과 결부되 면서 네 단계로 진행되는 동안 전국적으로 수많은 순교 자들을 탄생시켰다. 물론 박해의 원인은 오랫동안 계속 되어 온 반천주교(反天主敎) 인식과 연관되어 있었지만, 박해가 오랫동안 지속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화이관(華夷 觀)에 입각한 흥선 대원군의 대외 인식과 쇄국 정책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아울러 1866년의 오페르 트 원정, 서프라이스호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71년 의 신미양요 등은 직접적으로 천주교와 관련이 없었음에 도 불구하고 박해를 가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에 1866년의 병인양요는 그 동안 종교 보호 정책을 펴 온 프랑스와 무력을 통해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얻으려 한 조선 선교사들의 의도가 부합되면서 현실로 나타난 것으 로, 당시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던 무력 외교의 한 단면이었다. 특히 1868년의 덕산 굴총 사건에 천주교 선교사와 신자들이 동참하였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조선의 위정 척사(衛正 斥邪) 의식을 더욱 고착시키면서 천주교를 서양 세력의 앞잡이로 인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대원 군은 '위정' 이 아니라 '척사' 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적어도 천주교에 대해서만은 '위정' 에 필요한 교화(敎 化) 정책을 전혀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 점은 1866년 10월 이후 박해가 더욱 가열되었을 때, 평양 감사 박규 수가 "천주교 세력의 확대는 위정자들의 교화가 이루어 지지 못한 데서 온 것"이라고 하면서 처벌보다는 선도를 주장한 사실과 잘 대비된다. 실제로 당시 박규수의 관내 에서는 천주교로 인해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았다. 아울러 대원군은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자로 매도하고 처 형함으로써 병인박해를 집권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였고, 이것은 북경조약 이후 더욱 강하게 대두된 조선 사회의 위기 의식이나 위정 척사 사상과 맞물려 정당성을 인정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학살은 서원(書院) 철폐, 경복궁 중건 등 대원군의 실정 과 함께 민심을 이반시키는 동시에 그의 실각을 앞당기 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교회 내적으로 볼 때, 우선 병인박해는 최대의 박해로 유례없이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는 의미뿐만 아니 라 최후의 박해였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 후에 입국한 선교사들이 처형되지 않고 중국으로 추방되었다는 사실 이 바로 박해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후에 도 사소한 박해가 계속되었지만 공적인 박해령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병인박해로 인해 철종 연간에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내면서 교우촌을 재건하고, 활발한 전교 활동 을 통해 교세 확대에 노력해 오던 한국 천주교회는 다시 한번 침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 각지의 교우촌은 철 저히 파괴되었고, 성직자나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함으로 써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박해 를 피해 살아 남은 신자들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신자 임을 숨기고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박해가 복음의 씨앗을 더 멀리 뿌리는 결과' 로 나타났던 것처럼 박해는 다시 한번 천주교 신앙을 다른 지역에 알리는 계 기가 되었으며, 각처에 새로운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 하였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가 박해 이전인 2만여 명의 신자수를 회복하게 된 것은 20여 년 뒤인 1894년이었다. 다음으로 병인박해가 시작된 이래 한 명의 순교자가 다른 순교자를 탄생시키면서 신자들의 순교 신심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순교 신심은 병인박 해와 관련된 순교 터와 순교자들의 무덤, 그들이 형벌을 당하거나 체포되었던 곳이 사적지로 조성되면서 순교자 현양 운동과 함께 현대의 교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병인박해 순교자 중에서 24위만이 시성되었을 뿐이므로 아직 시성되지 못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관련 사적지들을 개발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 병인 양요 ; 박해 ; 《치명일기》 ; 한국 성인)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下/《치명일기》 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병인 순교 자 교구 재판 기록(1899~1900)》,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병인 순 교자 교황청 재판 기록(1921~1926)》,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铺 盜廳謄錄》 《高宗實錄》 < 日 省錄》 《備邊司謄錄》 承政院 日 記》 《推案及鞫案》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병인박해 치명 사적》필 사본)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병인 치명자전》(필사본) 李能和, 《朝 鮮基督教及外交史》, 彰文社, 1928/ 柳洪烈, 《高宗治下 西學受難의 研究》, 을유문화사, 1962/ 최석우, 《丙寅迫害資料研究》, 한국교회사 연구소, 1968/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리델 문서》 1, 한국교회사 연구소, 1994.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