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파시오 (675?~754)

Bonifat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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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 성인(와이너트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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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 성인(와이너트 작) .


성인. 순교자. 독일의 사도. 마인츠(Mainz) 대주교. 축 일은 6월 5일. 본래 이름은 빈프리(Winfrid). 675년경 영국 웨식스(Wesex)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주로 수도 원에서 교육받았다. 처음에는 엑서터(Exeter)의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위탁 교육을 받다가 그 후 너슬링(Nursling) 의 베네딕도회에서 윈버트(Winbert) 수도원장에게 교육 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앵글로 색슨 수도원의 사상과 신 학적인 지식, 교황청, 선교 활동 등의 고급 지식을 배웠 다. 너슬링 베네딕도회에 입회하여 30세에 사제 서품을 받고, 그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된 그는 수많은 시(詩)와 최초의 라틴 문법서를 썼는데, 라틴 문법서는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남다른 웅변력과 가르침이 수도원 밖에까지 알려져, 마침내 그는 웨식스의 이나(Ina, 688~725) 왕의 특사로서 웨식스 교회 회의 때문에 캔터베리의 대주교 부카르드(Burchard, 692~731)에게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 러나 그는 영국에서 명성을 떨치는 것보다 선교사가 되 기를 희망하였다. 제1차 선교 활동 : 보니파시오는 716년에 수도원장의 승인을 받고 프리즐란트(Fiesland)로 갔는데, 당시 그곳 은 라드보트(Radbod) 공작의 방해로 그리스도교가 배척 당하고 있었고, 프리즐란트의 사도인 위트레히트(Umecht) 의 빌리브로르도(Willibrordus)의 선교 활동도 움츠러들 정도였으므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보니파시오의 선교 활 동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결국 너슬링 수도원으로 돌아 간 그는, 717년에 수도원 원장이 사망하자 그 후계자로 선출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이듬해 교황 그레고리오 2 세(715~731)를 알현하기 위해 순례자들과 함께 로마로 갔다. 그는 교황을 여러 번 알현하였는데, 719년 5월 알 현 때에는 교황으로부터 라인 강 동쪽에 사는 이교도들 에게 선교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때 교황은 로마 교회식으로 세례를 줄 것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로마 교회에 자문을 구할 것을 강조한 서한을 주면서 빈프리 트라는 이름 대신에 로마의 순교자인 '보니파시오' 라는 새로운 이름을 그에게 주었다. 우선 튀링겐(Thüringen)으로 가 지식인들에게 설교하 고, 라드보트 공작이 사망하자 빌리브로르도를 도와 선 교 활동을 하고자 프리즐란트로 간 그는 이곳에서 3년 동안 활동하였다. 빌리브로르도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고자 하였으나 독립된 활동 영역을 원한 보니파시 오는, 722년에 가장 이교도적인 지역인 헤센(Hessen)으 로 가 아뫼네부르크(Amöneburg)에 베네딕도회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등 선교 활동에 성공을 거두자, 교황은 보니파시오 를 로마로 소환하여 주교로 서품하고 교회 법령집과 독 일의 모든 수도자들과 관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주 었다. 이 서한은 그의 독일 선교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프랑크 왕국의 재상인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의 보호를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 지역에서의 활동 : 보니파시오는 카를 마르텔의 보호를 받으며 723~725년에 제2차 헤센 선교에 나섰 는데, 이때 그는 가이스마르(Geiima)에서 이교도들이 신성시하는 떡갈나무를 베어 경당을 짓는 데 사용하였 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개종자들이 확산되는 결과 를 가져왔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725년에 보니파시 오를 다시 튀링겐으로 파견하였지만, 이 지역은 다소 그 리스도교화되어 있었으나 교리에 무지한 사제들과 그리 스도교 예식과 자신들의 풍습을 뒤섞은 이교도들 때문에 그는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 당시 그의 선교 방법은 영국 수사와 수녀들을 독일 선교사로 파견하는 한편, 그 리스도교 정신과 시민 정신을 둘 다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고타(Gotha) 근처에 있는 오르드루프(Ohrdruf) 에 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10여 년 동안 많은 이교도들 을 개종시키고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신앙을 정화 시키고 쇄신시키는 데 힘썼다. 731년에 신임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3세(731~741)는 이듬해 보니파시오를 명의 대주교로 승품시키고 앞으로 창설될 독일 지역의 주교들을 서품할 권한을 주었다. 잘 츠부르크(Salzburg)의 루페르토(Rupertus)가 아일랜드 수 사들의 도움을 받아 선교하던 바이에른으로 734년에 간 보니파시오는, 이곳에서 후베르트 1세(Hubert I ) 공작의 원조를 받았다. 737년에 세 번째로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교황은 그에게 독일 교회 설립을 위임하면서 독일 주 재 교황 특사로 임명하였다. 바이에른에 잘츠부르크 교 구,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교구, 프라이징(Freising) 교 구를 설립한 보니파시오는 740년에 그의 주재로 최초의 바이에른 교회 회의를 개최했으며, 이듬해에는 몇 개의 다른 교구들(Buraburg, Erfurt, Würzburg, Eichstätt)과 하이덴하임 (Heidenheim)에 수도원을 설립한 데 이어 744년에는 풀 다(Fulda)에도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특히 보니파시오에 게 있어서 풀다는 영성적인 쇄신의 장소였으며 선교회의 중요한 중심지요, 독일에서 종교적이고 지성적인 생활 중심지가 되었다. 프랑크 교회의 개혁 : 프랑크 교회는 당시 주교 선출 에 대한 평신도의 간섭, 성직자들 사이의 세속적인 지위, 재산을 소유한 교회들과 면세 수도원들의 관계 등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었다. 741년에 카를 마르텔이 사망 하고 그의 후계자 카를만(Karlsman, 741~747)과 피핀 3세 의 후원을 얻은 보니파시오는, 그들과 협력하여 프랑크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으며, 742 년에는 카를만의 지지를 받아 오스트리아의 대주교가 되 었다. '제1차 게르만 민족 종교 회의' (Concilium Germanicum)가 742년 4월 21일에 개최되었고, 또 다른 교회 회 의가 이듬해 3월 1일 리프티나(Liptina)에서 개최되었다. 주교 · 사제 · 평신도 고관들이 참석하였던 이 교회 회의 의 법령의 최종 승인은 카를만에게 유보되었는데, 그는 이 회의의 결의를 국법으로 공포하였다. 744년에는 피핀 3세가 수아송(Soisons)에서 왕국 전 체를 위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보니파시 오는 프랑크 왕국 주재 교황 대리가 되었다. 보니파시오 는 콜른(Köln)에 자신의 대주교좌를 설립하고 싶어하였 으나, 이 계획은 745년 교회 회의와 교황으로부터 승인 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의 주교들의 반대로 무산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 제정된 법령도 이행되기 어려 웠다. 그 이유는 평신도 군주들이 교회 재산을 회복시키 기를 반대하였으며, 때로는 성직자들이 개혁에 저항하였 기 때문이다. 왕국의 모든 주교들이 참석한, 747년에 개 최된 교회 회의에서 보니파시오는 이들을 신앙과 충성의 고백으로 로마와 일치시키려 하였다. 같은 해에 카를만 은 수도원으로 은퇴하고, 피핀 3세가 유일한 왕이 되었 으며, 보니파시오는 마인츠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성직자 개혁 지지자였던 피핀은 보니파시오에 의해 고안 된 교계 조직을 꺼려 하였으므로, 보니파시오의 권위는 점차 하락하였으며, 대부분 앵글로 색슨족인 자신의 협 조자들이 그가 죽은 후에 고통을 겪을 것을 두려워하였 다. 그래서 그는 생 드니(Saint-Denis)의 수도원장인 풀라 (Fulrad)에게 그들의 안전을 위해 편지를 썼다. 〔순교와 평가〕 대주교직을 사임한 보니파시오는 프리 즐란트에서 색슨족에 대한 선교 계획을 다시 시도하여 1 년 동안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이때 이미 세 례를 받은 이들만이 아니라 북동부 프리즐란트의 이교도 들에게서도 다소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754년 6월 5 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도쿰(Dokkum) 근처의 보르네 (Borne) 강변에서 견진성사를 준비하던 중, 프리즐란트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그의 동료 52명과 함께 살해되 어, 그의 유언대로 풀다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보니파시오는 독일인들을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일 교회를 로마 교회와 밀접히 일치된 교회로 조직하였 으며, 프랑크의 성직자들을 개혁시켰다. 또한 그는 선교 활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그가 세운 수도원들은 많은 주교와 교수들을 배출함으로써 프 랑크 왕국 생활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 풀다 ; 독 일 ; 네덜란드 ; 영국 ; 베네딕도회) ※ 참고문헌  S. Hilpisch · C.M. Aherne, 《NCE》 2, Pp. 665~668/ G. Hocquard, 《Cath》 2, pp. 139~142/ G. Schreiber, 《LThK》 2, pp. 591~5941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 Oxford, 1987, pp. 51~53/ Enzo Lodi, trans. by Jordan Aumann, OP.,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PP. 140~142/ A. Franzen, Kirchengeschichte(최스 역, 《교회 사》, 분도출판사, 1982). 〔梁惠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