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丙寅洋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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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때 한강 주변의 수심을 측정하여 작성한 해로도>
1866년(고종 3)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프랑스 선 교사들을 살해한 데 대한 보복과 통상을 목적으로 중국 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 함대가 조선 원정을 계획 하여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내침한 사건. 본래는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에 따라 원정이 계획되 었으나, 오히려 조선의 위정자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위 기 의식과 반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박해를 더욱 확대시 키는 계기가 되었다. 〔배경과 원인〕 병인양요가 일어난 대내적인 배경으로 는 먼저 조선의 일관된 쇄국 정책과 척사(斥邪) 인식, 서 양 세력의 침입에 대한 위기 의식, 그리고 1866년 초부 터 시작된 병인박해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쇄국 정 책과 위기 의식은 병인양요의 먼 배경일 뿐이었고, 그 직 접적인 원인은 바로 병인박해였다. 당시 고종의 친부로 정권을 잡고 있던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분 應)의 천주교 금압령으로 시작된 이 박해는 프랑스 선교 사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체포로 이어지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 특히 1866년 2월 23일(음 1월 9일)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박해를 면한 페롱(Féron, 權) 신부와 칼래(Calais, 姜) 신부, 리델(Ridel, 李福明) 신부 등 세 명은 조선을 탈출 하여 중국에 있던 프랑스 공사와 극동 함대에 이 사실을 알리고 박해를 막아 보기로 협의하였다. 이에 리델 신부 가 먼저 장상인 페롱 신부의 지시에 따라 7월 1일에 장 치선(張致善), 최선일(崔善一, 요한, 일명 智嚇) 등의 안 내로 용당리(龍塘里, 아산군 선장면 佳山里)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7월 7일 체푸(芝罘)에 도착한 리 델 신부는 즉시 텐진(天津)으로 가 프랑스 함대 사령관 인 해군 소장 로즈(P. Roze, 魯勢)에게 조선에서의 선교 사 학살 소식을 전하면서 보복을 결심하도록 했고, 아울 러 하루빨리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를 구조해 주도록 요 청하였다. 이에 앞서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릭(Daveluy, 安敦伊) 주교로부터 박해 서한을 받게 된 만주교구장 베 롤(Verrolles) 주교도 로즈에게 서한을 보내 보복을 요청 하였으나, 로즈가 이 서한을 받은 것은 8월 말 홍콩에서 였다. 다음으로 병인양요의 대외적 배경으로는 서유럽 열강 들의 식민 정책과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을 들 수 있 다. 1842년 아편전쟁(阿片戰爭)의 결과로 중 · 영 사이 에 남경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된 이래 서유럽 열강들은 계속하여 중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식민지화를 추 진해 나갔으며, 이어 일본과 조선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 다. 특히 프랑스는 1844년 10월 중국과 황포조약(黃浦 條約)을 체결하면서 다른 외교적인 통상 노력과 함께 천 주교에 대한 금압령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마침 내 3개 항의 그리스도교 조항을 조약 안에 삽입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종교 자유를 얻어낼 수가 있었다. 그 결과 프랑스 선교사들은 프랑스 국민으로서 개항지에 성당을 건립할 수가 있게 되었고, 내지에서 전교 활동까지 가능 하게 되었다. 이처럼 프랑스는 함포(艦砲) 외교를 통해 체결한 황포 조약으로 중국에서 종교 보호 정책을 실현하게 되었고, 이는 1860년의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더욱 철저하게 보완되었다. 그러나 함포 외교는 훗날 박해가 재연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황포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세실(Cécile, 瑟西爾)은 1846년에 조 선 원정을 단행하여 1839년에 조선에서 프랑스 선교사 들을 살해한 데 대해 문책하였으며, 1847년에는 라피에 르(La Pierre, 拉別耳) 해군 대령이 그 회답을 받기 위해 조선에 출정하였다. 이때 라피에르 일행은 고군산도(古群 山島)에서 난파되어 두 척의 군함을 잃었을 뿐 조선으로부터 어떠한 회답 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의 종교 보호 정책은 이것으로 중단되 지 않았고, 따라서 기회가 오면 다시 조선 원정을 감행할 여지가 남아 있었 다. 〔1차 병인양요〕 리델 신부의 요청 을 받아들여 조심스럽게 보복 원정을 결심한 로즈는 7월 10일자로 이 계획 을 본국의 해군성 장관에게 보고하였 다. 그러나 그는 인도차이나의 반란으 로 인해 먼저 그곳에 원정해야 했으므 로 즉시 조선 원정을 단행할 수 없었 다. 이때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 벨로 네(H. de Bellonet, 白洛內)는 7월 13일 (음 6월 2일)자로 총리아문(總理衙門) 의 공친왕(恭親王)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의 임금을 폐위 하겠다고 천명하였고, 아울러 조선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공친왕은 조선은 고유한 법규를 지닌 완 전한 독립 국가임을 설명하면서 중재에 나설 뜻을 비치 는 한편, 조선에 이 사실을 자문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는 8월 22일자의 회자(回咨)를 통해 선교사 처형이 정 당한 것임을 변호하였다. 한편 인도차이나 원정에서 돌아온 로즈는 9월 7일자 로 해군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다시 한번 조선 원정 계 획을 알리고, 벨로네 공사의 월권적 행위에 항의하였다. 로즈의 보고를 받은 해군성 장관은 벨로네의 선전 포고 가 무효임을 선언하면서 해군성이나 프랑스 정부를 연루 시키지 않고서도 조선 원정에 성공해야 한다는 조건 아 래 이를 허락하였으며, 이후의 조선 원정은 전적으로 로 즈의 책임 아래 수행될 것임을 통보하였다. 이처럼 프랑 스 정부에서는 종교 보호 정책을 천명하면서도 정부의 직접 개입은 피하려고 하였다. 로즈의 원정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1차 원정은 군 사적 응징에 앞서 조선을 정찰할 목적에서 실행된 것으 로, 이를 위해 로즈는 리델 신부를 통역으로, 최선일 · 최 인서(崔仁瑞) · 심순여(沈順汝) 등 세 명의 조선 신자를 안내인으로 선발하였다. 그런 다음 1866년 9월 18일(음 8월 10일) 기함 프리모게(Primauguet)호를 비롯하여 통보 함 1척, 포함 1척 등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체푸를 출발 하였으나, 즉시 한강 입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아산만으 로 향하다가 9월 20일에야 리델 신부를 태운 통보함이 한강 입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로즈는 프리모게호 를 물치도(勿雉島, 영종도 우측의 섬)에 남겨 둔 채 통보함 과 포함만을 지휘하여 9월 23일부터 한강을 거슬러 올 라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9월 26일 한강 입구를 막고 있던 조선의 소형 선박에 함포 사격을 하여 2척을 격파한 뒤 양화진(楊花 津)을 거쳐 서강(西江)까지 올라가면서 3장의 정밀한 해 로도를 만들었다. 이때 리델 신부는 서강 앞에서 1박을 하는 동안 잠시 양화진 인근에 상륙하였으나 아무도 만 날 수 없었다. 이튿날 프랑스 함대는 그곳을 떠나 물치도 를 거쳐 10월 3일 체푸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1차 병 인양요의 전말이다. 한편 조선에 남아 있던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는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원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10월 11일(혹은 12일)에는 미리 마련해 두었던 소형 선박을 타 고 조선을 떠나 10월 26일에서야 체푸에 도착할 수 있 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9월 2일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 럴 셔먼(General Sherman)호를 물리쳤을 때 공을 세운 숨 은 공로자를 찾아 상을 주고 또다시 그러한 공로자가 나 오기를 희망하였으며, 대원군은 어영중군(御營中軍) 이 용희(李容熙)로 하여금 양화진 인근을 방비하도록 하는 한편, 방을 붙여 군사를 모으도록 하였다. 또 어린 고종 도 대신들을 불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칠 방도를 모색하 도록 하였다. 그 후 프랑스 함대가 물러간 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 고, 조선의 강물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진 것 또 한 그들 때문이므로 더럽혀진 강물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총융진(總戎陣)에 새 형장을 만들어 무수한 신자들 을 이곳에서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후 양화진은 많은 순 교자들의 피로 적셔진 곳이라 하여 신자들 사이에서는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2차 병인양요〕 체푸로 돌아간 로즈는 10월 5일 한강 봉쇄를 선언하였다. 그런 다음 10월 11일(음 9월 3일)에 기함 기리에(Guerriére)호를 비롯하여 모두 일곱 척의 군 함을 이끌고 2차 원정을 단행하였다. 이들 함선에는 대 포 10문이 실려 있었으며, 일본에서 불러온 병력을 포함 하여 총 병력 1,000명에 리델 신부와 안내를 맡은 조선 인 신자 3명도 함께 타고 있었다. 프랑스 함대는 10월 13일 물치도를 거쳐 이튿날 갑곶진(甲串津)에 이르렀 고, 10월 16일에는 마침내 강화부를 점령하였다. 이때 부터 프랑스 군인들의 약탈이 시작되었고, 일부는 민가 를 침입하기도 하였다. 그 약탈품 안에는 군기뿐만 아니 라 도자기, 직물, 은괴, 그리고 역사 서적을 비롯하여 수 많은 장서들이 있었다. 한편 로즈는 이 원정이 프랑스 국 민인 선교사를 학살한 데 대한 정당한 보복임을 천명하 는 서한을 조선측에 보냈으나 회답을 받을 수는 없었다. 강화도 실수(失守) 소식을 전해 들은 조정에서는 의병 을 모집하는 한편 급히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고 이경 하(李景夏)를 대장, 이용희를 중군, 제주 목사 양헌수(梁 憲洙)를 천총(千總)에 임명한 뒤 출정하도록 하였다. 또 대원군은 이항로(李恒老)의 주전설을 받아들여 양이보 국(攘夷保國)을 표방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경향 에 엄명하였다. 10월 26일, 조선인 신자로부터 조선군 의 출정 소식을 들은 로즈는 통진(通津) 인근의 문수산 성(文殊山城)으로 120명의 정찰대를 파견하여 우수한 무기로 그곳을 지키고 있던 조선 군사들을 물리쳤다. 그 러나 정찰대는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강화도로 돌아왔 으며, 로즈는 포함으로 한강 입구를 방비하도록 하였다. 이때 조선의 천총 양헌수는 어융 방략(禦戎方略)의 계책 으로 강화도에 잠입하여 기습을 감행하기로 하고 비밀리 에 정족산성(鼎足山城)을 점령하였다. 다시 한번 이러한 사실을 조선인 신자로부터 전해 들은 로즈는 11월 9일, 올리비에(Ollivier) 대령으로 하여금 군대 160명을 이끌 고 야포 한 대 없이 정족산성을 공략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군은 새로 만든 대포를 앞세운 조선군에게 무참한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패배 후 로즈는 즉시 강화도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프랑스군은 11월 10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1월 18일(음 10월 12일)에는 물치도를 떠나 입파도(立波島) 에 정박하였고, 11월 21일에는 완전히 조선 해역을 떠 나 2척은 일본으로, 1척은 체푸로, 그리고 나머지 4척은 상해로 돌아갔다. 이에 앞서 리델 신부는 중국을 다녀온 함정에 타고 있던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와 상봉할 수 있 었으나, 조선 원정의 실패로 인해 조선에 다시 입국할 수 있는 희망은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로즈와 함께 11월 21일 상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과와 의미〕 조선을 떠나기 직전에 로즈는 해군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의 목적이 완전히 달성되었음 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공사 벨로네를 비롯하여 북경의 외교관들, 조선 원정에 참여했던 리델 신부는 이 원정이 실패로 끝났다고 보았다. 특히 벨로네 공사는 해 군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로즈의 원정은 조선에 타격 을 주기는커녕 정족산성 참패 후의 서두른 철수로 인해 오히려 조선에 승리감을 안겨 주었고,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학살을 확대시키도록 하였다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해군성 장관은 로즈를 두둔하여 그의 성공을 인정해 주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중국 원정에서 얻은 것과 비교해 볼 때, 우선 군사적으로 로즈의 원정은 강화도 점 령까지는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프랑스 함대의 패배로 끝 나게 되었다. 둘째 외교적으로 로즈는 수교 관계가 없던 조선으로 가서 통상 조약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귀환하였고, 이것은 오히려 조선의 쇄국 정책과 척사 사상을 강화시켜 주고 만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세 번째로 병인양요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연장시키고 가열시킴으로써 중국에서처럼 외교적으로 종교의 자유 를 얻는 동시에 조선에 재입국하기를 희망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실망만을 안겨 주고 말았다. 실제로 대원 군은 11월 21일에 천주교도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 록 전국에 명하였으며, 이틀 뒤인 11월 23일에는 성연 순(成連順)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전국에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영을 내렸다.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입국할 수 있게 된 것은 10년 뒤인 1876년이었다. 아울러 병인양요는 프랑스가 취해 온 종교 보호 정책 의 좌절을 의미한다. 프랑스가 다시 한번 이를 시도하는 것은 20년이 지난 1886년의 한불조약 체결 때였다. 물 론 프랑스는 로즈의 원정을 성공한 것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했으며, 따라서 1867년 3월에 미국이 조선에 대한 공동 원정을 제의하자 새로운 원정이 불필요하다고 이를 일축하였다. 또 같은 해 5월 벨로네의 후임으로 북경에 부임한 랄르망(Lallemand) 공사가 새로운 원정이 불가피 함을 제의하면서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상 요구는 물론 통상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때도 이를 받 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리델 신 부와 조선 신자들이 프랑스 함대에 동승한 사실은 그 동 안 천주교 신자를 서양 세력의 앞잡이로 간주해 오던 인 식을 확인시켜 준 셈이 되었다. 그 결과 1868년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est.Oppert, 載拔)가 조선 원정을 감행 하여 덕산 굴총 사건' 을 일으켰을 때, 페롱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안내자로 동승한 사실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 리델 ; 로즈 ; 병인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下/ (韓佛關係資料(1866-1867)>(변역 문), 《教會史研究》 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pp. 195~288/ 한국교 회사연구소 편, 《韓佛關係資料》,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高實 錄》 《 日 省錄》 《通文館志》 《承政院 日 記》/ 《同文彙考》 《巡撫營 錄》 籌辦夷務始末》 《丙寅 日 記》梁憲洙) 《荷居集》(梁憲洙) 《鼎足 山城接戰事實)梁憲洙) 《龍湖閒錄》 李能和, 《朝鮮基督教及外交 史》, 彰文社, 1928/ Louis Wei Tsing-Sing, La politique missionnaire de la France en Chine, Paris, 1958/ 柳洪烈, 《高宗治下 西學受難의 研究》, 을 유문화사, 1962/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리델 문서》 I, 한국교회 사연 구소, 1994/ 田保橋潔, 〈李太王丙寅洋 日 本國の調停〉, 《靑 丘學叢》 11호, 1933/ 崔奭祐, 〈丙寅洋擾小考〉 歷史學報》 30집, 역사 학회, 1966/ 金源模, 〈로즈艦隊의 來侵과 梁憲洙의 抗戰〉, 《東洋學》 13집, 동양학연구소, 1983/ 崔奭祐, 〈韓佛條約 체결 이전의 양국 관 계>, 《韓佛修交100年史史》, 韓國 史研究協議會, 1986/ 李元淳, 〈丙寅洋 擾 -考> , 《韓佛修交100年史史》 , 韓國 史研究協議會, 1986.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