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파시오 8세 (1235~1303)

Bonifatius 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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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 8세 교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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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 8세 교황 .


교황(1294~1303) 중세의 마지막 교황. 본래 이름은 베 네데토 가예타니(Bencdetto Gaetani)이다. 1235년 아냐니 (Anagni)의 전통 있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260년에 아냐니의 주교좌 성당 참사 위원이 되었으며, 토디(Todi) 에서도 참사 위원 직위를 얻었다. 그곳에서 법학을 공부 한 다음에 스폴레토(Spoleto), 페루지아(Pengia) , 볼로냐 (Bologna)에서 법률을 공부한 그는, 1264년부터 약 10 년 간 교황청 공증인이자 추기경 회의의 변호인으로서 파리와 영국에서 교황 특사를 보좌하는 외교 사절로 활 동하였으며, 1281년에는 부제 추기경이 되었다. 그리고 1290년의 파리 교회 회의에 교황 사절로 참석하여 지도 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파리 대학교 교수들이 탁발 수 도회에 대해 비난하자 이를 외교적인 면에서 열렬히 옹 호하였으며, 앙주(Anjou) 가문과 아라곤(Aragon) 가문 사이의 평화 협상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1291년에 로마로 돌아와 오르비에토(Orvieto)에서 사 제 서품을 받은 그는 몬티부스에 있는 성 마르티노 성당 의 사제 추기경이 되었는데, 같은 해에 그의 형 로프레도 (Roffredo)가 로마의 상원 의원이 되면서 가예타니 가문 은 로마의 귀족들과 경쟁을 벌일 수 있을 만한 권력을 갖 게 되었다. 한편 1292년 4월 4일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사망으로 교황좌가 공석이 되자 오르시니(Orsini) 가문과 콜로나(Colonna) 가문, 그리고 베네데토 추기경은 교황 좌를 두고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1294년 7월 5일에 모 로네의 베드로(Pietro da Morone)가 철레스티노 5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었다. 베네데토 추기경은 교부들을 설득하여 그 해 12월 13일 철레스티노 5세를 사임하도 록 한 후, 12월 24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 듬해 1월 23일 교회 역사상 가장 화려하게 착좌식을 거 행하고, 교회의 일치를 주제로 한 취임 기념 회칙 <글로 리오수스 엣 미라빌리스〉(Gloriosus et mirabilis)를 발표하 였다. 첼레스티노 5세는 그 후 신임 교황에 의해 푸모네 (Fumone) 성에 감금되었다가 그곳에서 1295년 5월 19 일에 사망하였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보니 파시오 8세 교황은 철레스티노 5세를 지지하던 프란치 스코 수도회 회원들과 그들의 후원자인 콜로나 추기경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정치적인 야심〕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십자군으로 전 유럽을 교황권 아래에 두고 싶어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그의 교회 정치적인 활동은 시칠리아 섬 을 둘러싼 협상과 콜로나 가문과의 대결이었다. 시칠리아 섬에 대한 협상 :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시 칠리아의 왕좌를 얻기 위한 아라곤 가문의 자코모 2세와 앙주 가문의 샤를르 2세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중재하였 다. 교황은 1295년에 시칠리아 섬이 교황령임을 주장하 면서 아라곤 가문이 이 섬을 앙주 가문에게 반환해 주기 를 요구하였으나, 시칠리아인들은 1296년에 자코모 2세 의 형제인 프레데리코(Fredenico)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결국, 교황은 1302년에 마지못해 프레데리 코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이듬해 5월 21일 교 서 <렉스 파치피쿠스>(Rex Pacificus)를 통해 이 사실을 공 식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렇지만 교황은 샤를르 2세의 협조를 받아 이 섬을 교황령으로 다시 차지하려는 시도 를 포기하지 않았다. 콜론나 가문과의 대결 : 이 과정에서 교황이 아라곤 가 문과 친밀하게 지내던 자코모 콜론나 추기경과 피에트로 콜론나 추기경과의 관계를 단절하자, 콜론나 가문은 보 니파시오 8세의 교황 선출의 합법성을 문제 삼았으며, 가예타니 가문과도 경쟁 관계에 돌입했다. 또한 자코모 추기경은 교황의 친족 등용과 영토를 넓히려는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하였다. 급기야 1297년 5월에는 피에트로 콜론나의 형제인 스테파노 콜론나가 아냐니로부터 로마 로 호송되어 오던 막대한 금액을 실은 배를 약탈하기까 지 하였다. 콜론나 가문의 두 추기경을 소환하여 그들이 약탈한 금액을 돌려 받은 교황은 그들에게 전략상 중요 한 성채 3개를 자신에게 넘겨주기를 요구하였다.이를 거절하고 롱게(Longhezza)에 있는 그들의 성으로 간 그들은 그곳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지도자인 야코포 네 다 토디(Jacopone da Todi)와 합류하자, 교황 보니파시 오 8세는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는 위험 요소로 여기고, 1297년 5월 10일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여 콜론 나 가문을 조사하도록 하는 한편 그 들을 파문하였다. 그러자 교황 선출 이 비합법적이었다는 성명서를 소르 본에 보낸 야코포네 다 토디는 교회 회의의 소집을 요구하였으며, 콜론나 의 두 추기경은 교황의 절대주의와 그의 조세 법률 규정을 고발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은 군사적인 행동을 취하여 그들 가문의 발상지인 자가랄 로(Zagarallo)와 팔레스트리나(Palestrina)를 점령하고 콜론나 가문을 멸 족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두 추기경 과 그들의 친족들을 프랑스 남부 지 방 티볼리(Tivoli)로 내쫓았다. 이때 프랑스는 콜론나 가문에 동조하였고, 필립 4세도 그들을 지지하였다. 북유럽의 외교 : 1295년과 1297년에 교황은 프랑스 와 영국 사이의 휴전 협정을 중재하였으며, 1295년에는 헝가리와 폴란드의 왕권 계승까지도 중재했으나, 1299 년의 스코틀랜드와 영국 사이의 중재는 성공하지 못하였 다. 1298년에는 룬트(Lund)의 대주교를 감금하였다는 이유로 덴마크의 에릭(Enc) 왕을 파문하고 1303년에 왕 의 항복을 받은 교황은, 129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로 선출된 알베르트(Albert)도 파문하였다. 그러나 1303 년에 교황은 프랑스와 맞서면서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알베르트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였다. 이러 한 외교 활동을 통하여 그는 절대적인 교황권을 확립하 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교황권의 영향력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며, 교회는 구원을 위한 영 적인 권위를 갖고 세속의 권력은 이 영적인 권위에 봉사 하기 위한 것이며, 왕의 권력은 교황권으로부터 부여된 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황권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극단 적이고 완고한 것이었다. 〔교황권과 국가 권력의 싸움〕 프랑스 왕과의 성직자 세금 논쟁 : 1296년 영국의 에드워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립 4세는 영토 분쟁과 상업상의 경쟁으로 인해 전쟁을 일으켰는데, 두 국가는 전쟁 자금 때문에 성직자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런데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에서는, 성직자들은 교황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물지 않으며, 특별히 성직자들이 '정의로운 전쟁' 을 지 원하려 하는 경우에 교황은 이를 묵인한다고 규정하였 다. 두 국가의 왕들은 자신들이 '정의로운 전쟁' 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직자들도 세금을 내도록 결정했으 나, 교황은 대칙서 <클레리치스 라이코스>(Clericis laicos, 1296. 2. 24)를 발표하여 두 왕의 조치는 평신도가 성직자 에 대해 갖는 적의의 태도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평신도 통치자가 교황의 허락 없이 성직자에게 세금을 요구할 때에는 자동적으로 파문될 것이며, 왕의 요구를 따르는 성직자들도 파문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교서의 내용에 대해 두 왕은 맹렬히 반대하였는데, 영국에서는 캔터베 리의 대주교인 로버트(Robet)의 지지로 어느 정도 효력 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필립 4세는 교황청에 프랑스 통 화의 유통과 수출을 금지시켜 교황에게 재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 왕의 저항에 분개한 교황은 1296년 9월에 교 회의 자유를 양도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감수하겠다는 선 언으로 시작하는 대칙서 <인에파빌리 아모리스>(Ineffabbili Amoris)를 보냈는데, 이 대칙서는 다소 완화된 화해 방식 으로 세금 문제에 대한 자신의 교서를 변명하면서 왕이 수출 금지 명령을 철회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 리고 1297년 7월에는 대칙서 〈엣시 데 스타투>(Etsi de Statu)를 통해 필요한 시기에 프랑스 왕은 교황과 의논하 지 않고서도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으며, 왕 스 스로 그 필요한 시기가 언제인지 판단할 수 있음을 인정 하였다. 또한 필립 4세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조상인 루이 9세를 그 해 8월 11일 시성함으로써 프랑스 왕과 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교황은 《교회법 대전》(Corpus Iuris Canonici) 제6권을 발행하였으며, 1300년을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성년(聖年)으로 반포하였다. 그리고 교서 <안티쿠오룸 하벳 피뎀〉(Antiquorum habet fidem, 1300.2.22)에서 베드로 대성전과 바오로 대성전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 대사를 선언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교황의 위신을 높 여 주었으며, 교황의 재정 또한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왕과의 재대결 :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프랑 스 왕과 대주교들과 상의하지 않고 파미에(Pamics)를 주 교좌로 선정하고 세세(Bernard de Saisset)를 그곳의 주교 로 임명하자, 필립 4세는 그가 영국의 첩자이며 배반자 이고 이단자라는 고발을 받아들여 그를 체포하고, 그 자 리에 다른 주교를 세웠다. 이에 교황은 칙서 <아우스쿨 타 필리>(Ausculta Fili, 1301. 2. 5)를 발표하여 그리스도교 국가 영주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면서 필립 4세를 비난하 였다. 이 칙서는 추기경 회의에서 승인된 것으로서, 필리 프의 행위는 왕권의 오용이요 왕의 재판권을 불법적으로 확대시킨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칙서는 파리에 전해졌 지만 발표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왕의 측근에 의해 내용 이 변조되었다. 세세 주교의 석방과 배상을 명한 교황은 1302년에 공 의회를 소집하여 프랑스 주교들을 로마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필립 4세는 공의회에 참석하는 것을 금하고 그 해 4월 남작들과 성직자들을 파리의 노트르담에 소환하 여 회의를 열어 프랑스 왕의 독립과 왕국의 세속사에 있 어서 왕의 종주권을 선언하였다. 이에 교황은 1302년 11월 18일 그의 사상이 담긴 가장 중요한 교서 <우남 상 탐>(Unam Sanctam)을 발표하여, 모든 세속의 권력 위에 있는 교황의 영적인 권력의 절대적 우위성을 주장하였 다. 이 교서에서 교황은 "모든 인간 피조물들은 전적으 로, 구원의 필요성으로 인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 다" 고 밝혔다. 한편 1303년 5월에, 콜론나 가문의 추기 경들로부터 지지를 받던 왕의 고문인 기음 드 노가레 (Guillaume de Nogaret)는 교황을 횡령자이자 이단자, 성직 매매자로 고발하면서 필립 4세에게 이 사건을 심의하기 위한 회의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같은 해 6월 프랑스의 삼부회는 루브르에서 집회를 열어 교황이 첼레스티노 5 세를 암살했으며,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고 성직자들로 하여금 고해성사의 비밀을 어기게 하였다고 고발하였다. 아냐니의 음모 :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이러한 고발 을 부정하고, 필립 4세를 파문하는 내용의 교서를 그 해 9월 8일에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그 전날 시아라 콜론나 (Sciarra Colonna)와 일부 귀족 대표자들의 지지를 받아 병 사들을 동원한 기욤에 의해 여름을 보내고 있던 아냐니 에서 체포되었다. 기욤은 교황직의 사임을 강요하였으나 교황이 이를 거절하자, 시아라는 교황을 죽이려 하였고 기욤은 교황을 교회 회의에 세우기 위해 데려가기를 원 하였다. 한편 아냐니 마을 사람들은 교황의 석방을 요구 하였으며, 9월 10일에는 피에스키(Lucas Fieschi) 추기경 이 교황을 구하기 위하여 로마에서 왔다. 이틀 동안 교황 은 신체적으로 모진 학대를 받았지만 9월 14일 아냐니 를 떠나 9월 25일 로마에 도착하였다. 이 일로 교황의 몸과 마음은 회복되지 않았으며, 1303년 10월 11일에 사망하였다. 〔평가와 의의〕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중세의 마지막 교황'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교황권 절대주의의 최 후의 옹호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야심 많고 독재 적인 인물이었으며, 그의 이기적이고 완고하고 성급한 성격은 교황으로서의 사명 수행에 어려움을 주었다. 그 의 통치가 실패하고 비극을 맞이한 것은 가예타니 가문 의 권력 상승에 대한 지나친 몰두와 그 시대에 부합하지 못하고 당시 유럽 세계에서 일어나던 강력한 국가주의를 깨닫지 못한 무능 때문이었다. 그가 집요하게 주장했던 교황의 정치적인 권위는 당시의 새로운 군주 정치에 받 아들여지지 못하였으며, 아냐니에서의 체포는 그의 주장 의 공허성과 교황으로서의 무능함을 밝혀 준 사건이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구 행정에 관한 주요 법령 과 혼인법, 수도 생활법 등을 규정한 위대한 법률가이자 행정가로서 그 의의를 인정받고 있으며, 특히 그가 발행 한 법령집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는 교황청의 도서관을 확장시켰으며, 아비농(Avignon) 과 로마에 대학을 설립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모 든 외교 활동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평화와 일치를 도모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 《교회법전》의 역사 ; 교회와 국가 ; 성년) ※ 참고문헌  B. Tierney, 2, pp. 671~6731 P. Mikat, 《LThK》 2, pp. 589~591/E. Griffe, 《cath》2, pp. 136~138/ Hans Wolter, 《TRE》 7, pp. 66~68/ William J. Dohar, 《EC》 2, pp. 190~192/ Jean Mathieu-Rosay, La véritable histoire des Papes, Paris, 1991, pp. 183~188/ Philippe Levillain, Dictiom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Fayard, 1994, pp. 233~2361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Univ. Press, pp. 208~210. 〔梁蕙貞 〕